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월 고침
라. 우수하 들에 세운 임검성
1280 년 경 일연국사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삼국유사/기이.고조선.왕검조선>에는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위서>에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고와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에는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란 이가 있어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었다. ...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고 한다. 그리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 이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가 즉위한 지 50 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년이다. 그러니 50 년은 정사요 경인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그는 일천오백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는 일천구백팔세였다고 한다.
위 <삼국유사> 원문의 아사달.평양성 주석인 `혹은 개성 동쪽``지금이 서경` 등은 일연국사 견해일 것인데 이조선 숙종 시기 북애노인이 저술한 <규원사화/단군기.1세왕검>에서 추정한 곳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아래는 이조선 숙종 2 년(1676) 북애노인이 저술한 <규원사화/단군기.제1세왕검>의 내용 일부다.
於是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 牛首河之原 曰任檢城 今滿州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末之水 及大氏之興 爲其先駈 蓋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 蓋蘇密涑沫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했다. 지금의 만주 길림땅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 곧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 소밀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예전의 속말수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이 있었고 이들이 속수의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대씨가 일어나는 길잡이가 되었다. 말갈이란 옛날 숙신의 후예이며 또 단군의 자손이다. 소밀.속말.속말은 모두 소머리란 뜻이며 음이 서로 비슷하다.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거의 와전되었으나 그 뜻은 잃지 않았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 浿水之北 曰平陽卽第二任儉城也 蓋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 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綠府地 神州是也
우수하 가에서 산 지 10 년이 되어 도읍을 백산 남쪽, 패수의 북쪽으로 옮겼다. 이곳이 평양이며 제 2 의 임검성이다. 지금의 속말 땅은 들이 넓기는 하나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 농사짓기가 남쪽 땅보다 좋지 않았다. 또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남쪽과의 교통이 몹시 불편했다. 이것이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다. 청평이 `단군 때에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겨 나라를 새롭게 했는데 두 번째 천도는 패수浿水 북쪽, 곧 발해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가 바로 그곳이다`고 했다.
즉 일연국사는 서기전 24 세기에 건국된 왕검조선의 첫도읍을 아사달.평양이라 소개하였고 그 위치를 개성동쪽.서경 등이라 인식한데 반하여 북애노인은 임검성이라 하였으며 만주땅 소밀성이라 하였고 일연국사도 인용.설명한 2 천도지 백악산아사달을 평양이며 2 임검성이라 하였다.
그러면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의 첫도읍 아사달 혹은임검성은 대체 어디일까?
우선 북애노인이 아사달이라 추정한 만주 소밀성은 중국 25 번째 정사 <청사고/지리지- 이하 청/지라 약함> 길림성 쌍양현의 기록과 대략 일치한다고 할 수 있겠다.
雙陽縣 省西195裡 明依爾們蘇完河二衛 宣統二年 析吉林西界長春東界伊統北界置 治蘇斡延 ...西南黑頂子 南土頂子將軍嶺光僻山 雙陽河出焉 東南驛馬河 自盤石緣界 合杜帶雙陽放牛溝河入長春 西北霧海河從之 舊設站一蘇斡延 官商路三 南皇營 東南瓦家子鎭 竝達盤石 北奢嶺口達長春
쌍양현은 길림성 서쪽 195 리 떨어져 있다. 명나라에서 이의문.소완하위를 설치했고 선통2년(1876) 길림 서쪽, 장춘 동쪽,이통 북쪽을 갈라 설치했으며 치소는 소알연이다. ... 서남쪽으로 흑정자, 남쪽엔 토정자.장군령.광벽산이 있고 광벽산에서 쌍양하가 발원한다. 동남쪽에 있는 반석현에서 역마하가 흘러오는데 두대.쌍양.방우.구하 등과 합류하여 장춘으로 흘러간다. 서북쪽에서는 무해하가 흘러와 합류한다. 옛참은 소알연 하나가 있고 세 개의 도로는 남쪽으로 황영, 동남쪽으로 와가자진을 지나 반석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사령구를 지나 장춘에 이른다.
북애노인은 소밀蘇密.속말速沫.속말粟末 등은 소머리란 뜻이기 때문에 음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설명하였고 <청/지>에는 소 牛 글자와 관련된 한자명 방우放牛와 한글의 소완하蘇完河.소알연蘇斡延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청/지> 직예.봉천.길림 3 지역 지명에서 牛와 蘇가 나타나는 곳은 이곳 쌍양현이 유일하다. 또한 지금의 중국 요녕성 건평.능원 지역에 우하량우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고와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에는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란 이가 있어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었다. ...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고 한다. 그리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 이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가 즉위한 지 50 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년이다. 그러니 50 년은 정사요 경인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그는 일천오백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는 일천구백팔세였다고 한다.
위 <삼국유사> 원문의 아사달.평양성 주석인 `혹은 개성 동쪽``지금이 서경` 등은 일연국사 견해일 것인데 이조선 숙종 시기 북애노인이 저술한 <규원사화/단군기.1세왕검>에서 추정한 곳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아래는 이조선 숙종 2 년(1676) 북애노인이 저술한 <규원사화/단군기.제1세왕검>의 내용 일부다.
於是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 牛首河之原 曰任檢城 今滿州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末之水 及大氏之興 爲其先駈 蓋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 蓋蘇密涑沫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했다. 지금의 만주 길림땅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 곧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 소밀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예전의 속말수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이 있었고 이들이 속수의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대씨가 일어나는 길잡이가 되었다. 말갈이란 옛날 숙신의 후예이며 또 단군의 자손이다. 소밀.속말.속말은 모두 소머리란 뜻이며 음이 서로 비슷하다.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거의 와전되었으나 그 뜻은 잃지 않았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 浿水之北 曰平陽卽第二任儉城也 蓋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 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綠府地 神州是也
우수하 가에서 산 지 10 년이 되어 도읍을 백산 남쪽, 패수의 북쪽으로 옮겼다. 이곳이 평양이며 제 2 의 임검성이다. 지금의 속말 땅은 들이 넓기는 하나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 농사짓기가 남쪽 땅보다 좋지 않았다. 또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남쪽과의 교통이 몹시 불편했다. 이것이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다. 청평이 `단군 때에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겨 나라를 새롭게 했는데 두 번째 천도는 패수浿水 북쪽, 곧 발해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가 바로 그곳이다`고 했다.
즉 일연국사는 왕검조선의 첫도읍을 아사달.평양이라 하였고 그 위치를 개성 동쪽.서경 등이라 하였지만 북애노인은 임검성이라 하였고 만주땅 소밀성이라 하였다. 아사달이 개성 동쪽일 수는 없을 것인데 고려 서경이라면 북애노인의 패수 북쪽2 임검성인 평양 지명과는 일치하지만 천도한 연유나 진국의 서경압록부 땅이라는 추가적 설명과는 불일치한다. 과연 어떤 기록을 신뢰해야 할까? 일연국사의 서경 추정은 그 논거가 미흡하다고 본다.
어쨋든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의 첫도읍 아사달 혹은 임검성 대체 어디일까? 북애노인이 임검성이라 추정한 만주 소밀성은 중국 25 번째 정사 <청사고/지리지- 이하 청/지라 약함> 길림성 쌍양현의 기록과 대략 일치한다고 할 수 있겠다.
雙陽縣 省西195裡 明依爾們蘇完河二衛 宣統二年 析吉林西界長春東界伊統北界置 治蘇斡延 ...西南黑頂子 南土頂子將軍嶺光僻山 雙陽河出焉 東南驛馬河 自盤石緣界 合杜帶雙陽放牛溝河入長春 西北霧海河從之 舊設站一蘇斡延 官商路三 南皇營 東南瓦家子鎭 竝達盤石 北奢嶺口達長春
쌍양현은 길림성 서쪽 195 리 떨어져 있다. 명나라에서 이의문.소완하위를 설치했고 선통2년(1876) 길림 서쪽, 장춘 동쪽,이통 북쪽을 갈라 설치했으며 치소는 소알연이다. ... 서남쪽으로 흑정자, 남쪽엔 토정자.장군령.광벽산이 있고 광벽산에서 쌍양하가 발원한다. 동남쪽에 있는 반석현에서 역마하가 흘러오는데 두대.쌍양.방우.구하 등과 합류하여 장춘으로 흘러간다. 서북쪽에서는 무해하가 흘러와 합류한다. 옛참은 소알연 하나가 있고 세 개의 도로는 남쪽으로 황영, 동남쪽으로 와가자진을 지나 반석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사령구를 지나 장춘에 이른다.
북애노인은 소밀蘇密.속말速沫.속말粟末 등은 소머리란 뜻이기 때문에 음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설명하였고 <청/지>에는 소 牛 글자와 관련된 한자명 방우放牛와 한글의 소완하蘇完河.소알연蘇斡延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청/지> 직예.봉천.길림 3 지역 지명에서 牛. 蘇가 같이 나타나는 곳은 이곳 쌍양현이 유일하다. 또한 지금의 중국 요녕성 건평.능원 지역에도 우하량牛河梁 지명도 있다.
게다가 쌍양현 치소인 소알연의 남쪽에 있다는 황영皇營을 범상한 지명이라 할 수는 없다. <청/지> 직예.봉천.길림 3 성 지역에서 황제 황皇 자를 쓰는 지명은 이곳 말고는 없다. 즉 성경 심양 동북쪽 지역이며 송화강 곧 옛 속말수 지역인 벽촌 길림성 쌍양현은 어느 시기 황제가 있던 지역이란 뜻이고 이 지역에 기반하여 황제를 칭한 나라는 서기 698 년 건국하여 역년 230 년의 진국발해가 있었을 뿐이니 북애노인도 ` 대大씨가 일어나는 길잡이가 되었다`고 하였을 것이다.
또한 쌍양현에서 동쪽으로 195 리 떨어진 길림부의 서남쪽에는 온덕형溫德亨 곧 장백(산) 전사가 있는 망제산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吉林府 ...明烏拉等衛 後屬扈倫族之烏拉部 本吉林烏拉 一曰烏拉鷄林 又名船廠 淸初隸寧古塔將軍 ...西南至京師2300裡 距
盛京820餘裏 ...西南溫德亨 亦望祭山有殿祠長白 ...東南松花江自額穆入 右合海靑溝 左溫德亨河 ...城北70裡本烏拉
國 ...太祖先後克其宜罕山.臨河 ...遂平之 柳邊四圍長622裏 ...曰柳條邊 亦新邊 ...
또 길림성.부에서 서쪽으로 240 리 곧 쌍양현에서 서쪽으로 45 리 떨어진 장춘부는 옛 부여국 땅이고 길림부에서 서북쪽으로 360 리 떨어진 농안현은 옛 부여국 도읍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長春府 ...省西240裡 古扶餘國地 明初三萬衛 後屬蒙古科爾沁部 ...南伊通河...東驛馬河自雙陽緣界...在府西北與東淸接
日俄戰後 長春以北屬我之東淸 以南屬日本南滿鐵道會社 俄站寬城子曰長春驛 商埠 光緖31年中日約開
農安縣 ... 省西北三百六十裡 古扶餘國都 ...
또 길림부에서 서남쪽으로 280 리 떨어진 이통주는 발해 곧 진震국 장령부 땅이라 한다.
伊通州 ...省西南280裡 渤海長嶺府地 ...又西小伊通河自奉天東平錯入 爲新開河入懷德 太平下從之 又西 東遼河自西豊入
右合大小雅哈河入奉化 昭蘇太及條子下亦入焉 左納陽斯河一曰赫爾蘇河 ...又西淸河入爲葉赫河 入開原 ...北達長春
...西赫爾蘇站達奉天奉化 西南蓮花街達昌圖
결국 길림성의 쌍양현.길림부.장춘부.농안현.이통주 등의 지역은 명실상부한 진국발해 영역이였고 거슬러 올라 부여의 영역이였으며 또한 북쪽에 아들을 보내 예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왕검조선의 강역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쌍양현의 황영은 마땅히 진국으로부터 또는 왕검조선 아사달으로부터 전승되온 지역이라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쌍양.장춘.농안.이통 등의 속현을 통령한 길림부 곧 서남쪽으로 경사 곧 지금의 북경까지 2300 리 떨어진 곳은 과연 지금의 어느 곳일까?
아래는 청국의 봉천.길림.흑룡강 3 성 지역을 묘사한 고지도다.
- <성경통지>에 실린 <성경지여전도-이하 성경도>
1684 년 청국인 동병충 등이 편찬하여 1778 에는 아규 등이 수정.증보하였음
위 <성경지여전도>의 문제는 길림성 북쪽과 흑룡강성의 지형 묘사가 상당히 부정확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위의 묘사 범위와 거의 같고 길림.흑룡강 2 성의 지형이 정확하고 선명하게 묘사된 고지도는 의외로 이조선 영조 시기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래의 무제목 지도이다.
-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26 년(1751)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린 지도로 추정.
2007 년 12 월 31 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 보물 제 1537 호로 지정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원본으로 추정됨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고지도 제목 <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앞에서 이미 청국의 동북 지리를 일본이 삭제.임의연결.이동 등의 수법으로 조작하였다고 논증한 바와 같이 위 <백산대맥도>의 묘사 범위도 아래의 흑색 실선으로 표시한 삼각형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로 아래의 한국 보물 고지도 역시 일본이 위 <백산대맥도>를 변조한 지도인데 묘사 지역이 지형.지명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 여겼는지 혹은 후일의 변명거리를 만들려 했는지 모르겠으나 방향을 나타내는 亥와 正北을 거꾸로 표시하였고 흑룡강은 아예 표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보물 1537-2 호
따라서 현 <중국전도>에 일연국사의 아사달.평양과 북애노인의 아사달.임검성인 길림부 쌍양현 소알연을 표시하면 대략 아래와 같을 것이다.
또한 2004 년 중국 유국상이 발표한 요하문명 발굴 조사 보고서에 언급된 유적.유물 발굴지인 지금의 적봉.능원 부근 지역마땅히 환웅천왕의 신시 곧 고조선의 유물일 수 밖에 없고 왕검조선의 영역 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우수하.속말강 지역 신석기문화 유적.유물 발굴지 분포도
원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따라서 중국이 추진한 동북공정이란 것도 일본이 1872 년부터 이동.조작하기 시작한 지리가 고대부터였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일 뿐이며 1945 년 2 차 세계대전 후 어부지리로 차지한 지금의 요녕성과 길림성 남부 지역의 장물땅을 지키려는 장물아비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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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원 우하량 유적은 중국 요령성 능원시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돌무지무덤과 제단 유구 관련 복합유적이다. 이 유적은 중국에서 단일유적으로는 드물게 1983년부터 현재까지 오랜기간 발굴조사되고 있으며, 아직 유적의 일부만 발굴 조사되었다. 가장 먼저 발굴 조사된 것은 여신묘이며, 이 묘가 있는 구릉의 정상부에 돌무지무덤이 다양한 형태로 군집해 배치되어 있다. 이 유적은 중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기원전 30세기 요서 지역의 홍산문화가 이미 문명단계에 돌입하였다는 ‘요하문명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유적으로 표지성과 상징성이 매우 크다.
1981년 요령성 일제 지표 조사 기간에 발견되어 1983년부터 현재까지 33년간 지속적으로 조금씩 발굴 조사되고 있다. 중국에서 단일 유적을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발굴 조사하는 사례는 몇 안되는데, 그만큼 이 유적이 갖는 표지성과 상징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 전체 16개 지점까지 편호되었다. 아직 유적의 일부만이 발굴 조사되었기에 유적의 지점 편호는 계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하량유적에서 가장 먼저 발굴 조사된 것은 제1지점의 여신묘이다. 여신묘(女神廟)는 평면 ‘中’자형의 반지하식 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 구조물은 주실, 주실 양측의 동측실과 서측실, 주실 남북의 남실과 북실, 남실 남측의 남단실(南單室)로 구성되어 있다.
적석총은 여신묘가 소재하고 있는 구릉의 정상부에 군집하여 배치되어 있는데, 1기가 단일 적석총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2기가 연축되어 있는 것, 여러 기가 연축되어 있는 것 등 다양한 형태의 것들이 있다. 적석총의 중심부 지하에는 판석으로 바닥석과 벽석 및 개석을 마련한 상자꼴의 석관이 배치되어 있고, 석관 내부에는 곧게 바로 펴서 묻힌 피장자와 함께 머리와 귀 부위를 중심으로 목부위, 복부, 기타 부위 등에 말발굽꼴 옥제 상투잡이, 옥룡(玉龍), 구운형옥패식(勾雲形玉佩飾), 옥벽(玉璧), 누에꼴 옥장식, 봉황꼴 옥장식, 인형(人形) 옥장식 등의 다종다양한 옥장식이 부장되어 있다.
우하량유적은 중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요하문명론'의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유적이다. 요하문명론의 요점은 기원전 30세기 요서 지역의 홍산문화가 이미 문명 단계에 돌입하였다는 것이다. 요하문명론은 1981년 11월 중국 절강성 항주시(杭州市)에서 개회된 ‘중국고고학회 제3차연회’에서 발표된 손수도(孫守道)와 곽대순(郭大順)의 논문(「論遼河流域的原始文明與龍的起源」)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손수도와 곽대순은 능원시(凌源市) 성자산(城子山), 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梁), 부신현(阜新縣) 호두구(胡頭溝) 등 홍산문화 취락지와 적석묘 등에서 출토된 옥룡(玉龍) 등의 옥기를 근거로 하여, 홍산문화기에 원시 농경(용의 기원과 관련), 사회 계층화, 권력, 예(禮), 예술과 종교가 발생하였고, 그러하기에 이를 초기 문명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곽대순의 이러한 주장은 1980년대 중국 고고학계의 대가이자 원로인 소병기(蘇秉琦)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이후 더욱 체계화, 구체화되어, 1995년에는 홍산문화의 적석 제단 · 여신묘 · 적석총 조합이 문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근거로 우하량 적석총과 제단이 최대 규모에 해당하는 1기를 중심으로 규모와 구조가 등급화되어 있고, 여신묘의 신상(神像)이 주신(主神)을 정점으로 하여 계층화되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즉, 홍산문화는 문명의 전야가 아닌 초기 문명이고, 초기 국가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산문화는 거대 종교 기념물, 대형 무덤, 직업의 전문화 현상이 확인되기는 하나, 이러한 류가 반드시 사회가 국가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심지어 부족 단계의 사회에서도 소규모 취락의 네트워크와 연대에 의해 얼마든지 축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두 요소만을 갖고 문명을 거론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하량의 대형 적석묘는 지상의 분구(적석)만이 거대할 뿐 매장 주체부의 규모와 부장품이 빈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고, 직업의 전문화도 옥기 외에는 단순하며, 취락의 위계화도 비교적 평등하여 국가 단계 또는 문명 단계의 유적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는가 한다.
물론 ‘요하문명론’은 요하 유역 등 중국 동북 지역에 중국 내지 등과는 다른 별개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중국 학계에서 학술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요하문명론’을 주장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결국 이 지역이 앙소문화의 충격을 받아 홍산문화 후기에 문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더욱이 홍산문화는 국제적인 학술 기준과 다른 문명의 물질적 발현 형태와 비교할 때 초기 문명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요하문명론’을 수용하는데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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