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월 고침

 

- 드디어 연경을 나서다 

 

1656 년 음력 10 월 29 일 효종의 친동생 인평대군은 청국 경사에서 진주정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후 귀로에 올랐다. 대군은 8 월 3 일 한양을 떠나 12 월 16 일 무사히 한양에 도착한 대략 4 개월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매일 일기를 썻고 후일 <연도기행>으로 엮여져 현재까지 전해진다. 일기 중에서도 지리 부분에 촛점을 맞출 것이며 북경에서 압록강까지의 귀로 로정만 검증하려 한다. 

 

참고) <연도기행>을 번역한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주소

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6&cate1=Z&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BT_1416A_0030_020_0290&upSeoji=ITKC_BT_1409A

 

아래는 정사 임무를 마치고 북경을 떠난 10 월 29 일 일기 전문이다.

 

29일(계묘)

맑음. 이른 아침에 떠나려는데, 부사ㆍ서장관 및 영응 중사(領鷹中使)가 올라와서 함께 떠났다.

 

해대문(海岱門)으로 해서 자성 문루(子城門樓)로 나왔는데, 옹성(擁城)은 없고, 적루(敵樓)만 높을 뿐이다. 남쪽 나성(羅城)의 북문(北門)으로 해서 나와서 길 오른편에 있는 묘옥(廟屋)으로 돌아들어가 관복(冠服)을 정제하고 전별연(餞別宴)에 참석했다. 형부 상서(刑部尙書)가 연회를 주관한다고 하는데, 이는 청인(淸人)이다. 연회가 끝나자 약 2리쯤 가서 길 왼편 묘옥(廟屋)으로 들어가 관복을 벗고, 쌍참(雙驂)을 멍에했다. 아역 김거군(金巨軍)과 김덕지(金德之)가 달려와서 작별을 고하기에 온화한 말로 위로해서 보냈다. 감기가 낫지 않은 것을 무릅쓰고 길을 가게 되니, 머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며, 한열(寒熱)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면 떠날 수 없었겠지만, 일단 연경을 나서니 기쁜 마음이 넘쳐흘러서 신음하는 것조차도 잊고 마음이 미칠 것만 같았다.
 
시방원(十方院)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늦게 통주(通州) 서문(西門)에 이르니, 거마(車馬)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간신히 틈을 얻어서 들어가 남라성(南羅城) 점사(店舍)에 유숙했다. 연경 별관 생활의 괴로웠던 일을 회상해 보니 시원하기가 마치 팔찌를 벗어난 매와도 같았다.
 
연경에 사신 다닌 것이 몇 번인지 모르는데, 중행(中行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의 무리의 행악(行惡)과 주구(誅求 강요하는 것)가 갈수록 심하다. 그 끝 없는 욕심을 어떻게 다 채워 준단 말인가. 이것 때문에 노수(路需)도 고갈되었다. 포학을 부리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등창이 생기게 한다. 이것이 모두 흉악한 이일선(李一善)의 소행이니, 대개 사신 올 때 그의 처남(妻娚)을 데려다 달라고 간청하던 것을, 남에게 혐의를 받을 것 같아서 그의 간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자는 일찍부터 불효로 알려져 있는 데다가 이제 그 감정을 사행(使行)에게 폭발시켜서 일마다 말썽을 부리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예부 계심랑(啓心郞) 한 사람은 대통관 이일선과 아역 박효남(朴孝男)ㆍ김명선(金明善)을 데리고 삼하(三河)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고,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 한 사람과 공부 낭중(工部郞中) 한 사람은 박씨(博氏) 두 사람, 당역(唐譯) 한 사람, 대통관 이몽선(李夢先), 아역 김덕생(金德生)ㆍ윤견(尹堅)을 데리고 관상(關上)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다. 공부랑(工部郞)은 시초(柴草)를 맡고, 세 역관은 호행(護行)을 맡아서 관상까지 가고 나머지는 모두 봉성(鳳城)까지 호행한다. 청 나라 장수 두 사람이 갑군(甲軍) 20명을 거느리고 관상까지 호송하기로 되어 모두 일행과 함께 떠났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하며 그 비위를 맞추어 주기가 어렵다.
 
연경을 떠나올 때 아문에서 준 전별 금품은, 사신에게는 소와 양을 주었고, 정관(正官)에게는 찬은(饌銀 식사 비용으로 쓰라고 주는 은자)을 주었다. 이 때문에 우장(牛庄)까지는 오직 시초(柴草 땔나무) 만을 지급하고 하정(下程)은 공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관례이다. 이날 55리를 갔다.

 

 

대군은 북경을 떠나는 일이 감기가 낫지 않아 한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고통보다 더 기쁘다고 한다. 청국에 굴복한 지 얼마되지 않은 비상한 시국이라 개인적인 복잡한 감정은 물론이고 진주정사로서의 임무에 대한 부담이 얼마나 컷을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다. 
 

가. 북경.의주 로정의 개요

 

북경에서 의주까지는 거의 대부분 육로이기는 하으나 습지와 강인 요택.요하.압록강 등은 배로 건너야 하는 로정이다. 즉 북경을 떠나 동쪽으로 나아가며 산해관을 경유한 후 오른쪽으로 만灣 곧 요하의 하류를 끼고 동북쪽으로 오른 후 의무려산 아래에서 요택을 가로지르고 그 끝에 흐르는 요하를 건너고 옛 개마대산의 일부인 청석령을 넘어 국경선인 책문을 통과한 후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하는 1990 리 로정이다. 로정 중에서 가장 험로는 요택을 건너는 일이였는데 요택 남쪽을 가로지르지 않고 북쪽으로 돌았다면 대략 2200 쯤이였을 것이다. 이러한 지리는 화국의 전한 시기부터 명.청 시기를 지나 만주국이 건국된 1932 년까지 약 2100 년 동안 변동이 없었다. 
연경과 의주 사이 1990 리 로정이 짧은 것은 아니니 아래와 같이 4 개 지역으로 나누어 검토하겠다. 
 

1 연경을 나서 산해관으로, 680 리 

연경 0/0- 통주 55/55- 삼하현 80/135- 운류하 65/200- 옥전 70/270- 풍윤 80/350-사하역 100/450-

난수.노룡 60/510- 유관점 90/600- 산해관 80/680-

주) 지명은 당일의 숙영지이고 앞의 숫자는 당일의 진행 리 수, 뒷 숫자는 북경에서부터의 누적 리 수다.

 

2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지나다, 500 리 

산해관 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

대릉하.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3 요택을 건너다, 210 리

광녕 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삼차하.우가장 65/1390- 

 

4 요양.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으로, 600 리

삼차하.우가장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 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압록강.의주 80/1990

 

 

위와 같이 4 개 지역으로 나눈 것을 현 <화국전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주) <화국전도> 하북.요녕성 부분도, 2008 년 9 월 중앙지도문화사 인쇄.발행

 

 

사실 지리는 문헌 기록에서 설명되는 지형과 지명만으로는 그 실체가 어떤지 쉽게 알 수 없다. 당연히 부정확할 수 밖에 없고 의도적으로 변조한 기록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것이 바로 위와 같은 지도다. 그런데 지도 역시 부정확하거나 의도적으로 변조한 것도 있기 때문에 기록.고지도 어느 것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된다. 결국 두 근거 자료를 함께 검토하여야 하고 합리적 해석은 당연히 언제라도 가능하다.  위 지도가 조금 혼란스러우니 핵심 지형.지명만 추출하면 아래와 같다. 

 

 

 

 

하지만 현 <화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의 중.하류는 <한서/지리지> 요동.현토 2 군 기록의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였고 <청사고/지리지> 직예.봉천 2 성 지역을 흐른 황하와 요하였다. 또한 1932 년 만주국이 건국되기 직전까지의 지리도 아래와 같았다. 

 

 

 

따라서 1656 년 인평대군 일행의 북경.의주 로정도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한 모든 한국 사서와 서쪽 화국의 첫번째 정사 <사기>부터 청국 정사 <청사고>까지의 문헌에 기록된 환웅천왕의 고조선부터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 곧 왕검조선과 단군의 제위를 물려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군부여와 준왕조선.3한.3국.가라.탐라.남북국.고려.이조선 강역은 위 모사도에 묘사된 범위 내에 있으며 당연히 지금의 란하 동쪽 전지역이다. 간혹 지금의 란하를 서쪽으로 건넌 지역까지도 고조선 영역 혹은 낙랑군 설치 지역이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헛된 망설이다. 

 

  

 

그러면 청국인들은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지리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보겠다.  

 

- <경판천문전도京板天文全圖- 이하 경판도라 함> 부분도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이 제작,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화 했다 함.

Woodson Research Center, Fondren Library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6895389 

 

 

아래는 연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과 주요 물길을 명료하게 보기 위해 색칠.표시한 것이다.    

 

 

 

이번엔 송.거란 시기 인식된 북경.의주 로정은 어떠했는지를 보자. 

1137 ? 년 송나라 사람 황상이 바위에 각자했다는 <지리도>다.  

 

- <지리도>

 

 

아래는 위 <지리도>의 오른쪽.위쪽에 표시한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주요 물길.지명과 인평대군의 로정을 추기하면 아래와 같다. 

 

 

 

결국 현 <화국전도>와 <지리도> 표시가 완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리도>를 통해서 황하.요하가 흘러드는 바다 위치가 산동반도 중심부의 정북쪽 내륙지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경판도>에 묘사된 요하도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현 <화국전도>에 표시된 란하 서쪽에 원래의 란하가 흘렀다고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 거의 모두는 현재까지도 지금의 란하 중.하류가 동쪽으로 약 300 리 쯤 이동되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공식적으로는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부터이고 이동되었다는 것은 변조.위작일 수 밖에 없지만 변조.위작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지리는 고대부터 변함이 없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대한인들이 언제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 궁금하고 참담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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