2024. 3월 고침
2/ 1. 드디어 연경을 나서다
1656 년 음력 10 월 29 일 효종의 친동생 인평대군은 청국 경사에서 진주정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후 귀로에 올랐다. 대군은 한양.연경을 오가는 중 매일 일기를 썻고 후일 <연도기행>이 엮어져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 글은 당시의 요하.요동 및 압록강이 이 지금의 어느 물길이고 어느 지역인지를 밝히려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기 때문에 일기 문장 중에서도 지리 부분에 촛점을 맞출 것이며 북경에서 한양까지의 귀로 중에서도 일부분인 북경에서 압록강까지의 로정만 검증하려 한다.
참고) <연도기행>을 번역한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주소
아래는 정사 임무를 마치고 지금의 북경을 떠난 10 월 29 일 일기 전문이다.
29일(계묘)
가. 북경.의주 로정의 개요
1) 연경을 나서 산해관으로
연경 0/0- 통주 55/55- 삼하현 80/135- 운류하 65/200- 옥전 70/270- 풍윤 80/350-사하역 100/450-
노룡 60/510- 유관점 90/600- 산해관 80/680-
주) 지명은 당일의 숙영지이고 앞의 숫자는 당일의 진행 리 수, 뒷 숫자는 북경에서부터의 누적 리 수다.
2)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지나다
산해관 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
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3) 요택을 건너다
광녕 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삼차하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4) 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으로
요양 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 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의주 80/1990
사실 지리는 지리지 문헌 기록에 나타난 지명과 지형을 해설하는 문장만으로는 정확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당연히 지도와 대조해야만 한다. 상상한다 해도 부정확할 수 밖에 없고 의도적으로 변조한 기록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전해져 오는 고지도도 마찬가지다. 부정확하거나 의도적으로 변조한 묘사도 있을 터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된다. 또한 문헌 기록과 고지도 묘사가 판이할 경우 어느 한 쪽만을 신뢰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과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래는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물론이고 재야조차도 수긍하는 북경.의주 로정이다.
주) <중국전도> 하북.요녕성 부분도, 2008 년 9 월 중앙지도문화사 인쇄.발행
아래는 위 중국전도에 표시된 물길을 추출.모사한 모사도이며 역시 북경에서 의주까지의 4 개 구간을 표시하였다.
- 모사도 1
대군은 일기에서 북경에서 산해관까지 680 리, 산해관에서 북진 곧 광녕까지 500 리, 요택을 건너 요양까지 360 리, 요양에서 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450 리로 총 1990 리를 걸었다 하였고 한국의 강단.재야 사학계는 모두 위 모사도1 에 묘사된 로정으로 해석한다. 어쨋든 북경.의주간 귀로 로정은 물길로는 삼하.란하.대릉하.요택.태자하.요하.압록강 등을 차례대로 건너야 하고 옥전.노룡.산해관.광녕.요양.연산관 등을 경유하여야 한다.
그러면 인평대군 일행이 걸었던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은 과연 위 모사도1에 표시한 적색 실선과 같은 방향과 거리였을까?
답하기 전에 청 시기 간행되었다는 아래 <경판천문전도>를 먼저 보자.
- <경판천문전도京板天文全圖- 이하 경판도라 함> 부분도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이 제작,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화 했다 함.
Woodson Research Center, Fondren Library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6895389
위 <경판도> 부분도에 연경부터 의주까지의 대군 일행 귀로 로정을 표시하면 아래의 적색 실선이 될 것이고 청색 실선은 당연히 당시 흘렀던 로하.삼하.란하.대릉하.요하.혼하.태자하.압록강 6 개 물길이다.
<경판도>와 모사도1 에 표시된 인평대군의 귀로 방향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단지 물길만큼은 로하.삼하가 1 물길로 표시된 것을 제외하고 대략 순서나 각 물길의 흐르는 방향과 위치 및 경유지명은 대략 일치한다. 지형 묘사의 정확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이 되는 물길과 방향은 과학적 지도 제작 기법인 축척과 측량에 의해 표시된 현 <중국전도> 표시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결국 <경판도>의 묘사가 부정확하다고 평할 수 있겠다.
그러면 각 구간의 거리나 총거리는 어떨까? 거리 측면에서의 평가는 비록 <경판도>의 지형 묘사가 부정확한 점은 있지만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하기에는 조금 이르다.
이번엔 1137 년 송나라 사람 황상이 바위에 각자했다는 아래의 <지리도>를 보자.
아래는 위 <지리도>의 오른쪽.위쪽에 표시한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주요 물길과 지명을 표시하고 북경에서 의주까지의 로정도 표시하였다.
<지리도>에 추기 표시한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 방향은 <중국전도> 보다는 <경판도>와 비슷하다.
위 <지리도>를 토대로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 있다. <중국전도>의 북경.의주 로정이 <지리도>의 표시보다 동쪽으로 크게 확장.묘사된 점이다. <지리도>의 요하가 흘러드는 바다의 대략 정남쪽 방향에 산동반도의 중심부가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전도>의 요하 하류 남쪽도 산동반도가 묘사되어 있기는 하다. 문제는 <중국전도>에는 요동반도가 가리고 있고 요하의 입해 방향도 <지리도> 요하의 정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라는 점이다.
결국 <지리도>에 묘사된 요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의문이 모두 가신 것은 아니다. 즉 송.거란 시기 요하였을 지금의 란하 위치 서쪽에 별개의 란하가 표시되어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란하가 둘이였다는 말일까? 그것은 아니다. 중국의 어떤 지리지 어느 구석에도 두 개의 란하가 있다는 기록은 없다. 지형이 변할 만큼 큰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으니 란하가 둘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와 요하는 송.거란 시기 이후 동쪽으로 옮겨진 란하.요하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번에도 거란.요국 이후 금.원.명.청 시기 정사 지리지 어느 곳에서도 란하.요하가 동쪽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고려.이조선의 서쪽 국경이 동쪽으로 크게 이동되어 지금의 압록강 위치로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가능성이라고는 청국이 멸망한 이후 어느 시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것 하나 뿐이다.
하지만 한국인 모두는 현재까지도 1911 년 청국이 멸망한 이후에 지금의 란하 주변에 있었던 란하.요하가 지금의 란하와 요하로 옮겨졌다고 생각지 않는다. 즉 옮겨졌다는 것은 변조.위작이란 말이지만 변조.위작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지리는 고대부터 이어진 것이고 변함이 없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는 한국사를 연구하는 일본.중국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까지 굳은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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