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월 고침
- 드디어 연경을 나서다
1656 년 음력 10 월 29 일 효종의 친동생 인평대군은 청국 경사에서 진주정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후 귀로에 올랐다. 대군은 8 월 3 일 한양을 떠나 12 월 16 일 무사히 한양에 도착한 대략 4 개월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매일 일기를 썻고 후일 <연도기행>으로 엮여져 현재까지 전해진다. 일기 중에서도 지리 부분에 촛점을 맞출 것이며 북경에서 압록강까지의 귀로 로정만 검증하려 한다.
참고) <연도기행>을 번역한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주소
아래는 정사 임무를 마치고 북경을 떠난 10 월 29 일 일기 전문이다.
29일(계묘)
가. 북경.의주 로정의 개요
1 연경을 나서 산해관으로, 680 리
연경 0/0- 통주 55/55- 삼하현 80/135- 운류하 65/200- 옥전 70/270- 풍윤 80/350-사하역 100/450-
난수.노룡 60/510- 유관점 90/600- 산해관 80/680-
주) 지명은 당일의 숙영지이고 앞의 숫자는 당일의 진행 리 수, 뒷 숫자는 북경에서부터의 누적 리 수다.
2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지나다, 500 리
산해관 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
대릉하.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3 요택을 건너다, 210 리
광녕 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삼차하.우가장 65/1390-
4 요양.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으로, 600 리
삼차하.우가장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 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압록강.의주 80/1990
위와 같이 4 개 지역으로 나눈 것을 현 <화국전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주) <화국전도> 하북.요녕성 부분도, 2008 년 9 월 중앙지도문화사 인쇄.발행
사실 지리는 문헌 기록에서 설명되는 지형과 지명만으로는 그 실체가 어떤지 쉽게 알 수 없다. 당연히 부정확할 수 밖에 없고 의도적으로 변조한 기록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것이 바로 위와 같은 지도다. 그런데 지도 역시 부정확하거나 의도적으로 변조한 것도 있기 때문에 기록.고지도 어느 것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된다. 결국 두 근거 자료를 함께 검토하여야 하고 합리적 해석은 당연히 언제라도 가능하다. 위 지도가 조금 혼란스러우니 핵심 지형.지명만 추출하면 아래와 같다.
하지만 현 <화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의 중.하류는 <한서/지리지> 요동.현토 2 군 기록의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였고 <청사고/지리지> 직예.봉천 2 성 지역을 흐른 황하와 요하였다. 또한 1932 년 만주국이 건국되기 직전까지의 지리도 아래와 같았다.
따라서 1656 년 인평대군 일행의 북경.의주 로정도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한 모든 한국 사서와 서쪽 화국의 첫번째 정사 <사기>부터 청국 정사 <청사고>까지의 문헌에 기록된 환웅천왕의 고조선부터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 곧 왕검조선과 단군의 제위를 물려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군부여와 준왕조선.3한.3국.가라.탐라.남북국.고려.이조선 강역은 위 모사도에 묘사된 범위 내에 있으며 당연히 지금의 란하 동쪽 전지역이다. 간혹 지금의 란하를 서쪽으로 건넌 지역까지도 고조선 영역 혹은 낙랑군 설치 지역이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헛된 망설이다.
그러면 청국인들은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지리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보겠다.
- <경판천문전도京板天文全圖- 이하 경판도라 함> 부분도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이 제작,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화 했다 함.
Woodson Research Center, Fondren Library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6895389
아래는 연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과 주요 물길을 명료하게 보기 위해 색칠.표시한 것이다.
이번엔 송.거란 시기 인식된 북경.의주 로정은 어떠했는지를 보자.
1137 ? 년 송나라 사람 황상이 바위에 각자했다는 <지리도>다.
- <지리도>
아래는 위 <지리도>의 오른쪽.위쪽에 표시한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주요 물길.지명과 인평대군의 로정을 추기하면 아래와 같다.
결국 현 <화국전도>와 <지리도> 표시가 완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리도>를 통해서 황하.요하가 흘러드는 바다 위치가 산동반도 중심부의 정북쪽 내륙지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경판도>에 묘사된 요하도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현 <화국전도>에 표시된 란하 서쪽에 원래의 란하가 흘렀다고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 거의 모두는 현재까지도 지금의 란하 중.하류가 동쪽으로 약 300 리 쯤 이동되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공식적으로는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부터이고 이동되었다는 것은 변조.위작일 수 밖에 없지만 변조.위작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지리는 고대부터 변함이 없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대한인들이 언제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 궁금하고 참담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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