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월 고침
바. 우수하 들에 세운 임검성 13/13
이조선 숙종 2 년(1676) 북애노인은 <규원사화/단군기.제1세왕검>에서 조선의 건국시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했다. 지금의 만주 길림땅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 곧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 소밀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예전의 속말수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이 있었고 이들이 속수의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대大씨가 일어나는 길잡이가 되었다. 말갈이란 옛날 숙신의 후예이며 또 단군의 자손이다. 소밀.속말.속말은 모두 소머리란 뜻이며 음이 서로 비슷하다.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거의 와전되었으나 그 뜻은 잃지 않았다.
於是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 牛首河之原 曰任檢城 今滿州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末之水 及大氏之興 爲其先駈 蓋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 蓋蘇密涑沫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위에 언급된 태백산.임검성과 관련해서는 일연국사가 1280 년 경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삼국유사/기이.고조선.왕검조선>에도 나타난다.
<위서>에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고와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에는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란 이가 있어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었다. ...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고 한다. 그리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가 즉위한 지 50 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년이다. 그러니 50 년은 정사요 경인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위 <삼국유사> 원문의 주석은 일연국사의 견해일 것인데 북애노인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서기전 24 세기에 건국된 왕검조선의 첫도읍 아사달.임검성.평양 등으로 불린 위치를 북애노인은 만주 땅 소밀성이라 하였는데 일연국사는 고려 땅 서경이라 인식한 것이다. 그렇게 다르게 인식한다면 천도지 백악산아사달과 장당경 위치도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규원사화>
우수하 가에서 산 지 10 년이 되어 도읍을 백산 남쪽, 패수의 북쪽으로 옮겼다. 이곳이 평양이며 제 2 의 임검성이다. 지금의 속말 땅은 들이 넓기는 하나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 농사짓기가 남쪽 땅보다 좋지 않았다. 또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남쪽과의 교통이 몹시 불편했다. 이것이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다. 청평이 `단군 때에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겨 나라를 새롭게 했는데 두 번째 천도는 패수浿水 북쪽, 곧 발해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가 바로 그곳이다`고 했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 浿水之北 曰平陽卽第二任儉城也 蓋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 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綠府地 神州是也
<삼국유사>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 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그는 일천오백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렷다.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는 천구백팔세였다고 한다.
그러면 천도지 2 곳은 차치하고 일연국사.북애노인 모두 언급한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 첫도읍 아사달은 대체 어디일까?
우선 북애노인이 단정한 만주 소밀성부터 보겠다. 아래는 중국 25 번째 정사 <청사고/지리지> 길림성 쌍양현 기록이다.
雙陽縣 省西195裡 明依爾們蘇完河二衛 宣統二年 析吉林西界長春東界伊統北界置 治蘇斡延 ...西南黑頂子 南土頂子將軍嶺光僻山 雙陽河出焉 東南驛馬河 自盤石緣界 合杜帶雙陽放牛溝河入長春 西北霧海河從之 舊設站一蘇斡延 官商路三 南皇營 東南瓦家子鎭 竝達盤石 北奢嶺口達長春
쌍양현은 길림성 서쪽 195 리 떨어져 있다. 명나라는 이의문.소완하위를 설치했다. 선통2년(1876) 길림 서쪽, 장춘 동쪽,이통 북쪽을 갈라 설치했으며 치소는 소알연이다. ... 서남쪽으로 흑정자, 남쪽엔 토정자.장군령.광벽산이 있고 광벽산에서 쌍양하가 발원한다. 동남쪽에 있는 반석현에서 역마하가 흘러오는데 두대.쌍양.방우.구하 등과 합류하여 장춘으로 흘러간다. 서북쪽에서는 무해하가 흘러와 합류한다. 옛참은 소알연 하나가 있고 세 개의 도로는 남쪽으로 황영, 동남쪽으로 와가자진을 지나 반석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사령구를 지나 장춘에 이른다.
치소가 소알연이고 소완하가 흐른다는데 우선 소알연.소완의 음이 혹 소밀.소머리.속말 등의 음과 우수하의 뜻과 같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남쪽에 있다는 황영皇營은 의미심장하다. <청사고/지리지> 직예.봉천.길림 3 성 지역에서 황제 황皇 글자를 쓰는 지명은 아예 없다. 게다가 직예.봉천성 지역도 아니고 봉천성에서도 동북쪽으로 장백산맥 분수령을 넘은 깊은 벽촌 지명에 남겨질 정도의 황제 급 나라는 대체 어디일까? 가까운 시기에 역년 200 여 년의 진국발해가 있었을 뿐이다.
또 쌍양현에서 동쪽으로 195 리 떨어진 길림부는 서남쪽으로 경사까지는 2300 리, 성경까지는 820 리 떨어진 곳이며 서남쪽에 온덕형溫德亨이 있고 또 망제산이 있으며 혹은 망제산이라고도 부르는 온덕향이 있으며 장백산을 제사지내는 전사殿祀가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吉林府 ...明烏拉等衛 後屬扈倫族之烏拉部 本吉林烏拉 一曰烏拉鷄林 又名船廠 淸初隸寧古塔將軍 ...西南至京師2300裡 距
盛京820餘裏 ...西南溫德亨 亦望祭山有殿祠長白 ...東南松花江自額穆入 右合海靑溝 左溫德亨河 ...城北70裡本烏拉
國 ...太祖先後克其宜罕山.臨河 ...遂平之 柳邊四圍長622裏 ...曰柳條邊 亦新邊 ...
또한 쌍양현에서 서쪽으로 45 리 떨어진 장춘부는 옛 부여국 땅이고 길림부에서 서북쪽으로 360 리 떨어진 농안현은 옛 부여국 도읍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長春府 ...省西240裡 古扶餘國地 明初三萬衛 後屬蒙古科爾沁部 ...南伊通河...東驛馬河自雙陽緣界...在府西北與東淸接
日俄戰後 長春以北屬我之東淸 以南屬日本南滿鐵道會社 俄站寬城子曰長春驛 商埠 光緖31年中日約開
農安縣 ... 省西北三百六十裡 古扶餘國都 ...
또 길림부에서 서남쪽으로 280 리 떨어진 이통주는 발해 곧 진震국 장령부 땅이라 한다.
伊通州 ...省西南280裡 渤海長嶺府地 ...又西小伊通河自奉天東平錯入 爲新開河入懷德 太平下從之 又西 東遼河自西豊入
右合大小雅哈河入奉化 昭蘇太及條子下亦入焉 左納陽斯河一曰赫爾蘇河 ...又西淸河入爲葉赫河 入開原 ...北達長春
...西赫爾蘇站達奉天奉化 西南蓮花街達昌圖
결국 길림성의 쌍양현.길림부.장춘부.농안현.이통주 등의 지역은 마땅히 진국발해 영역이였고 거슬러 올라 단군의 제위를 물려받은 부여의 도성과 강역이였으며 또한 북쪽에 아들을 보내 예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왕검조선 강역일 수 밖애 없다. 따라서 쌍양현의 황영은 마땅히 왕검조선으로부터 전승되온 지역이라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서남쪽으로 경사 곧 지금의 북경까지 2300 리 떨어진 길림부는 과연 지금의 어느 곳일까?
- <성경통지>에 실린 <성경지여전도-이하 성경도>
1684 년 청국인 동병충 등이 편찬하여 1778 에는 아규 등이 수정.증보하였음
위 <성경도>에 묘사되어 있듯 동요하 발원지인 백산대맥 너머 지역이다. 인평대군은 북경을 떠나 요양까지 1540 리를 걸었고 성경 심양은 요양에서 120 리 떨어져 있다고 하니 북경부터 심양까지는 1660 리인 셈이다. 다시 길림부까지는 820 리를 더하여 2480 리가 된다. 결국 180 리 차이는 아마도 요택을 남.북쪽으로 건너는 차이일 것이다.
북애노인의 소알연과 일연국사의 서경을 현 <중국전도>에 표시하면 대략 아래와 같을 것이다.
따라서 일연국사가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경인년에 도읍한 평양성을 지금의 서경이라고 주석한 것은 대실수였다. 서경은 고구려 평양성이였으며 낙랑군의 중심 지역이였고 그 이전은 서기전 3 세기 경의 부왕과 이후 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부.준왕의 조선은 조선 북쪽에 위치하였고 왕검조선에서 단군 제위를 물려받은 단군부여의 남쪽 제후국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북애노인은 일연국사의 평양성.서경 비정을 부정한 것이고 당시 이조선의 국경 바깥 지역인 만주땅 속말강이 흐르는소밀성을 태백산.우수하.임검성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규원사화>가 저술된 1675 년으로부터 약 250 여 년 후 청국인 조이손은 <청사고/지리지>에서 온덕향.망제산.옛부여땅.부여국도.진국장령부.황영 등이 있었다는 길림부.쌍양현.농안현.이통주 등을 설명하였으니 북애노인의 지리 인식이 정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애노인이 속말速沫을 소밀과 같은 음가로 또 우수牛首의 뜻인 소머리로 새긴 것은 탁견이라 생각한다. <청/지>의 쌍양현 치소 소알연은 당연히 소밀에서 파생된 음가일 것이다.
따라서 2004 년 중국 유국상이 발표한 요하문명 발굴 조사 보고서에 언급된 유적.유물은 마땅히 환웅천왕의 신시 곧 고조선과 왕검조선의 유적이고 유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우수하.속말강 지역 신석기문화 유적.유물 발굴지 분포도
원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1900 년 양수경은 일본이 저지른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변조.위작을 동의하여 자신도 거란.요국 시기의 황하를 변조.위작하였고 이후 1980 년 담기양의 역대국지도에 그대로 이어졌고 이러한 변조.위작 지리가 고대부터 변함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중국의 동북공정 실체다.
이러한 지리이기 때문에 국사를 제대로 이해하겠다면 역대 국경 지리를 반드시 검증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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