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0 년(1438) 1 월 21 일 명 조정에 보낸 자문 중
`동팔참 옛길은 개주에서 연산까지 네 참이며, 꼬부라진 길이 북쪽으로는 파저강과 거리가 멀지 않고, 이만주의 무리가 그 사이에 출몰하여 길이 막힐 염려가 있으니...`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집현전 부교리 양성지가 올린 비변에 대한 열 가지 방책
여섯째에 이르기를,
"성보(城堡)를 수선하고 관방(關防)을 정할 것입니다. 대개 군진(郡鎭)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이므로, 임금이 험한 곳에 성보를 설치하여 그 나라를 지키는 것이옵니다. 송(宋)나라에서는 긴요한 군(郡)과 다음으로 긴요한 군(郡)의 분별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는 산천(山川)이 험조(險阻)하고 현진(縣鎭)이 서로 바라볼 수 있으므로, 진실로 무사(無事)할 때에 잘 강구해서 마땅하고 적합하게 처치(處置)한다면, 적이 비록 이를 버리고 깊이 들어오려 하여도 장차 그 뒤에 거리낄 것을 염려할 것이오나, 만일에 처치(處置)하기를 엉성하게 한다면 도리어 적인(敵人)의 도움이 될까 두렵습니다. 이제 연변 주군(沿邊州郡)을 국가에서 이미 긴급하고 긴급하지 않은 곳으로 나누었으나, 변방 땅을 전부 긴급한 곳으로 하였기 때문에, 신이 이제 내지(內地)까지도 아울러 논하여 외람되이 억지의 의논을 드리옵니다.
함길도 회령(會寧)은 범찰(凡察)이 옛날에 살던 곳이옵고, 종성(鍾城)·온성(穩城)·경원(慶源)은 모두가 강변(江邊)이옵고, 경성(鏡城)은 용성(龍城)의 좁은 목[阨]이 있으며, 이성(利城)에는 마운령(磨雲嶺)이 있고, 단천(端川)에는 마천령(磨天嶺)이 있으며, 갑산(甲山)은 서북쪽 모퉁이가 날카롭고 들어갔고, 함흥(咸興)에는 함관령(咸關嶺)이 있고, 또 한 도(道)의 근본으로 요긴한 곳이며, 길주(吉州)는 동량북(東良北)과 연(連)하였고, 북청(北靑)도 역시 갑산(甲山)의 요충(要衝)이며, 홍원(洪原)에는 대문령(大門嶺)과 정평(定平)의 고 관문(古關門)이 있고, 영흥(永興)에는 용흥강(龍興江)이 있으며, 덕원(德源)에는 철관(鐵關)이 있고, 안변(安邊)에는 철령(鐵嶺)이 있으며,
다음으로는 평안도인데, 의주(義州)는 압록강(鴨綠江)에 의지하였고, 삭주(朔州)는 적로(賊路)로서 평탄하고 넓으며, 강계(江界)는 곧 강변(江邊)의 거진(巨鎭)이고, 희천(熙川)에는 적유령(狄踰嶺)이 있으며, 또 강계(江界)는 적로(賊路)이고, 영변(寧邊)은 한 도(道)의 중진(重鎭)이며, 안주(安州)에는 청천강(淸川江)과 고 안북진(古安北鎭)이 있고, 평양(平壤)에는 대동강(大同江)이 있으며, 또한 도(道)의 근본으로 긴요한 곳이고, 여연(閭延)은 곧 적(賊)의 요충이며, 박천(博川)에는 큰 강이 있고, 성천(成川)도 역시 요지(要地)이옵니다.
다음으로는 황해도(黃海道)인데, 황주(黃州)에는 극성(棘城)이 있고, 서흥(瑞興)에는 절령(岊嶺)이 있어 긴요한 곳이옵고, 곡산(谷山)은 함길도(咸吉道)와 연접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강원도(江原道)인데, 회양(淮陽)은 철령(鐵嶺)을 의지하였고, 강릉(江陵)은 영동(嶺東)의 대부(大府)입니다.
다음으로 요긴한 곳은 경상도(慶尙道)인데, 김해(金海)와 창원(昌原)은 모두 대마도(對馬島)의 요충으로서 요긴한 곳이고, 상주(尙州)는 영남(嶺南)의 대목(大牧)이며, 안동(安東)도 또한 중요한 곳이고, 경주(慶州)는 곧 고려(高麗)의 동경(東京)이며, 진주(晉州)는 남도(南道)의 거읍(巨邑)이고, 성주(星州)에는 금오 산성(金鰲山城)이 있습니다.
다음은 전라도(全羅道)인데, 전주(全州)는 남도(南道)의 요충(要衝)이고, 남원(南原)은 운봉(雲峯)의 요충이며, 나주(羅州)는 남방(南方)의 대목(大牧)입니다.
다음에 긴요한 곳은 충청도(忠淸道)인데, 충주(忠州)는 조운(漕運)이 모이는 곳이고, 공주(公州)에는 금강(錦江)이 있으며,
다음에 긴요한 곳은 경기(京畿)인데, 경성(京城)이 긴요하고, 개성부(開城府)는 곧 전조(前朝)010) 의 고도(古都)이며, 양주(楊州)는 후보(後輔)가 되고, 광주(廣州)에는 산성(山城)이 있으며, 수원(水原)은 곧 남도(南道)의 요충이고, 원평(原平)은 바로 임진(臨津)의 요충이며, 강화(江華)는 수로(水路)가 험하고, 고려 때의 강도(江都)로서 다음입니다.
이상의 여러 주진(州鎭)과 관방(關防)은 긴급한 것이 있고 다음으로 긴급한 것이 있으니, 다음으로 긴급한 것은 아직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고, 그 긴급한 것으로서 이미 성을 쌓은 곳은 수리할 것이고, 쌓지 못한 곳은 각기 부근 고을의 연호 군정(烟戶軍丁)으로 농사짓는 틈[農隙]을 가려서 진력(盡力)하여 쌓게 하면, 이는 백성을 위하는 것으로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남방(南方)의 요긴한 고을을 일시(一時)에 아울러 든 것은 대개 변경(邊境)에 일이 있으면 근본되는 땅을 더욱 견고하지 않을 수 없고, 하물며, 적(敵)을 막는 방책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이 모여 살 곳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강계(江界)·잔도(棧道)·절령(岊嶺)·극성(棘城)·용성(龍城)·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함관령(咸關嶺)·철령(鐵嶺) 등지에는 모두 석보(石堡)를 쌓아서 방어하는 곳으로 만들고, 또 산성(山城)은 고려(高麗)의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도적(圖籍)을 상고하여 형세(形勢)를 살펴서, 신료(臣僚)들을 나누어 보내되, 반드시 읍(邑)에 가까운 곳이 아니고, 혹 깊고 먼 곳이라도 너덧 고을에서 한 군데의 험애(險隘)한 곳을 얻게 하여, 부근의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적당히 쌓게 하면 거의 불의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고, 백성을 위급한 속에서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외(京外)의 성문 수비(城門守備)와 진관(津關)의 금방(禁防)도 또한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여 소홀하게 할 수 없습니다."
단종실록 11권, 단종 2년 4월 17일 무술 4번째기사 1454년 명 경태(景泰) 5년
세조가 8도 및 서울의 지도를 만들고자 하다
세조(世祖)가 8도 및 서울의 지도를 의논하여 만들고자 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척(鄭陟)·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강희안(姜希顔)·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화원(畫員) 안귀생(安貴生)·상지(相地) 안효례(安孝禮)·산사(算士) 박수미(朴壽彌)와 더불어 삼각산(三角山)·보현봉(普賢峰)에 올라가서 산의 형상과 물의 줄기를 살피어 정하고, 세조(世祖)가 서울의 지도를 수초(手草)하였다. 정척은 산천의 형세를 잘 알고, 강희안은 그림을 잘 그리며, 양성지는 지도에 밝았으므로, 또한 참여한 것이었다.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8월 12일 을묘 4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에 명하여 《지리지》를 편찬하고 지도를 그리게 하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하여 《지리지(地理誌)》를 편찬하게 하고 아울러 지도(地圖)를 그리게 하였다.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1월 10일 신사 6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평안도 경차관 양성지가 여연·무창·우예의 지도를 바치고, 도내 편의 사건을 아뢰다
평안도 경차관(平安道敬差官) 양성지(梁誠之)가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 등 세 고을의 지도(地圖)를 가지고 와서 바치고, 또 도내의 편의한 사건들을 조목별로 아뢰기를,
"1. 강변에 위치한 여러 군의 방어가 매우 긴급한데, 성보(城堡)가 허술하고 군졸이 고단하고 약한데, 더욱이나 도로가 험준하고 설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잠도 편히 못자고 하루가 1년같이 지루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에 비하면 십분(十分) 근고(勤苦)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제 성심(聖心)이 이를 통찰하시고 특히 변방을 방수하는 장리(將吏)들에게 주과(酒果)를 내리시니, 성은이 지극히 흡족합니다. 빌건대 다시 사랑과 위로를 더하셔서 양계(兩界)의 교도(敎導)의 예에 의하여, 변군(邊郡)에 차임할 때는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더하시고, 그 3년간 무사히 수어(戍禦)한 자는, 해임하는 날 반드시 청요(淸要)한 직임을 제수(除授)하소서.
1. 양계(兩界)의 갑사(甲士)는 다년간 외지에 있기 때문에, 비록 직임에 제수(除授)되어도 전의 수직(受職)한 고신(告身)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새로 받은 고신을 서경(署經)하지 않기 때문에, 벼슬이 참상(參上)에 이른 자도 간혹 한 통의 고신도 없는 수가 있습니다. 빌건대 구례(舊例)를 거듭 밝혀서 매양 제수할 때는, 병조(兵曹)는 감사(監司)에게 이관(移關)528) 하고, 감사는 각 군읍에 행이(行移)529) 하여, 즉시 전에 수직한 직임의 계급(階級)을 상고하여, 간원(諫院)530) 에 회보(回報)하여 서경하면, 해당 관사(官司)에서는 즉시 그 도(道)로 밀봉해 내려서 일일이 나누어 주도록 하소서.
1. 작질(爵秩)과 직함(職銜)은 신자(臣子)에 있어서는 사생(死生)을 막론하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령귀 만호(池寧貴萬戶) 같은 칭호는 무신(武臣)들이 간혹 일컫기를 수치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또 지명(地名)은 그 연혁(沿革)이 무상하여 후세에 가서는 어떤 관직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빌건대 모두 아름다운 칭호로 고쳐서 모주(某州) 모처(某處)의 만호(萬戶)라 일컫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비록 변방에서 죽는 일이더라도 자손까지도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1.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 등의 고을은 강변에 포열해 있는데, 이제 이 세 고을을 혁파하고 자성(慈城) 1군(郡)이 홀로 적의 요충(要衝)을 막고 있습니다. 만일 야안(野人)이 무창(茂昌)의 죽전현(竹田峴)으로부터 상봉포(上奉浦)에 이르고, 두가을헌현(豆加乙獻峴)으로부터 하봉포(下奉浦)에 이르며, 또 여연(閭延)의 신로현(新路峴)으로부터 금창동(金昌洞)에 이르고, 우예(虞芮)의 신로동(新路洞)으로부터 혼야동(昏夜洞)에 이르며, 소보리(小甫里)로부터 허공교(虛空橋)에 이르게 되면, 자성의 인민들이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이제 상봉포·하봉포와, 금창동·혼야동에 새로이 목책(木柵)을 설치하였으나, 모두 권관(權管)이 부방(赴防)하고 있어, 방어의 모든 일이 소활(疏闊)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다 만호(萬戶)를 제수하지는 못하더라도, 허공교·금창동·상봉포 등지에 우선 만호를 두어, 변방의 수어를 굳게 하소서.
1. 신이 자성(慈城) 허공교구자(虛空橋口子)를 보니, 동쪽 산언덕에 행성(行城)531) 을 보완하여 설치하기를 마치 제방(堤防)을 쌓듯이 하였으나, 평시에는 성 위를 지나서 우예(虞芮)와 통하고, 유사시에는 행성을 굳게 지켜서 적의 길을 막았는데, 이제 우예를 철폐하게 되면, 허공교가 바로 적의 침입을 막게 됩니다. 청컨대 행성(行城) 수십 보(數十步)를 헐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비록 당관(當關)한 자가 없더라도 적이 스스로 날아서 건너지는 못할 것입니다.
1. 신은 듣건대, 자성군(慈城郡)에 여기(厲氣)가 크게 성하여, 그 전염(傳染)이 그치지 않고 있는데, 남자는 가끔 면하기도 하지만, 여자는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다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 경내(境內)에 남자는 많고 여자는 적어서 인근 고을에 구혼(求婚)을 하여도 이를 거절하고 응하지 않는다 하니, 실로 괴이한 일입니다. 청컨대 좋은 의원(醫員)을 보내어 다방면으로 구료하여 치료하도록 하소서.
1. 강계 병마사(江界兵馬使)가 본부(本府)532) 를 버리고 만포(滿浦)로 부방(赴防)하고 있는데, 만약 적기(賊騎)가 병력을 나누어서 만포를 포위하고는 곧장 읍성(邑城)으로 달려가게 되면, 근본이 되는 곳을 방어할 군사가 없게 됩니다. 청컨대 함길도(咸吉道) 여러 진(鎭)의 예에 의하여, 토관직(土官職) 수십(數十) 자리를 설치하고는, 남도(南道) 및 강변 사람들로 교체해 임명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강계가 또한 변지 사람들의 사환(仕宦)하는 곳이 되며 평시의 방어도 착실하게 되어, 비록 변고가 있게 되어도 동요(動搖)되지 않을 것입니다.
1. 강계부(江界府)가 산 밖에 떨어져 있어, 만약 큰 적당이 돌입하여 성을 포위하게 되면, 외로운 성에 구원의 길이 끊어질 것이 몹시 우려됩니다. 본부 남쪽의 적유령(狄踰嶺)은 사실상 남으로 지향하는 첩경(捷徑)인데도, 이에 봉화(烽火)를 설치하지 않고, 다만 강변을 따라 의주(義州)에 이르러서 다시 서울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믿을 만하지 못할까 생각됩니다. 청컨대 연대(煙臺)를 증설하여, 적유령을 지나서 희천(熙川)과 영변(寧邊)을 거쳐 봉호가 서로 조응(照應)하도록 하게 하소서.
1. 강계(江界)에는 군량(軍糧)의 저축이 부족하고, 또 본부의 인민들이 미곡을 가지고 남도(南道)로 가서 소금을 사 가지고 오기 때문에, 농우(農牛)와 전마(戰馬)가 태반이나 지쳐서 죽곤 합니다. 청컨대 매년 안주(安州) 등지에서 선군(船軍)이 구운 소금을 영변부(寧邊府)의 강변까지 배로 실어다 놓고는, 강계의 인민으로 하여금 본부에 쌀을 납부하고, 영변에 가서 소금을 받아가게 합니다. 이렇게 수년간만 하면, 군수(軍需)가 자연히 충실하게 되고, 우마(牛馬)도 피로하여 모손(耗損)하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1. 영변(寧邊) 이북과 자성(慈城) 이남의 합배(合排)533) 한 인민으로 부실(富實)하여 갑사(甲士)에 입속(入屬)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가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시험을 보지 말게 하소서. 합배한 인민이 본래 천례(賤隷)가 아니고, 변방에서 생장하여 기력이 또한 장하니, 그 갑사가 되려고 원하는 자는 충보(充補)를 허용하고 부근의 한민(閑民)으로서 그의 부역을 대신 정하도록 하소서.
1. 귀성(龜城)은 사통오달(四通五達)한 곳인데, 박서(朴犀)·김경손(金慶孫)은 여기에 의거해서 사수(死守)하였고, 이제 다시 읍을 설치하니 참으로 좋은 계책(計策)입니다. 그러나 새로 이사온 인민들이 초라하기 짝이 없고, 이제 다시 귀주(龜州)를 설치한다면, 정주(定州)는 다만 해변의 한 고을이 되고 말 것이니, 청컨대 정주(定州)의 길 위의 땅을 다 구주에 속하게 하고, 곧 목(牧)으로 승격하게 하소서.
1. 운산군(雲山郡)의 옛 운산(雲山) 지역은 영변(寧邊)·가산(嘉山)·박천(博川)의 세 고을의 지경을 넘어서 정주(定州)의 땅과 서로 접하고 있었으니, 이는 개 이빨처럼 서로 엇물려 있는 것에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운산에 이 땅이 없어서 어염(魚鹽)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희천(熙川) 등 수십 주(數十州)가 모두 산골짜기에 있어서 어염의 생산이 없는데, 어찌 유독 운산의 까닭으로 해서 그 강역(疆域)을 문란케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옛 운산은 정주에 환속(還屬)하도록 하소서.
1. 안주성(安州城)은 북쪽으로 청천강(淸川江)을 의지하고 있으니, 이는 곧 고구려(高句麗)가 수(隨)나라 군병을 대패시킨 곳입니다. 이제 그 성자(城子)가 낮고 미약하니, 청컨대 이를 고쳐서 쌓도록 하소서.
1. 옛 강동(江東)은 사실상 적이 침입해 오는 길의 요충(要衝)입니다. 청컨대 삼등(三登)의 치소(治所)534) 를 옛 강동으로 옮기고, 삼강군(三江郡)이라 일컫게 하소서.
1. 평양성(平壤城)은 대동강(大同江) 서북쪽에 있는데, 적의 무리가 만약 사면을 포위한다면, 비록 원병(援兵)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 접전(接戰)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성의 동북·동남 두 모퉁이에 모두 성자(城子)를 쌓아서 강변과 서로 연접하게 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적이 쉽게 이르지 못하고 성의 동쪽으로는 큰 강의 험준함을 잡게 될 것입니다. 외성(外城)은 바깥으로 강물과 암석(巖石)의 험준함이 있고, 안으로는 천정(泉井)과 풍요한 토지가 있으나, 혹시 적의 점거(占據)하는 바가 되면, 복배(腹背)로 적(敵)을 받게 되어, 내성(內城)의 수비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고성(古城)을 증축(增築)하도록 하소서.
1. 도내(道內)의 민폐 중에 다 제거하지 못한 것이란, 오직 사신을 맞고 짐바리를 호송하는 것과, 관부(館夫)를 유지하는 세 가지 일뿐인데, 관부의 폐단으로는 한 몸으로 몇가지 일을 하고 있으니, 곡진한 포치(布置)를 더하도록 하소서.
1. 양계(兩界)에 토관(土官)535) 을 설치한 것은, 먼 곳에 있는 사람을 회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에, 백관 위사(衛士)로부터 이전(吏典)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은전(恩典)의 혜택을 입었으나, 오직 토관만이 아직 입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조관(朝官)의 예에 의하여 각기 한 자급(資級)을 더하게 하소서.
1. 모든 도(道)에 익(翼)을 설치한 것은 도성(都城)으로부터 외번(外藩)을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으레 서군(西郡)을 우익(右翼)으로 삼고 동군(東郡)을 좌익(左翼)으로 삼았는데, 유독 양계(兩界)와 황해도(黃海道)는 동군을 우익으로 삼고 서군을 좌익으로 삼았으니, 이는 유달리 중앙으로부터 외방을 통제하는 뜻이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모든 다른 도의 예에 따라 고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 11월 12일 병인 1번째기사 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동국지도가 완성되다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척(鄭陟)·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 등이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바쳤다. 이보다 앞서 정척과 양성지 등에게 명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모여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상고하여 확정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던 것이다.
세조실록 33권, 세조 10년 4월 14일 병신 1번째기사 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한명회가 야인 조삼파의 동향에 대해 아뢰다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가 종사관(從事官) 허종(許琮)을 보내어 아뢰기를,
"올량합(兀良哈) 이두리(李豆里)가 만포(滿浦)에 와서 절제사(節制使) 홍귀해(洪貴海)에게 고(告)하기를, ‘아버지 이만주(李滿住)가 조삼파(趙三波)에게 사람과 가축을 돌려 주고 마음을 고쳐 먹고 귀화(歸化)하도록 말하였더니, 조삼파가 소 4두(頭)·말 2필(匹)을 가지고 우리 형(兄) 이고납합(李古納哈)에게 와서 부탁하여 되돌려 주도록 하였기 때문에 내가 지금 가지고 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홍귀해가 대답하기를, ‘조삼파가 사로잡아간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은데, 지금 되돌려 온 것은 이와 같이 적고, 또 조삼파가 어찌하여 스스로 오지 않고 너를 시킨 것인가? 귀순(歸順)하는 여부(與否)는 그의 자의(自意)에 맡긴다.’고 하니, 이두리가 말하기를, ‘조삼파의 마음을 비록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와서 귀순(歸順)하고자 아니한다면 어찌 두축(頭畜)을 돌려 보냈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종사관(從事官) 박휘(朴輝) 등이 또 이두리에게 이르기를, ‘너의 형(兄)이 조삼파에게 귀순(歸順)하라는 말을 먼저 하였고, 너도 또한 그렇게 말하였는데도, 조삼파가 오지 않았으니, 귀순(歸順)할 뜻이 어디에 있는가? 체찰사(體察使)가 반드시 이런 일을 가지고 계달(啓達)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니, 이두리가 말하기를, ‘조삼파가 말하기를, 「인구(人口)는 수토(水土)의 성질이 달라서 모두 이미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가 스스로 오지 못하는 것은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하토(甫下土)는 내가 같이 이야기를 못해 보았으나, 그러나 조삼파가 만약 온다면 그도 역시 기꺼이 따라 올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서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우의정(右議政) 구치관(具致寬)·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좌참찬(左參贊) 최항(崔恒)·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자운(尹子雲)·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와 승지(承旨) 등을 불러서 평안도(平安道)의 일을 의논하였다. 허종을 불러들여서 같이 이야기하고, 명하여 가자(加資)하고 옷과 신발을 내려주었다. 어서(御書)로 회유(回諭)하기를, ... 라고 하라. ...하였다.
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 8월 1일 임오 2번째기사 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양성지가 군법·군정·군액·군제·사역에 관한 일로 상서하다
1. 군정(軍丁)을 보호하는 일. ... 신(臣)이 《요동지(遼東志)》를 보건대,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高麗) 사람이 홍무(洪武)의 연간(年間)에 3만여 명이 되었으며, 영락(永樂)의 세대에 이르러서 만산군(漫散軍)이 또한 4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 요동(遼東)의 호구(戶口)에서 고려 사람이 10분의 3이 살고 있어 서쪽 지방 요양(遼陽)으로부터 동쪽 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남쪽 지방 해주(海州)·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聚落)이 서로 연속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에서 급급(汲汲)히 진려(軫慮)할 것입니다. ... 또 신(臣)이 을해년422) 에 평안도(平安道)에 출사(出使)하여 강계부(江界府)에 저장된 군량(軍糧)이 매우 적은 것을 보고 주관(州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고을 사람이 매양 미곡(米穀)을 싣고 재[嶺]를 넘어 안주(安州) 삼현(三縣) 등지에 이르러 소금[鹽]을 바꾸어서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안주(安州) 등 고을의 국고(國庫)에 있는 소금을 배로 실어 수상(水上) 영변(寧邊) 지방에 두고, 강계(江界)의 사람으로 하여금 소금을 이곳에서 받게 하고, 미곡을 고을에 바치게 하면 자연히 농우(農牛)와 전마(戰馬)가 피폐(疲弊)하는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고 저장되는 양식도 풍족할 것입니다. 신(臣)이 그때에 계책(計策)을 올렸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신(臣)이 또 경진년423) 에 봉명 사신(奉命使臣)이 입조(入朝)할 때에 안주(安州)로 지나는 길에 소금이 있는지 없는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관염(官鹽)이 수백 석(石)이 곳곳에 묵어 쌓였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다른 군(郡)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신(臣)이 또 생각건대, 방금 서쪽의 사변(事變)이 그치지 않으니, 비단 강계의 축적(蓄積)을 마땅히 저축(貯蓄) 대비(對備)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강변(江邊)의 군사들이 양식을 운반하는 폐단도 더욱 조치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동로(東路)에서는 진(陣)을 친 영변(寧邊) 수상(水上)에 염창(鹽倉)을 설치하고, 강계(江界)·위원(渭原)·이산(理山) 사람으로 하여금 본 고을에 다 곡식을 바치게 하고서, 소금을 이곳에서 받게 하며, 서로(西路)에서는 청산 산성(靑山山城)에 창고(倉庫)를 설치하고 창성(昌城)·벽동(碧潼)·삭주(朔州) 사람으로 하여금 본 고을에 곡식을 바치게 하고 소금을 이곳에서 받게 하여, 얻은 미곡(米穀)을 고을의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남도(南道) 수졸(戍卒)에게 예(例)대로 양식을 지급하여 유망(流亡)하는 폐단을 막고 방어(防禦)하는 일을 튼튼히 하소서.
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 11월 2일 경오 3번째기사 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1. 중국 조정에서 장차 개주(開州) 등지에 위소(衛所)를 세우려고 하니, 이것은 국가 문정(門庭)의 걱정입니다. 평안도(平安道)의 백성들은 다만 방수(防戍)에만 시달릴 뿐 아니라 또한 중국에 입조(入朝)하는 사신의 영접과 전송을 하는 데에도 매우 시달리게 되어, 태반이 동팔참(東八站)382) 과 해주(海州)·개주(蓋州) 등 여러 주(州)에 유입(流入)하게 되므로, 한편으로는 토병(土兵)이 모두 없어지게 되고, 한편으로는 저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알게 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비록 후일 우리의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또한 후일 우리에게 해가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 이외의 사하사(謝賀使)·주문사(奏問使)·진응사(進鷹使) 등은 전일에 비하여 3분의 1을 줄이고 이를 합쳐서 보내게 하고, 혹은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 등에게 붙여서 다시 건량(乾糧)의 수량을 줄이고 무역(貿易)의 금령(禁令)을 더욱 엄중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해도 종식될 수가 있을 것이며, 또 안주(安州) 이북의 공물(貢物)은 다른 도(道)에 없는 초서피(貂鼠皮)·인삼(人蔘) 이외의 것은 일체 영구히 없애고 오랑캐에게 들어갔다가 본국(本國)에 돌아온 사람은 3자급을 뛰어올려서 관직을 제수하고 5년을 한하여 복호(復戶)하게 하소서. 이에 강변(江邊)과 위원(渭原)의 백성은 만포(滿浦)에 합치고, 이산(理山)을 입석(立石)에 옮기고, 벽동(碧潼)을 성간(城干)에 옮겨서, 각기 1고을을 설치하여 강계(江界)의 길을 통하게 하고, 창성(昌城)을 삭주(朔州)와 정녕(定寧)에 합쳐서 또한 첨사(僉使)를 두고, 다만 토병(土兵)만 남겨 두고는 남방의 백성은 들어와서 지키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강계(江界)·삭주(朔州)·의주(義州) 3진(鎭)의 형세가 장건하게 될 것이며, 이산(理山)과 벽동(碧潼)은 본시 산(山) 뒤에 있어서 여연(閭延)·무창(茂昌)과 같이 일체(一體)가 될 것이며, 강역(疆域) 가운데에 있어서 예전과 같을 것이니, 적인(狄人)이 진실로 엿볼 수도 없을 것이며, 또한 들어와 침범할 수도 없을 것이므로, 방수하는 폐단이 어찌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예종 1 년(1469) 6 월 29 일 공조판서 양성지의 상소문
1. 장장(長墻)에 대한 의논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만 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 만이고, 군사가 1백 만으로, 요(堯)임금과 아울러 섰고, 주(周)나라에는 신하가 되지 않았고, 원위(元魏)와는 통호(通好)하였으며, 풍연(馮燕)에는 정성을 바쳤고, 수(隋)나라는 육사(六師)995) 가 대패(大敗)하였고, 당(唐)나라는 손님으로 대우하였고, 요(遼)나라는 패군(敗軍)하여 처참하였으며, 송(宋)나라는 섬겼고, 금(金)나라는 부모(父母)의 고향이라고 일컬었으며, 원(元)나라는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도 또한 삼한(三韓)이라 이르고 하하(下下)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동(遼東)의 동쪽 1백 80리는 연산(連山)을 경계로 하여 파절(把截)을 삼았으니, 성인(聖人)께서 만리를 헤아려 밝게 보시는데 어찌 토지가 비옥하여 가축을 기르거나 사냥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을 모르고서 수백 리의 땅을 버려 그 곳을 비게 하였겠습니까? 진실로 동교(東郊)의 땅은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어 양국(兩國)의 강역(疆域)을 서로 섞일 수 없게 하였으니, 만약 혹 서로 섞인다면 흔단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건대, 중국에서 장차 동팔참(東八站)의 길에 담장[墻]을 쌓아서 벽동(碧潼)의 경계에 이르게 한다고 하니, 이는 실로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바이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본국 평안도(平安道)의 백성 가운데 부역(賦役)에서 도망한 자가 저곳에 흘러 들어갔으니, 동쪽으로는 개주(開州)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대개 고을의 취락(聚落)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몇천만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만산군(漫散軍)996) 은 모두 4만여 인이었는데, 근년(近年)에 요동(遼東)의 호구(戶口) 가운데 동녕위(東寧衛)에 십분의 삼이 살고 있습니다. 만약 장장(長墻)이 없다면 야인(野人)이 출몰(出沒)할 것이니 진실로 염려스럽고, 만약 혹 담장을 쌓는다면 도로 내지(內地)가 되어서 진실로 좋은 땅이 될 것이니, 그 유망(流亡)하는 자가 어찌 옛날보다 만만배(萬萬倍)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害)의 첫번째입니다.
만약 중국에서 연대(煙臺)를 벌여서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널리 행한다면, 이와 같다면 양국의 사이에는 다만 강 하나만이 한계가 될 뿐이니, 이름은 해외(海外)라고 하여도 실로 같은 안입니다. 저들이 어찌 천백 년 동안 우리 변방을 엿보지 않았겠습니까? 혹은 이익이 되기도 하고 혹은 해가 되기도 하여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해의 두 번째입니다.
장장(長墻)이 비록 요하(遼河)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염려할 만한 것이 있는데, 만약 벽동(碧潼)의 경계(境界)인 산양호(山羊湖) 사이에 이른다면, 이는 동한(東韓)의 땅이어서 저들의 봉역 가운데에 있으니, 사람에 있어서는 팔꿈치와 겨드랑이의 사이와 같고 인가(人家)가 울타리 안에 있는 것과 같아, 한쪽은 여기에 있고 한쪽은 저기에 있어서 저들의 주장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다만 장사(長沙)의 무수(無袖)997) 뿐이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의 세번째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利害)는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건주(建州)의 사람들은 형세상 반드시 와서 싸울 것이나, 가까이 들리는 일은 항상 그 실지를 잃음이 많을 터인데, 만약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는데도 태평하게 주청(奏請)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무능(無能)하다고 여기고 더욱 능욕(凌辱)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모름지기 급히 달려서 상주(上奏)하여야 할 것입니다. 연산 파절(連山把截)은 고황제(高皇帝)가 정한 바이므로 양국의 봉강(封疆)은 서로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벽동(碧潼) 이서와 의주(義州) 이북은 큰 강이 한계로 막혀 있어서 족히 염려할 것이 못되나, 이어 김보(金輔) 등 내사(內史) 족친(族親)을 보내어 들어가서 나라 사람들의 뜻을 아뢰어 제총(帝聰)에 이르도록 하여 요하(遼河)로부터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쌓도록 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청(請)에 따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자치(自治)하는 일이 더욱 엄중하게 하여 만세(萬世)토록 견고하게 할 뿐입니다.
성종실록 97권, 성종 9년 10월 13일 신축 3번째기사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공조 판서 양성지가 《오례의》의 병기 도설 부분을 삭제하고 다시 반포하기를 청하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양성지(梁誠之)가 상서(上書)하였는데, 이르기를, "그윽이 생각하건대 제주(濟州)는 옛 탐라국(耽羅國)입니다. 지방이 1백리 이며 바다 밖에 멀리 있는데, 신라(新羅) 때에 비로소 내조(來朝)하였고, 고려(高麗)에 이르러서 나라를 없애고 현(縣)으로 만들었으며, 그 인구의 번성함과 산물의 풍부함은 내지(內地)에 있는 고을의 갑절입니다. 그러나 신이 보건대 역대(歷代)에 변고(變故)가 잇따라서 떨어졌다 합쳤다 한 것이 한 번이 아니었으며, 원(元)나라에서 목장(牧場)을 설치하자 이로부터 말[馬]이 크게 번식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세 고을을 설치함에 미쳐서 그 권세를 나누고 그 자제(子弟)를 등용하여 그들의 마음을 진압시켰으니, 열성(列聖)께서 먼 지방의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적당하였다고 이를 만합니다.
엎드려 듣건대 지난 가을에 왜선(倭船)이 고을의 경내에 와서 머무르자, 이에 왜국(倭國) 말을 아는 자를 보내어 후일에 대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제주는 대마도(對馬島)의 여러 섬과 더불어 바다 위에 같이 있어 동서(東西)로 서로 바라보면서도 언어가 각각 다르니, 오히려 가하다고 이를 것입니다. 만약 말이 서로 통하면 이는 마치 원숭이에게 나무에 오르기를 가르치는 것과 같으므로, 후일의 변(變)을 글로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요즘 또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이 있는데, 대우하기를 적당하게 하면 통역이 없을지라도 불가함이 없을 것이며, 만약 적당하게 하지 못하면 통역이 있는 것이 도리어 해가 될 것입니다. 헤아리건대 이제 통사(通事)의 행차가 아직 저쪽에 도달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모름지기 역마(驛馬)를 급히 달려서 그 사람을 강제로 돌려보내고 왜(倭)와 가깝지 않은 사람으로 하여금 왜말을 익혀서 알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신이 또 생각하건대 화포(火砲)는 군국(軍國)의 비밀한 무기인데, 고려(高麗) 말에 최무선(崔茂宣)이 비로소 원(元)나라에 들어가 배웠고, 명(明)나라 초(初)에 고황제(高皇帝)883) 가 왜(倭)를 방어하라고 하사하였습니다.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서는 《총통등록(銃筒謄錄)》이 사가(私家)에 퍼져 있는 것을 모두 내부(內府)에 거두어들였는데, 그 뒤에 군기감(軍器監) 바깥 동쪽 문루(門樓)에 21건(件)을 간직하고 춘추관(春秋館)에 1건을 간직하였으니, 생각이 또한 주밀(周密)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삼가 《오례의(五禮儀)》를 보건대 화포(火砲)를 만드는 법의 척·촌·푼·리(尺寸分釐)를 숨김없이 자세히 써서 중외(中外)에 인쇄 반포하여 온 나라에 두루 퍼졌는데, 만일 간사한 자가 기화(奇貨)로 삼아서 왜적(倭賊)에게 팔면, 그것이 동남쪽 지방의 화(禍)가 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빌건대 예조(禮曹)에 명하여 내외(內外)의 관청과 사가(私家)에 있는 《오례의》를 모두 거두어들이게 하여, 병기 도설(兵器圖說)이라고 이르는 것은 모두 삭제하고 다시 반포하며, 또 총통(銃筒)의 제도는 1건만 남겨서 어소(御所)에 간직하고 그 나머지는 세 사고(史庫), 동문루(東門樓), 실록각(實錄閣)에 모두 언자(諺字)884) 로 써서 각각 한 건씩 간직하며, ‘신견봉(臣堅封)’이라고 써서 전교를 받아 열고 닫게 할 것입니다. 군기시(軍器寺)에 있는 한 건 역시 언자(諺字)로 써서 제조(提調)가 친히 봉(封)하고, 전일에 한자(漢字)로 쓴 것은 죄다 불태워서 없애게 하여, 만세(萬世)의 계책을 삼는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하였다.
성종실록 134권, 성종 12년 10월 17일 무오 1번째기사1481년 명 성화(成化) 17년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생각건대, 자고로 천하 국가의 사세(事勢)는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혹 알지 못하기도 하고 비록 이미 알아도 또 〈어떻게〉 하지 못하니, 이것이 모두 잘못된 일중의 큰 것입니다. 일을 먼저 도모한다면 어찌 잘 다스리고 오랫동안 안전하기가 어렵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중국이 장차 개주(開州)에 위(衛)를 설치하려 한다 하는데, 신이 거듭 생각해 보니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는데, 산세가 우뚝하고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으며, 3면이 대단히 험하고 1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통하는 이른바 자연히 이루어진 지역이므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고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 태종(太宗)이 주둔하여 고려(高麗)를 정벌하였고, 또 요(遼)나라의 유민(遺民)이 여기에 근거하여 부흥(復興)을 도모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누가 우리 나라와 관계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북쪽으로는 산로(山路)로 심양(瀋陽)·철령(鐵嶺)·개원(開元)을 가리켜 야인(野人)과 연접(連接)하였고,남쪽으로는 해도(海道)로 해개(海蓋)·금복(金復)을 가리켜서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요동(遼東)·광녕(廣寧)·금주(錦州)·서주(瑞州)를 가리켜 연주(燕州)·계주(薊州)로 통하니, 저들에게는 유주(維州)의 이로움이 있고, 우리에게는 한중(漢中)의 세가 있는 실로 동도(東道) 요충(要衝)의 땅입니다.
여름에는 만경(萬頃)의 험로(險路)이면서 오히려 충분히 의거할 수 있고 겨울에는 평평하기가 숫돌 같으면서도 곧기가 화살과 같으니, 비록 형제 부모의 나라라도 이 땅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부당합니다. 평시에는 평안도 백성들 중 부역(賦役)을 피하는 자들의 태반이 이곳으로 가는데, 저들은 가벼운 부역으로 이들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변경 땅의 백성이 모두 그 곳으로 들어간다 하여도 그것은 일시의 해로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영원한 근심꺼리입니다. 신이 고금(古今) 천하의 형세(形勢)로 말씀드리면, 구주(九州) 안은 오직 중국 황제가 다스리는 바이며, 사해(四海)의 밖으로 서역(西域)은 총령(葱嶺)776) 과 사막(沙漠)이 약 3만 리나 되며, 북쪽은 사막(沙漠) 불모(不毛)의 땅이어서 황막(荒漠)하기 끝이 없고, 동이(東夷)는 일본으로써 바다로 둘러쌓인 나라이며, 남만(南蠻)은 점성(占城)과 진랍(眞臘) 땅으로서 계동(溪洞)과 열병(熱病)이 심하여 중국과는 옛부터 통교가 없는 곳이며, 서쪽은 파촉(巴蜀)·검각(劍閣)으로의 길로서 진(秦)나라 때에 처음으로 개척하였고, 남쪽은 담이(儋耳)·경애(瓊崖)의 땅으로 한(漢)나라가 비로소 군(郡)을 두었습니다.
동북관(東北關) 밖은 영주(營州)·요동(遼東)·요서(遼西)의 땅이고, 서북관(西北關)의 오른쪽은 양주(涼州)·하서(河西)의 5군(郡)이 그것이며 이후에는 중국과 교통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 단군(檀君)이 요(堯)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箕子朝鮮)·신라(新羅)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前朝)의 왕씨(王氏)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서민(庶民)은 남녀가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대부(士大夫)는 문무(文武)가 내외의 일에 이바지하여 집집마다 봉군(封君)의 즐거움이 있고 대대로 사대(事大)의 체제가 있으며, 따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소중화(小中華)하고 부르면서 3천 9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진(黃溍)777) 은 벼슬살이할 만한 나라라고 하였고, 황엄(黃儼) 또한 천당(天堂)이라 하였으며, 원 세조(世祖)는 우리로 하여금 구속(舊俗)을 그대로 따르게 하였고,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778) 는 우리 스스로의 성교(聲敎)779) 를 허가하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가지게 한 것은 언어가 중국과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습속도 역시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元)나라 말기에 홍군(紅軍) 20만 명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을 때 우리가 대병으로써 쳐부수고 군대의 명성을 크게 떨친 사실이 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이며, 또 명나라가 금릉(金陵)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우리 나라가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한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입니다. 또 중국이 동쪽에 있어서 한(漢)나라·수(隋)나라·당(唐)나라는 군사를 남용하였으나 지키지 못하였고, 요(遼)나라·금(金)나라·원(元)나라는 국경을 접했으면서도 핍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평양(平壤)을 점거하였던 중국 세력들의 흥폐(興廢)는 말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고구려가 풍씨(馮氏)780) 의 남은 세력을 근거로 강성해져서 수 양제(煬帝)의 1백만 군이 살수(薩水)에서 대패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여섯 차례나 원정하였지만, 요좌(遼左)에서는 공이 없었으며, 한(漢)나라는 비록 평양을 얻었으나 곧 고구려에 점거당하였고, 당나라는 평정하였으나 역시 신라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약간의 굴곡이 있었습니다만, 삼한(三韓)의 법규를 지킨 것은 옛날과 같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漢)나라·수(隋)나라·당(唐)나라 모두 관중(關中)에 도읍하여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이며 적국(敵國)이었으므로, 소손녕(蕭遜寧)의 30만 병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금(金)나라는 본래 우리 나라의 평주(平州) 사람이 세웠으므로 우리 나라를 부모의 나라라 하였고, 윤관(尹灌)이 9성(九城)을 쌓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를 삼아 금나라가 망할 때까지 군사력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요와 금의 두 나라는 모두 서쪽에 하국(夏國)이 있었고 남쪽에는 대송(大宋)이 있어서 서로 원수 사이였는데, 어느 틈에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후 야율씨(耶律氏)가 서쪽으로 만리를 달렸으나 완안씨(完顔氏)의 남하로 패망하였고, 원나라는 혼인국(婚姻國)이라고 칭하였으나 수십년 동안 침략하였고, 중국과 남북의 오랑캐가 혼합되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서 국경이 없었지만 그 말년에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음산(陰山) 북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신이 다시 생각건대, 국가는 한 시대에 고식(姑息)되지 말고 만세의 계책을 세워야 하며 무사한 것을 요행으로 삼지 말고 만전의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천하에 금 그릇에 비길 만한 것은 잘 보전하여 깨트리지 말며, 산하(山河)가 금에 비길 만한 것은 지켜서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대의 제왕(帝王)들이 장안(長安)·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거나 건강(建康)·임안(臨安)에 도읍하고 혹은 북쪽으로 업(業) 땅에 도읍하거나 동쪽으로 변량(汴梁)에 도읍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북쪽으로 들어간 후부터는 연도(燕都)가 남북의 요관(要關)이 되어, 북으로는 거용관(居庸關)에 의거하여 호원(胡元)의 목을 움켜잡고 앞으로는 중원(中原)에 임하고, 남으로는 사해(四海)를 제압하니, 명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도읍을 정한 후 실로 만세의 제왕이 옮기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지금 개주에 성을 쌓으면 개주로써 그치지 않고 반드시 당(唐)참(站)에 성을 쌓게 될 것이며, 당(唐)참(站)에 성을 쌓게 되면 당(唐)참(站)에 그치지 않고 성을 쌓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양곡(糧穀)의 운반을 요청하게 되면 양곡 운반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소와 운반구(運搬具)를 요청할 것이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청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이며 농(隴) 땅을 얻으면 촉(蜀) 땅을 바라게 되는 필연의 이치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 바치는 동해의 생선이 주방(廚房)의 쓰임에 충당할 만한데, 어찌 특별히 남만(南蠻)의 구장(枸醬)781) 과 죽장(竹杖)을 쓸 것이며, 우리 나라의 궁시(弓矢)와 포백(布帛) 역시 군수(軍需)로 쓰는데, 어찌 남중(南中)782) 의 금은(金銀)과 단칠(丹漆)만을 쓰겠습니까?
지금 당장에는 무사하다 하여도 5백 년 후에는 무력(武力)를 남용하는 자와 공 세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번 일은 우리 나라에서 중국에 왕래하는 새 길을 열 것을 청한 것을 계기로 병부(兵部)에서 상주(上奏)한 것이지 정동(鄭同)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동을 통해 교섭을 시작하였다면 정동을 통하여 그것을 끝내어야 하며, 그는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뒷날의 이해 관계는 역관(譯官)들에게 달렸습니다. 바라건대 ‘한씨(韓氏) 족친 중에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와 통사(通事) 중에 정동(鄭同)과 교제가 있는 자에게 명하여 토산물을 많이 가지고 바로 북경(北京)에 가서, 정동을 인해서 한씨에게 말하고 한씨가 어소(御所)에 말하여 개주위(開州衛) 설치의 정지를 청하게 하소서.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만일 간사한 무리들이 흔단(釁端)을 일으켜 달자(達子)나 왜인(倭人)을 가장하여 도적질한다면 실로 예측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제 조공(朝貢)하는 사절(使節)이 옛길로 가다가 침범이 있게 되면 철저히 방비하고, 그대로 주청하면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만약에 윤허를 얻지 못하면 그 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씨가 청을 할 수 없다면 그 뒤는 어찌 하겠습니까? 지금의 사세(事勢)는 바야흐로 병이 크게 도진 것과 같습니다. 7년이나 된 병에 만약 3년 묵은 쑥을 구하지 못하면 이것이 당(堂)에 있으면서 화(禍)를 알지 못하고 섶을 쌓아 놓고 위해(危害)를 알지 못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의주(義州)는 압록강(鴨綠江)의 험함을 배경으로 한 나라의 문호(門戶)입니다만, 듣건대 그 성(城)이 대단히 허술해서 광대들은 몸을 눕히고도 올라갈 수 있고 찬비(餐婢)가 상을 이고도 내려올 만하다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창주(昌洲)·벽단(碧團)·대삭주(大朔州)·소삭주(小朔州) 등의 여러 성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지금 곧 수축(修築)을 한다면 반드시 부역을 피해 유이(流移)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고, 또 수축하지 않으면 방비가 허술해질 것이니, 이것이 바 로 국론(國論)을 결정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그러나 수축을 하지 않으면 의주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으며, 의주가 없어지면 하나의 도(道)가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신은 절실히 생각하건대, 지금 8도의 인민으로서 놀고 먹고 조부(租賦)783) 를 내지 않는 자는 승려(僧侶)만한 것이 없습니다. 승려들을 동원하여 수축함으로써 보국(報國)하게 하는 것이 옳으며, 특별한 근로(勤勞)도 없으면서 까닭없이 복호(復戶)784) 된 자와 사복시(司僕寺) 제원(諸員) 등으로 수축하게 하여 보국하게 함도 좋을 것입니다. 또 번(番)을 서고 있는 정병(正兵)과 동원되고 있는 수군(水軍)에게 식량을 지급하여 압록강변 일대 행성(行城)을 쌓게 하고 또 따로 파절(把截)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도내(道內)의 공부(貢賦)도 인삼(人蔘)과 서피(鼠皮) 이외는 일체 면제 하고, 중국에 가는 사신[入朝使臣]도 정조(正朝)와 탄신(誕辰) 이외에는 정상대로 보내되, 쌍성(雙城)의 변(變)과 동녕(東寧) 사건은 마땅히 우려할 일이며, 따라서 감사(監司)·수령(守令)에게 직책이 없는 자가 따라가지 못하게 하고 가족을 데리고 가는 일도 또한 불가합니다.
삼도(三島)와 대내(大內) 등 왜인(倭人)도 마땅히 불러서 회유하여야 할 것이며, 모련위(毛隣衛)와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도 역시 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일은 신이 감히 입으로 말하지 못하며 글로도 쓰지 못하겠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신의 말이 들어맞지 않게 된다면 국가의 복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도 역시 반드시 후세의 근심꺼리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사세(事勢)를 논하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은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고 사신의 출발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구한 견마지성(犬馬之誠)785) 을 다할 것을 밤낮으로 생각하다가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하였는데, 임금이 의정부와 영돈녕(領敦寧) 이상, 육조 당상(六曹堂上)·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윤호(尹壕)·강희맹(姜希孟)·이승소(李承召)·이극증(李克增)·유지(柳輊)·이덕량(李德良)·김영유(金永濡)·변종인(卞宗仁)·이경동(李瓊仝)·김자정(金自貞)·성숙(成俶) 등이 의논하기를,
"개주(開州)에 진(鎭)을 설치하면 우리 나라에 불리하다는 사실은 전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이번에 온 명나라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에 진을 설치하는 이유로 첫째 건주위 야인(建州衛野人)의 엿봄을 막고, 둘째 조선 사신 왕래 때의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 상세히 밝혔습니다. 언사는 순하고 이치에 맞으니 무슨 말로 〈개주진(開州鎭) 설치의〉 정지를 청하겠습니까? 또 농사의 풍흉(豐凶)과 적정(賊情)의 긴박하고 긴박하지 않음을 보아 설치한다고도 하니, 설치 여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부녀와 환관[婦寺]을 통하여 주청(奏請)함으로써 설치를 면하려 하는 것도 정대(正大)한 방법이 아닙니다. 압록강 연변에 성을 쌓는 일은 국가에서 이미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다만 흉년으로 정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승려와 사복시 재원을 동원하는 일은 모두 시행할 만한 일이 못됩니다."하였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개주(開州)에 진을 설치하는 일이 우리 나라에게 후일의 우려가 있다는 말은 진실로 양성지의 말과 같습니다. 다만 주청사(奏請使)를 보내지 말자고 한 것은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한씨(韓氏)와 정동(鄭同)을 통해서 주청하자는 것도 사리에 옳지 못합니다. 의주(義州)의 행성(行城)을 축조하는 일은 전에 이미 의논하여 결정되었습니다. 압록강변의 읍성(邑城)을 사태의 긴박함과 그렇지 않음에 따라 점차로 수축하는 일은 신도 전에 그 곳을 순찰하고 아뢰어서 윤허(允許)를 얻었습니다만, 본도(本道)의 인력이 넉넉치 못하여 아직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려를 동원하여 쌓는 일은, 승려들은 본래 생업이 없어서 스스로 식량을 가지고 올 수 없고, 요(料)를 지급하려면 그 수가 많아서 불가능합니다. 또 사복시 제원(司僕寺諸員)은 그 수가 1천 명도 못되고 모두 서울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어서 이곳으로 동원하여 부릴 형편이 못됩니다."하였고,
이파(李坡)는 의논하기를,
"개주(開州)에 진(鎭)을 설치하면 우리 나라 사신의 왕래에 유익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을 설치하여 그 자리가 굳어지고 요긴한 곳에 성을 쌓고 시일이 오래 되어 외부의 침략받을 염려가 적어지면 우리 나라에는 무궁한 폐해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안도는 요역(徭役)의 과중함이 다른 도에 비하여 10배나 되고 개주(開州)는 거리가 멀지 않아서 압록강 연변 여러 고을과는 강이 얼면 곳곳에 통로가 생겨 왕래를 금할 수 없는 땅이 되는데 부역의 괴로움을 피하고 그 헐함을 쫓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라 백성들이 그곳으로 옮겨 가는 것은 부득이하기 때문입니다. 또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을 상세히 살펴보면 전적으로 우리 나라를 위하여 설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에 사은사(謝恩使)도 중국이 반드시 우리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개주진(開州鎭)을 설치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신은 작은 이익은 있으나 우려(憂慮)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신이 이미 출발하여 추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鎭)의 철폐를 요청하자는 의견은 장래를 생각하여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정동(鄭同)과 한씨(韓氏)를 통하여 황제에게 말하게 하자는 것은 매우 정대(正大)한 의논이 아닙니다. 어찌 나라의 체면으로 사사로이 부녀와 환관을 통하여 소망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결단코 옳지 못한 일입니다. 평안도 의주와 압록강변 성(城)의 상태가 나쁜 곳을 수축하는 일은 이미 의논하여 여러 번 전지(傳旨)가 내렸습니다만, 인력의 부족으로 일시에 착수할 수 없을 뿐입니다. 어찌 다시 의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승려는 비록 역(役)이 없습니다만, 본래 한 곳에 정착해 있지 않아서 동원하여 부역시키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사복시 제원은 그 수가 본래 많았으나 근래에는 감소되어 남아 있는 자가 대단히 적습니다. 어찌 다른 곳에 부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불가한 일입니다."하였고,
이육(李陸)·한언(韓堰)·최영린(崔永潾)은 의논하기를,
"중국이 개주성(開州城)을 축성하는 것이 과연 우리 나라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우리 나라에서 새길을 청하였고 우리 나라가 조공(朝貢)하러 왕래하는 것을 위하여 설치한다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를 위한다고 하였는데 갑자기 정지하기를 청하는 것은 말이 순서가 아닙니다. 또 환관과 부인을 통해서 성사하려는 것도 정대한 방법이 아니라 말할 것도 없으며, 더구나 개주 축성은 확정된 일이 아닙니다. 부역을 피하는 백성이 무거운 곳을 피하여 가벼운 곳으로 가기 위하여 여진 땅으로 잠입할 것이라는 말은 과연 그렇습니다. 압록강변의 축성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승려는 본래 토착해 있지 않으며 사복시 제원은 그 수가 많지 않아서 그들로서 축성하자는 계책은 잘못된 것입니다. 전날의 의논대로 풍년을 기다려서 점차로 쌓는 것이 옳습니다."하였다.
이봉(李封)·강자평(姜子平)·구치곤(丘致崐)·임수경(林秀卿)·김학기(金學起)·김석원(金錫元)·곽은(郭垠)·윤석보(尹碩輔)·정광세(鄭光世)가 의논하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참으로 철폐할 수 없어서 사신의 왕래가 해마다 그치지 않았습니다. 동팔참(東八站) 수일정(數日程)에 야인(野人)이 침범하는 일이 염려되어 새길을 요청하였으나 중국측은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서 개주(開州) 등지에 진(鎭)을 설치하는 일만 의논하니 사신의 왕래에는 조금 이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우리 나라에 크게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의주에서 1백여 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평안도의 피폐가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닌데, 명나라측이 부역을 감면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백성들을 초치할 경우 괴로움을 피하고 편안함을 따름은 사람의 공통된 심정이니, 압록강의 물이 얼 때 백성들이 옮겨 가는 것을 어떻게 금하겠습니까? 국가에서 이에 대한 계책을 우선 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을 설치하는 일을 막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동(鄭同)에게 뇌물을 주고 한씨로 하여금 천자에게 말하게 하자고 합니다만, 이는 대신(大臣)이 할만한 말이 못되고 정대한 의논이 못됩니다. 어찌 환관을 인연해서 성사할 수 있겠습니까? 압록강변의 축성하는 일은 급한 일입니다. 그러나 평안도의 계속된 기근(飢饉)으로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기 어려우니, 풍년을 기다려 점차로 쌓는 것이 옳습니다. 몰래 국경을 넘어가는 자를 금하는 일은 이미 국가의 조치가 있습니다. 마땅히 관리에게 책임지워 일일이 준수하게 하여야 합니다. 승려와 복호(復戶)된 자와 사복시 제원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사정에 어두운 일이며 시행할 일이 못됩니다. 정병(正兵)과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축성하는 일은 식량을 계속 조달하기 어려워 또한 시행이 불가능 합니다."하였다.
성종실록 142권, 성종 13년 6월 11일 무신 2번째기사 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행 지중추부사 양성지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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