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역사지리학 연구> 신경준 편 요약 박인호 저 78 쪽 한백겸, 유형원, 정극후, 홍만종, 임상덕, 李敦中 등의 연구에 주목79 쪽 <강계고> 서문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는 영양왕, 백제는 근초고왕, 신라는 진흥왕에서 시작하였지만, 그 역사 기록들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에 이르러서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있으나, 비록 삼국시대로부터 전해오던 사서들을 참고하였을 것이나 소략함을 면치 못하고, 또한 삼국 이전의 역사에 있어서는 더욱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 ...중략...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지지라는 것은 궐략하여 참고할 만한 것이 없거나 반드시 잡란하여 의심스런 곳이 많아 논설이 분분하고 단안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수록하고 나의 생각을 이어서 뒷날 이것을 밝힐 사람을 기다린다.
81 ~ 87 쪽 본관 고령, 자 순민, 호 여암, 생몰년 1712~1781 10 대조 신말주는 신숙주의 아우, 신숙주가 수양대군에 가담한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전북 순창으로 이주. 중종 25 년(1530) <동국여지승람> 신증 편찬에 참여한 신공재(1469~1536)가 8 대조 영조 30 년(1754) 향시 급제(시제-車制) , 장시관 홍양호(1724~1802), 홍양호가 <여암유고> 서문과 여암의 묘갈명을 지음. 1770 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편찬 전담 동시대 황윤석,서명응,정동유 등이 극찬하였고 정인보(1893~1950) 역시 `성호.농포의 거학으로도 오히려 고적사막을 느끼게 된다`고 평함. 평 일부 `...그러나 역사학만으로 심혼을 환기하였댔자 오히려 급무에 응함에 어떠할까 걱정한지라 이에 車制를 說하여 이용편민으로써 생계를 일으키게 하고 兵船製를 講하여 禦에 실익을 돕자 함인데...`
90 ~ 91 쪽 변설 20 편 - 전후고구려지변, 대방재낙랑군남지변, 평양지실지후낙랑유존지변, 맥소수비적강지변, 국내여환도비일처지변, 안시비환도지변, 봉황성비당종소공안시지변, 삼국사기본기지지소재고구려, 이도평양부동지변, 동명고적부재평양지변, 전후부루지변, 압록강이남패강이북지지소속지변, 말갈잡거라제북경지변, 삼한역년지변, 패하이남지마한지변, 발해득변한지변, 변한묘예재낙랑지지변, 백제동유낙랑지변, 백제개국금마지변, 서시위왕일본지변서 - 압록강북역대연현총서 사 - 안용복사 설 - 기전설, 삼한지분제설 소 - 최승노청정계소,김종서사진형세축성편부소
94 ~96쪽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등 국내의 여러 역사서와 지리서를 기본 자료로 활용하는데, 이들은 주로 상고사의 중심무대를 한반도 이내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상고기 영역에 대한 내용을 부정하는 입장에 서있고, 신경준의 생각보다 오히려 더 넓게 만주일원으로 확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빈일쇄록>이나 <목옹지지>와 같은 책은 오히려 틀린 것이 많다고 평가...한백겸의 <동국지리지>와 유형원의 <동국여지지>는 각종 국도와 강계를 정리하는데 있어 긍정적인 측면에서 인용.주) <賓日쇄錄>과 <木翁地志>의 필자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신경준의 <강계고>에서 유일하게 <빈일쇄록>은 참봉 李萬升, <목옹지지>는 李永의 저술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논리를 전개하는 기술이나 수준으로 보아 허목, 이익. 이종휘 등의 내용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그들이 활약하였던 시기의 인물로 여겨진다.
중국 서적으로는 <사기><한서><후한서><위서><진서><수서><신.구당서>를 주로 인용하고, 특히 상고사는 <한서><후한서>를 상당부분 인용, 그외 <통전><문헌통고> 등은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인용하였는데,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이 외국사례를 적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생략된 곳이 많아 정밀하지 못하다는 입장. 그러면서도 <요사><대명일통지><성경지> 등에 대해서는 요동과 요서 일대 열읍의 고실을 상세히 기재하였다는 입장을 보임. <강계고>가 편찬되기 전까지는 <지봉유설><역년통고><동사보유><동국역대총목><동사회강>의 내용이 인용되었고 대개 사실 차원에서의 인용임.
주) 1. <동국역대총목>(1750)은 홍만종(1643~1725)이 편찬한 강목형식의 역사서로 `附地志`편을 따로 편성하여 우리나 라 지리를 정리하였다. 신경준도 인용하고 있듯이 <동국역대총목>에서의 단군관계 기사는 <東史寶鑑><本記通 覽> 등의 야사자료를 이용하여 서술함으로써 그 간략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뒷 시기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학자 들에 의해 계속 인용됨.
2. 임상덕은 <동사회강>(1711) 범례 뒤에 7 조의 논변을 부기하고 있는 바, 이는 역사지리에 관한 문제를 별도의 독 립된 항목을 통해 정리한 것으로 일부는 뒷날 유광익의 <楓巖集話>, 이종휘의 <수산집/동국여지잡기>, 이긍익 의 <연려실기술> 등에서 대부분 그대로 수록되어 있음.
96 쪽 신경준은 우리나라 상고사의 체계로써 한백겸의 `南自南北自北` 설을 충실히 따라 북쪽과 남쪽이 별개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왔음을 기초로 하여 남북의 역사를 전개시키고 있다. <강계고> 일부이다.
동방은 옛날부터 남북으로 나뉘어져 나라를 세웠는데, 북쪽은 삼조선에서부터 한사군,이부,고구려로 이어져 오고, 남은 辰국으로부터 삼한,신라,백제로 이어져 온다.
100 쪽 신경준은 삼조선을 설정하여 조선 국호의 유래와 전조선국,후조선국,위만조선국의 국도와 강계를 살피고 있다. 전조선국에서 먼저 유형원의 태백산은 묘향산이라는 주장을 들고서 태백산.묘향산에서 산출되는 자단을 단군과 관령하여 소개하고 있다. 국도조에서 초도지 평양은 평안도 평양부로 위치를 비정하였으나, 평양이라는 호칭은 고구려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 이전의 명칭은 평양이 아니었다고 해석하였다. 徙都地인 백악은 아사달 곧 황해도 구월산으로 비정하면서, 아사달을 초도지로 기록한 <위서>는 취하지 않았다. 전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는 그 폭원이 후조선과 같이 넓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서쪽은 바다에 연하고 남쪽은 漢山河 남북 가까운 곳으로 辰國과 접하고, 沼漢의 땅도 경리하였을 것이며 동북쪽은 미상이라고 정리하고 <동국역대총목>에서 팽오가 단군의 신하가 되었다고 한 것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후조선국에서는 국도인 왕검성을 역시 평양부로 비정하였다. 그 결과 기자궁.기전.기자정.기자묘.기자장 등의 평양 일원에서 보이는 기자와 관련된 유적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따로 한백겸.유근.허성의 기전설 관계 논설을 부재하였다. 강계조에서는 기자조선의 강역을 압록강 바깥까지 확대하여 설정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영역을 획정하고 있다.
조선 강역으로 압록강 이남은 동쪽과 서쪽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진국과 접하며, 압록강 이북은 서남쪽으로 바다에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요하를 지나 고죽국에 접하며, 북쪽과 동쪽은 숙신과 접하였다. 오늘날 철령현의 북쪽으로부터 요산의 바깥쪽 지금 오라 서남쪽 땅으로 뻗었으며, 동옥저의 북쪽으로 지나서 바다에 다다른다.
102 쪽 신경준의 전.후조선에 대한 인식의 특징을 든다면 첫째, 단군조선을 전조선으로 앞세운 것이다. ... 이전 시기 `교화지주`로서의 기자가 존숭되고 민족시조로서의 단군이 평가 절하되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단군조선을 확고하게 민족의 시작왕조로 설정하였다. 후일 <동국문헌비고/여지고>에서도 같았다. ... 둘째 단군조선과 기자조선과의 관계를 영토를 매개로 한 전.후조선으로 명확하게 적고 있다. 조선전기의 대표적 사서인 <동국통감>에서는 단군조선이 외기로 수록되었고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락> 등의 지리 관계 기록에서는 단군조선을 전조선으로 명시하고 있다.
103 쪽 셋째,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초도지를 평양으로 보아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고 있으나, 기자조선의 강역을 한반도에서부터 요서지역까지 걸치는 것으로 보고 있어 상당히 넓게 잡고 있다.
- 예맥.옥저.고구려예에는 북예와 동예의 두 종이 있으며, <후한서>에 기록된 예와 고구려는 모두 북예를 의미하며, 부여도 역시 북예가 옮겨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예군 남여의 예는 동예로 보았다. 따라서 발해 동경용원부를 예맥땅으로 보거나 봉황성으로 보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한편 맥국에 대해서는 상고기에 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것이 많았음을 적고, 국도에 대해서는 유형원의 영동과 영서를 예맥으로 보는 주장을 받아들여 예의 국도는 강원도 강릉으로, 맥의 국도는 강원도 춘천으로 비정하였다. 강계에 대해서는 남쪽으로는 충청도 제천.단양.영춘.청풍 4 군을 지나 조령.죽령 2 령을 넘어 경상도 동북 해상의 여러 군을 포함한 지역을, 북쪽으로는 <동국지리지>를 인용하여 춘천 이북의 해서.관서 산군에까지 미치었던 것으로 보았다.
104 쪽 따라서 예맥은 지금 강원도 일대에만 그치지 않고 남쪽으로는 경상도 북부 일부까지, 북쪽으로는 황해도와 평안도 일부지역에까지 통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북예를 구성하였던 부여.고구려 등의 지역과 남쪽의 예맥 지역을 합쳐 모두 옛 조선의 영역으로 간주한 것이라 하겠다.
옥저에 대해서는 먼저 동옥저의 강계로는 <후한서>와 <동국사략>을 인용하여 함경도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동옥저를 요동 해성현 일대로 비정하였던 <요사>와 <성경지>의 기록을 부정하였다. 동옥저 강역 비정의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개마대산의 위치도 <승람>의 압록강 서북쪽이라는 주장보다는 유형원의 `함경.평안도 사이를 가르는 척령연긍한 것`이라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북옥저의 강계에 대해서는 <후한서>의 `북옥저는 남쪽으로 읍루와 경계를 접하였다`는 기사를 , 북옥저가 읍루의 남쪽에 있엇던 것으로 보았으며, <동국지리지>가 <후한서>의 기사에 대해 `읍루의 노략질하는 길이 남쪽에 있었던 것이지 읍루가 옥저의 북쪽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고 해석하였던 것도 비판하였다. 북옥저의 위치를 비정하지는 않고 영고탑 동북지경으로 비정한 <빈일쇄록>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묵시적 동의라 보아야 할 것 같다. 105 쪽 남옥저에 대해서는 유형원이 동옥저의 남쪽 지계로 보고 있는 것을 지지하면서도 죽령 가까이에 따로 설정하였던 <목옹지지>의 기록에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동옥저의 위치를 압록강 이남 현 합경도 일대로 비정하여 그 위에 북옥저가 있고 숙신으로서의 읍루가 그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예맥.옥저와 같이 조선의 영토를 차지하였던 고구려와 소수맥에 대해서는, 옛 고구려는 한나라 무제 때 현도 속현의 고구려현이 되었으며, 소수맥은 한나라 원제 때 주몽이 일어난 고구려로 보았다. 이것은 한백겸.유형원 등이 주장하였던 두 개의 고구려가 있었다는 인식을 계승한 것이다. 고구려 강역은 오라 남쪽 경계가 모두 그 폭원으로 남쪽으로는 개마대산의 서쪽 즉 지금 평안도 동북강계 가까운 곳까지 2000 여리에 걸친 것으로 주장하였다. ...
106 쪽 - 漢郡縣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에서는 한군현의 실체를 구명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다. 왜냐하면 한사군은 위만조선 지역에 설치되었고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바로 조선말기의 강역 이해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 먼저 창해군은 강릉 오대산 일원에 비정하였다.
107 쪽 4 군 가운데 임둔군은 권근.정인지 이래 비정된 강릉설을 인용하면서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속현 15 개가 반드시 예맥 땅에 부합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단대령 7 현에도 일부 옥저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동부도위의 치소였던 불이도 임둔 소속이였으며 탄열은 열수가 나오는 곳으로 비록 영서에 있었으나 역시 임둔 소속으로 보았다.
현도군에 대해서는 <통전>을 인용해 이미 위만 때 군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았다. 특히 조선 후기 사학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진번의 위치에 대해서는 <동국지리지>가 조선 지경 내에 구한 것은 옳으나 맥국을 진번으로 간주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신경준은 오히려 진번고지를 고구려국으로 (108 쪽)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를 차지한 다음 그 국도를 고구려현으로 하였으며 나머지 땅으로 1 군을 만들면서 옛 명칭을 따서 진번이라고 한 것으로 보았다. 二府에서는 ...2 군 때의 현도군은 고구려현 서쪽, 부여국 남쪽에 있었으며 고구려현은 흥경과 오라의 서남쪽 지경, 부여국은 개원현 지방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현도군의 영역은 그 사이이며, 동한이 요양현과 후성.고현을 합하여 현도에 이속함으로써 그 영역이 삼차하 동쪽에까지 미치었으나, 개평.금주.봉황성을 한나라에 소속되었던 현도로 보는 것은 <성경지>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109 쪽 한편 요동으로 옮겨간 현도는 전한 때 고구려가 사방에서 조여들어 그다지 오래 군을 지속할 수 없었으며, 현도가 한나라에서 남북조까지 중국의 소유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요동의 현도군치 부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도의 속현 중 고구려현은 옛 고구려국 국도로, 서개마현은 압록강의 서북 일대로, 상은태현은 요수발원처로 비정하여 현도가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편중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낙랑군은 한사군의 중심세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 그 위치에 대하여 많은 조선 후기 학자들이 논의에 참가해 왔다. 낙랑군의 위치를 정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확정되어야 할 지명은 조선현,왕검성,대방군,패수,열수 등이다. 신경준은 낙랑군의 가장 중심지역이었던 조선현을 평양으로 비정하였다. 대방군에 대해서는 요계의 바다에 접한 곳이라는 유형원의 주장을 부정하고 지금 황해도 남쪽 경기 북쪽의 바다에 임한 땅으로 백제와 서로 접하였다고 보았다.
그 뒤 자료에서 보이는 대방국은 참칭국이었으며 백제왕에게 대방군공의 명칭을 준 것은 백제가 한나라 때 대방군 (110 쪽)소속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였다. 당나라의 대방주는 백제 전영역을 한 주로 여긴 것과 백제 남계의 바다와 연한 한 주를 가리키는 두가지가 있으며, 흥양을 대방주로, 남원을 대방군으로, 용강을 대방군으로 비정한 것은 잘못 부회된 것으로 정리하였다.
패수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지칭하는 곳이 다름을 들어 각 시기마다의 패수를 살피고 있다. <승람>에서는 대동강, 저탄, 압록강의 3 패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동국지리지>에서는 청천강을 패수라고 추정하였으나 신경준은 전한 시기의 국경이였던 패수는 요동속현인 번한 서쪽 요양부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하였다. 그리하여 위만이 건너오고 또 한나라 사자인 섭하가 자신을 전송하던 자를 죽이고 건너갔던 패수는 요양의 패수(於泥河)이며, <수서>의 래호아가 강회의 군사들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평양 근처에 이르렀다는 패수는 평양 패수(대동강)이며, 백제사에서 비류가 아우와 함께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렀다거나 백제사람들이 고구려로 도망가서 패수와 대수 사이가 무인지경이 되었다는 패수는 평산의 패수(猪灘)이라고 정리하였다.
신경준은 패수를 시기별로 달리 비정하되, 전한과 조선의 경계였던 패수는 요동지역으로 비정함으로써 그만큼 조선의 강역을 확대하여 보고 있다.
111 쪽 낙랑남계는 초기부터 진한.마한과 인접하였고 오래지 않아 신라와 백제가 2 한을 대신하였으며, 그 경계의 진퇴가 무상하여 일정하지 않았으나 일시적으로는 조령과 죽령을 넘어 경삳도 동북의 여러 군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았다. ... 낙랑북계는 고구려의 영토개척과 맞물려 있다. 낙랑군의 속현인 패수.수성.증지.열수.장잠.누방 등의 여러 현이 압록강 북쪽에 있었으며, 고구려 대무신왕 때 낙랑이 멸망하였으나 살수이남이 곧 다시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으며, 한나라 건무 이후에는 동정의 기사가 없으므로 살수 이남도 모두 고구려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정리하였다.
112 쪽 曺魏 때에는 고구려가 겨우 천여리 국가로 줄어들고, 晉나라 때 낙랑 6 현과 대방 7 현이 있어 낙랑의 옛 영토를 보유하였으나 곧 잃어 버리어 이름만 있게되고, 隋나라에 이르면서 이미 모두 고구려에 들어간 것으로 정리하였다. 고구려와 영토를 갈랐던 薩水에 대하여서는 청천강으로 비정하였다. 신경준의 한사군에 대한 인식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 113 쪽. ... 넷째, ... 한사군의 일부 영역이 요동에까지 걸치고 있었으며, 낙랑 진번 현도의 일부 북계가 요동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 한편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을 정한 동천왕 이후의 낙랑은 단지 평양 이남 일대에 빌붙어 있었으며, 중국 군현으로소가 아니라 참칭국에 불과하였다고 보고 있다. 114 쪽. 이 견해는 후일 정약용에 의해 춘천 최씨 낙랑국설로 발전하였다.
<6. 고구려국과 군소국가>고구려의 초기 국도인 졸본의 위치에 대해서,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압록강 이북지역은 알 수 없다고 하여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거나 혹은 평북 일원이라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졸본의 위치를 요동 일원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하였다.주) <강계고>에 인용된 것을 적기한다면, <삼국사기>에서는 한나라 현도 경내 요나라 동경 서쪽으로, <승람>에서는 평북 성천으로, 한백겸은 서안평 일원으로 보았으며, 유형원은 <고려사>와 <승람>의 졸본.성천설을 지지하였다. ...
신경준은 古고구려국이 한나라에 의해 고구려현이 되었으며, 주몽이 부여로부터 와서 건국하자 중국인들은 소수맥이라고 하였으나 주몽은 옛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고구려로 하였다고 하여 한나라 군현 고구려와 주몽 고구려를 구별하고 있다. 주몽 고구려에 대해서는 <요사/지리지>를 믿을 수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처음 일어난 곳은 압록강의 동북, 한나라 고구려현의 동쪽으로 세력이 백두산쪽으로 편중되어 있었으며, 비류가 가장 북쪽에 있었고, 국내성이 조금 남쪽, 환도성이 그 서남쪽에 있으며, 압록강을 지나서 평양은 가장 남쪽에 있었다고 정리하였다.
국도의 위치에 대해서는 비류는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요 상경 임황부) 북쪽 소수(비류수)일대이고, 주) <강계고/맥소수비적강지변> 여암전서 1 -210 면 <동국지리지>에서 마자수가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는 <한서> 주의 내용만을 믿어 서안평이 소재한 곳은 살피지 않고 단순히 소수를 압록강의 적강으로 비정하는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환도성은 압록강 어구에서 배로 동북쪽 600 리이며, 다시 동북으로 200 리를 가면 국내성이 있다고 하였다. 주) 국내성의 위치도 이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었다. <강계고>에 인용된 것을 보더라도 <삼국사기>는 압록강 이북으로, <고려사>와 <승람>에서는 옛 인주로, <빈일쇄록>에서는 압록강 이북 부근 땅으로 비정하고 있다.
115 쪽. 그리고 고구려 국도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관련자료에 변증을 가해 국내성과 환도성은 동일한 곳이 아니며, 안시성은 대요수 입구 남쪽 강안으로 개평현에 있어 환도와는 지역이 다르고, 봉황성은 당 태종이 공격한 안시성이 아니라고 비정하였다. ... 평양성으로의 이도과정에 대해서는 신경준은 이미 동천왕 때 일시적으로 평양천도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
117 쪽.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 후 패수 이북 지방의 행방에 대해서, 신라는 서쪽은 패강을 동쪽은 정천군을 경계로 하였으므로 그 바깥은 당연히 발해의 땅이 되어야 하나, 발해는 함경도쪽은 압록강을 넘어 정천군에 이르렀지만 평안도쪽은 압록강을 넘지 못하고 압록강 북쪽 언덕의 책성부에 그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압록강 이남, 패수 이북은 신라와 발해의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주인이 없는 버려진 땅으로 고덕무가 입국하고 부여융이 기치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이는 ... <요사>에서 발해의 경리를 압록강 아래로는 비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지역을 고덕무가 차지 한 것으로 본 것이다.
118 쪽. 말갈은 숙신에서 시작하여 읍루,물길 등으로 불리웠으며, 그뒤 말갈의 한 종인 속말이 발해가 되고 흑수는 발해에 역속하였으며, 발해가 망하고서는 다시 그 땅을 천단하여 금이 된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 말갈 가운데 속말은 고구려에 부속되어 신라와 백제의 북쪽 경계에 침략하였던 것으로 적고 있다.
주) <강계고>`부말갈` 여암전서 1-222 면 따라서 <동국통감>에서 말갈이 고구려를 넘어 백제와 신라에 침략한 것으로 적은 것은 말갈이 옥저와 예맥 사이에 산거하면서 고구려에 신속하였던 것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
발해에 대해 신경준은 고구려 사람인 `대씨는 고구려가 망한 지 10 년 후에 일어나 유민들을 모아 구강을 회복하고 또 바다를 건너 병사를 보내 당나라의 자사를 죽여 이로써 전왕의 수치를 복수하였으며 홀한주에 거주하면서도 평양성이라고 한 것을 보면 엣 국도를 못잊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당사>에서는 이를 외이로 낮추어 보고, <고려사>에서는 외국으로 보아 생략하였기 때문에 유적이 전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애석해 하였다.
한편 강계에서는 압록강 북쪽 수 천리의 영토가 고구려의 소유였으나 발해가 거란에 잃어 버리어 오랑캐에게 빼앗기게 된 것은 바로 신라의 과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신라가 서울을 북쪽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유민들을 잘 위무하였더라면 그 영역은 모두 신라에게 돌아왔을 것이며, 발해 건국 초기에도 적극적으로 북방을 경영하였더라면 옛 강역을 적에게 넘겨 주지 않게 되었을 것이며, 고래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을 때 적극적으로 군사를 일으키어 땅을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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