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월 고침

 

2/ 1. 드디어 연경을 나서다 

 

 

 

1656 년 음력 10 월 29 일 효종의 친동생 인평대군은 청국 경사에서 진주정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후 귀로에 올랐다. 대군은 한양.연경을 오가는 중 매일 일기를 썻고 후일 <연도기행>이 엮어져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 글은 당시의 요하.요동 및 압록강이 이 지금의 어느 물길이고 어느 지역인지를 밝히려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기 때문에 일기 문장 중에서도 지리 부분에 촛점을 맞출 것이며 북경에서 한양까지의 귀로 중에서도 일부분인 북경에서 압록강까지의 로정만 검증하려 한다. 

 

참고) <연도기행>을 번역한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주소

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6&cate1=Z&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BT_1416A_0030_020_0290&upSeoji=ITKC_BT_1409A

 

아래는 정사 임무를 마치고 지금의 북경을 떠난 10 월 29 일 일기 전문이다.

 

29일(계묘)

맑음. 이른 아침에 떠나려는데, 부사ㆍ서장관 및 영응 중사(領鷹中使)가 올라와서 함께 떠났다.

 

해대문(海岱門)으로 해서 자성 문루(子城門樓)로 나왔는데, 옹성(擁城)은 없고, 적루(敵樓)만 높을 뿐이다. 남쪽 나성(羅城)의 북문(北門)으로 해서 나와서 길 오른편에 있는 묘옥(廟屋)으로 돌아들어가 관복(冠服)을 정제하고 전별연(餞別宴)에 참석했다. 형부 상서(刑部尙書)가 연회를 주관한다고 하는데, 이는 청인(淸人)이다. 연회가 끝나자 약 2리쯤 가서 길 왼편 묘옥(廟屋)으로 들어가 관복을 벗고, 쌍참(雙驂)을 멍에했다. 아역 김거군(金巨軍)과 김덕지(金德之)가 달려와서 작별을 고하기에 온화한 말로 위로해서 보냈다. 감기가 낫지 않은 것을 무릅쓰고 길을 가게 되니, 머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며, 한열(寒熱)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면 떠날 수 없었겠지만, 일단 연경을 나서니 기쁜 마음이 넘쳐흘러서 신음하는 것조차도 잊고 마음이 미칠 것만 같았다.
 
시방원(十方院)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늦게 통주(通州) 서문(西門)에 이르니, 거마(車馬)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간신히 틈을 얻어서 들어가 남라성(南羅城) 점사(店舍)에 유숙했다. 연경 별관 생활의 괴로웠던 일을 회상해 보니 시원하기가 마치 팔찌를 벗어난 매와도 같았다.
 
연경에 사신 다닌 것이 몇 번인지 모르는데, 중행(中行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의 무리의 행악(行惡)과 주구(誅求 강요하는 것)가 갈수록 심하다. 그 끝 없는 욕심을 어떻게 다 채워 준단 말인가. 이것 때문에 노수(路需)도 고갈되었다. 포학을 부리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등창이 생기게 한다. 이것이 모두 흉악한 이일선(李一善)의 소행이니, 대개 사신 올 때 그의 처남(妻娚)을 데려다 달라고 간청하던 것을, 남에게 혐의를 받을 것 같아서 그의 간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자는 일찍부터 불효로 알려져 있는 데다가 이제 그 감정을 사행(使行)에게 폭발시켜서 일마다 말썽을 부리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예부 계심랑(啓心郞) 한 사람은 대통관 이일선과 아역 박효남(朴孝男)ㆍ김명선(金明善)을 데리고 삼하(三河)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고,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 한 사람과 공부 낭중(工部郞中) 한 사람은 박씨(博氏) 두 사람, 당역(唐譯) 한 사람, 대통관 이몽선(李夢先), 아역 김덕생(金德生)ㆍ윤견(尹堅)을 데리고 관상(關上)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다. 공부랑(工部郞)은 시초(柴草)를 맡고, 세 역관은 호행(護行)을 맡아서 관상까지 가고 나머지는 모두 봉성(鳳城)까지 호행한다. 청 나라 장수 두 사람이 갑군(甲軍) 20명을 거느리고 관상까지 호송하기로 되어 모두 일행과 함께 떠났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하며 그 비위를 맞추어 주기가 어렵다.
 
연경을 떠나올 때 아문에서 준 전별 금품은, 사신에게는 소와 양을 주었고, 정관(正官)에게는 찬은(饌銀 식사 비용으로 쓰라고 주는 은자)을 주었다. 이 때문에 우장(牛庄)까지는 오직 시초(柴草 땔나무) 만을 지급하고 하정(下程)은 공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관례이다. 이날 55리를 갔다.

 

 

대군은 북경을 떠나는 일이 감기가 낫지 않아 한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고통보다 더 기쁘다고 한다. 청국에 굴복한 지 얼마되지 않은 비상한 시국이라 개인적인 복잡한 감정은 물론이고 진주정사로서의 임무에 대한 부담이 얼마나 컷을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다. 
 

가. 북경.의주 로정의 개요

 

귀로 북경에서 의주까지는 1990 리 육로였고 요택을 가로지르는 로정이였는데 요택을 피해 북쪽길로 돌았다면 대략 2100 쯤이였을 것이다. 귀로 2000 리 내외 로정은 중국 전국시대부터 대군 시기까지 약 2000 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육로 통행 수단은 당연히 도보와 말이 있었을 뿐이고 전쟁 시의 기마부대가 아닌 사신단의 일일 로정은 당연히 보통 사람이 먼 거리를 가면서 하루에 걸을 수 있는 평균 리 수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북경에서 의주까지 로정의 큰 방향도 세월이 지난다고 바뀌는 것이 결코 아니며 로정 중에 건너야 하는 물길이나 넘어야 하는 산 등도 2000 년의 세월이 흘러도 지진이 일어나 지형이 크게 변하지 않은 한 그대로여야 한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 역사 부분 지리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북경.의주 2000 리 거리를 검증할 것인데 짧지도 않은 거리이고 지형과 지리를 효율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4 개 지역으로 나누어 검토하겠다. 

 

 

1) 연경을 나서 산해관으로 

연경 0/0- 통주 55/55- 삼하현 80/135- 운류하 65/200- 옥전 70/270- 풍윤 80/350-사하역 100/450-

노룡 60/510- 유관점 90/600- 산해관 80/680-

주) 지명은 당일의 숙영지이고 앞의 숫자는 당일의 진행 리 수, 뒷 숫자는 북경에서부터의 누적 리 수다.

 

2)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지나다 

산해관 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

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3) 요택을 건너다 

광녕 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삼차하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4) 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으로  

요양 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 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의주 80/1990

 

 

사실 지리는 지리지 문헌 기록에 나타난 지명과 지형을 해설하는 문장만으로는 정확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당연히 지도와 대조해야만 한다. 상상한다 해도 부정확할 수 밖에 없고 의도적으로 변조한 기록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전해져 오는 고지도도 마찬가지다. 부정확하거나 의도적으로 변조한 묘사도 있을 터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된다. 또한 문헌 기록과 고지도 묘사가 판이할 경우 어느 한 쪽만을 신뢰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과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래는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물론이고 재야조차도 수긍하는 북경.의주 로정이다.  

 

 

주) <중국전도> 하북.요녕성 부분도, 2008 년 9 월 중앙지도문화사 인쇄.발행

 

 

아래는 위 중국전도에 표시된 물길을 추출.모사한 모사도이며 역시 북경에서 의주까지의 4 개 구간을 표시하였다.   

 

- 모사도 1

 

 

대군은 일기에서 북경에서 산해관까지 680 리, 산해관에서 북진 곧 광녕까지 500 리, 요택을 건너 요양까지 360 리, 요양에서 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450 리로 총 1990 리를 걸었다 하였고 한국의 강단.재야 사학계는 모두 위 모사도1 에 묘사된 로정으로 해석한다. 어쨋든 북경.의주간 귀로 로정은 물길로는 삼하.란하.대릉하.요택.태자하.요하.압록강 등을 차례대로 건너야 하고 옥전.노룡.산해관.광녕.요양.연산관 등을 경유하여야 한다. 

 

그러면 인평대군 일행이 걸었던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은 과연 위 모사도1에 표시한 적색 실선과 같은 방향과 거리였을까? 

 

답하기 전에 청 시기 간행되었다는 아래 <경판천문전도>를 먼저 보자.

 

 

- <경판천문전도京板天文全圖- 이하 경판도라 함> 부분도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이 제작,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화 했다 함.

Woodson Research Center, Fondren Library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6895389 

 

 

위 <경판도> 부분도에 연경부터 의주까지의 대군 일행 귀로 로정을 표시하면 아래의 적색 실선이 될 것이고 청색 실선은 당연히 당시 흘렀던 로하.삼하.란하.대릉하.요하.혼하.태자하.압록강 6 개 물길이다.  

 

 

<경판도>와 모사도1 에 표시된 인평대군의 귀로 방향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단지 물길만큼은 로하.삼하가 1 물길로 표시된 것을 제외하고 대략 순서나 각 물길의 흐르는 방향과 위치 및 경유지명은 대략 일치한다. 지형 묘사의 정확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이 되는 물길과 방향은 과학적 지도 제작 기법인 축척과 측량에 의해 표시된 현 <중국전도> 표시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결국 <경판도>의 묘사가 부정확하다고 평할 수 있겠다.

 

그러면 각 구간의 거리나 총거리는 어떨까?  거리 측면에서의 평가는 비록 <경판도>의 지형 묘사가 부정확한 점은 있지만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하기에는 조금 이르다.

 

이번엔 1137 년 송나라 사람 황상이 바위에 각자했다는 아래의 <지리도>를 보자. 

 

 

 

아래는 위 <지리도>의 오른쪽.위쪽에 표시한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주요 물길과 지명을 표시하고 북경에서 의주까지의 로정도 표시하였다. 

 

 

<지리도>에 추기 표시한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 방향은 <중국전도> 보다는 <경판도>와 비슷하다.

 

위 <지리도>를 토대로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 있다. <중국전도>의 북경.의주 로정이 <지리도>의 표시보다 동쪽으로 크게 확장.묘사된 점이다. <지리도>의 요하가 흘러드는 바다의 대략 정남쪽 방향에 산동반도의 중심부가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전도>의 요하 하류 남쪽도 산동반도가 묘사되어 있기는 하다. 문제는 <중국전도>에는 요동반도가 가리고 있고 요하의 입해 방향도 <지리도> 요하의 정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라는 점이다. 

 

결국 <지리도>에 묘사된 요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의문이 모두 가신 것은 아니다. 즉 송.거란 시기 요하였을 지금의 란하 위치 서쪽에 별개의 란하가 표시되어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란하가 둘이였다는 말일까? 그것은 아니다. 중국의 어떤 지리지 어느 구석에도 두 개의 란하가 있다는 기록은 없다. 지형이 변할 만큼 큰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으니 란하가 둘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와 요하는 송.거란 시기 이후 동쪽으로 옮겨진 란하.요하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번에도 거란.요국 이후 금.원.명.청 시기 정사 지리지 어느 곳에서도 란하.요하가 동쪽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고려.이조선의 서쪽 국경이 동쪽으로 크게 이동되어 지금의 압록강 위치로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가능성이라고는 청국이 멸망한 이후 어느 시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것 하나 뿐이다.

 

하지만 한국인 모두는 현재까지도 1911 년 청국이 멸망한 이후에 지금의 란하 주변에 있었던 란하.요하가 지금의 란하와 요하로 옮겨졌다고 생각지 않는다. 즉 옮겨졌다는 것은 변조.위작이란 말이지만 변조.위작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지리는 고대부터 이어진 것이고 변함이 없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는 한국사를 연구하는 일본.중국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까지 굳은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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