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行 海路
1. 이흘 진하겸변무사 <朝天日記> 1629,30
평양-강서 돌석강-급수문-용강-장련 정분-삼화 색천-영도-주라천 덕도-석다산
-우리채 참채-가도-대계도-거우도-녹도-석성도-장산도-광록도-삼산도-해성도
-평도-철산취-여순-쌍도-남신포구-북신-조예두-해평도-각화도-寧遠衛
2. 花浦 <조천항해록>1624
가도-炭島-車牛도-竹도-대.소獐子도-鹿도-黃골도-石城도-長山도-廣鹿島-廟島
-登州
3. 권근 <양촌집/봉사록> 1389
(육로남경행) 의주-압록강-蕩站-開州-龍鳳站-連山站-甛水站-頭館站-요동성
-鞍山驛-牛莊驛-사령역-요하-판교역-십삼산역-연산도역-曺家莊驛
-東開(?關)驛-沙河驛-端川古城-山海衛(遷安驛)-楡關(蘆峰驛)-永平衛...
(해로한양행) 등주(봉래역)-사문도-명호도-여순구-목장역-金州-패란점역-복주역
-蓋州驛-안산역-요동(鐵場村)...압록강
4. <通文館志>
宣川宣沙浦-鐵山假(人代木)島60리-거우도140리-녹도500리-석성도600리-장산도300리
광록도200리-삼산도280리-平島200리-皇城島1000리-전磯島200리-廟島200리-등주
1-1
인조 7 년 (1629 년) 雪汀 李흘 진하사겸 변무, 동지사 윤은국과 동행
청 황손 탄생 진하 겸 왜구에게 관대하였다는 원숭환의 주청에 대한 변무
1629 년 7 월 8 일 천자에게 보내는 표문 확인
7/9 파주 숙박 /10 송도 도착 /12 평산 숙박 /13 서흥 숙박 /14 봉산 숙박
/15 황강 숙박 /18 중화 도착 /19 평양 도착
8/1 동지사.서장관과 함께 연광정에 올라 대동강 신.풍백에게 제사. 대동관에서
망궐례를 행하고 오전 9 시에 배를 타고 즉시 선신제를 지낸 후 출발 강서 돌석강
강촌 숙박 이날 80 리 행
8/2 龍岡 도착 안악과 황주 경계임 /3 長連 丁粉 숙박 /6 암초에 걸리고 풍랑에
배로 물이 들어옴 三和 塞川 원당리에 정박 /8 큰 바다 용왕.풍백 삼신의 제사를
산위에서 지냄 /9 榮島를 돌아 珠羅川 德島를 지나고 石多山 앞바다에서 숙박
이날 800 리 행 /12 牛里寨와 僭寨를 지나 가(木+假-人)島에 들어 정박 이날
800 리 행 /14 유숙하면서 바닷길을 잘 아는 중국 사람을 구함 /16 車牛島로
못가고 大界島로 가서 정박 /17 배 위에서 삼신제를 지내고 차우도로 옮겨 숙박
/18 鹿島로 밤새도록 감 /19 녹도를 지나 石城島에 도착 이날 1 천 수백리를 감
서북쪽이 요양 땅임. 명나라 장수 김정경의 군문 쪽으로 가서 정박하고 유숙함
/20 수 십리를 가서 장산도에 도착하여 유숙 /22 廣鹿島에 정박 이날 백 여리 행
배위에서 유숙 /23 광록도에 정박하는데 마침 세찬 비바람을 만나 다른 두 배가
위험했으나 다행히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아 안심하고 시를 지어 축하해 주었다.
/26 삼신제를 지냄. 역풍이 불어 배 위에서 유숙. 장계와 편지를 보냄 /27 三山島
를 海城島에 도착 정박 유숙. 일명 용왕당이라 함 /28 비 9/1 파도가 심하고
날이 추워 겨울옷을 입음 /2 平島에 이름 이날 백 여리 행 /3 배 위에서 삼신제를
지냄 /4 비바람이 거셈 /6 역풍으로 여순旅順을 향하다가 鐵山의 부리를 보고
배 위에서 제사 지냄. 오후에 旅順에 정박.유숙
9/11 雙島 정박 /12 역풍으로 배 위에서 유숙 /13 南迅(-책받침변+水) 포구 앞
염장에 당도. 이날 400 여리 행. 정풍을 얻은 것은 오직 이 날 뿐임 /14 여기부터
覺華까지는 큰 바다임. 새벽에 삼신제를 배 위에서 지내고 北迅( '')포구 정박 유숙
17/ 새벽 1 시 天妃神에 제사. 각화도로 향하다가 풍랑이 심해 早隸頭에 이르러
정박.여기서부터 영원까지 50 리이고 각화까지 물길로 130 리임.동지사의 배가
풍랑에 휩쓸려 빠짐 /18 머물러 배를 수리함 /19 海平島를 지나니 烟臺가 보임
각화도에 당도하여 선상에서 숙박. 寧遠까지 10 여리임. 북으로 松山城이 있고
醫無閭라는 산이 있는데 북쪽 진산이라고 함. 산 밖에는 오랑캐 撻子의 땅이라고
함 /20 오후에 육지에 내려 어촌에 숙박 /21 寧遠衛 공관에 홀로 당도하여 숙박
/22~23 兵備道 손원화를 만나 인사하고 선물 단자를 올림 /24 서장관 일해 도착
/25 대기함
10/18 서장관이 북경으로 떠남. 객관에 머문지 한 달이 다 되어감. /21 督師가
변무의 일을 천자에게 알렸다고 함 /25 조장을 지나 사하에 이르러 숙박. 영원에서
조장까지 15 리, 조장에서 사하까지 30 여리 /26 東關 도착 30 리 행 /27 동관에서
사하역까지 36 리, 사하역에서 구아포를 지나 前屯衛까지 28 리. 전둔위 도착 숙박
/28 전둔위에서 高嶺까지 20 리. 고령에서 中前所까지 20 리.八里浦를 지나 邏城
까지 30 리. 저녁에 관 밖에서 숙박 /30 정세를 알아보니, 며칠 머물러 袁崇煥이
오기를 기다려 적의 소식을 자세히 탐지하고 가야한다고 하여 대기함
11/1 대기함 12/6 정세를 알아 봄.
1630 1/1 망궐례에 참석함 /27 김후각에게 돌아갈 배를 알아보게 함
3/1 손가부로 가서 하직을 고함 /2 왕병비의 아문으로 가서 하직을 고함
/4 바다에 도적이 많다고 하여 배에 오르지 못함. /7 장계를 써서 북경의 정월
통보와 봉태자 조책을 함께 보냄. 집에 보내는 편지는 중국 사람이 열어볼까봐
언문으로 씀 3/8 망해정으로 향하면서 낭랑묘에 제사를 지냄 /9 開洋祭를 지내고
수 백리를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금산 부리에 정박함 /10 要口를 지난 듯함
/11 수백 리를 감 /12 津口에 들어감. 天津까지 120 리라고 함 大丘堡 아래까지
가서 정박함 ......3/16 육지에 내려.....3/23 雪里堡.通州.西關里.東岳廟를 거쳐
朝陽門으로 달려감 /24 옥하관에 이름
6/4 임태의를 불러다가 지맥했는데 병 증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함.
雪汀 이흘의 <조천일기> 중에서
12/6 병진 맑음.
한역관으로 하여금 주사에게 서쪽 소식을 알아보도록 했는데 이때까지 소식 온 것이
없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撻賊이 황성 밖에 있어 어는 곳인들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
반드시 궁색한 도적들이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노략질을 할 것으로 생각되나 죽여 없애지
못하니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할 지 알 수 없다.
12/8 무오 맑음.
어제 원야(원숭환)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한역관으로 하여금 널리 알아
보도록 했더니, 지난 말 싸움에서 이긴 것으로 인하여 환관의 무리들이 공을 다투어
참소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원야는 네 가지 죄를 책임지고 갇히게 되었는데,
군대는 실망하고 대궐을 향하여 통곡하였다고 한다. 또 祖滿侯가 사총병을 허물
하고 전승의 사실을 적어 올리며 은총을 구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해들은 것을 비록 믿을 수 없지만 대개 원야가 참소를 당하여 감옥에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천하의 일은 떠나간 것이다. 적군이 성에서
나가지도 않았는데 공을 다투고 충신을 해쳤으니 옛날부터 환관이 군사를 감독
하고서 패망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통탄을 이길 수 있겠는가?
12/10
... 일찍이 들어보니 네 가지 죄로써 헤아렸다고 하는데, 첫째는 영원의 병마를
처음에는 14 만이라 하고 이제 거느리고 온 것은 단지 1 만여 라는 것이요, 둘째는
모문룡을 제멋대로 죽인 것이요, 셋째는 준화를 구원하지 않은 것이요, 넷째는 적
이 계주에 있을 때 힘써 싸우지 않고 북경의 군사를 몰아넣고도 즉시 초멸하지
못한 것 들의 네가지 죄목이라고 하였다.
- 조기영의 해설
명나라 思宗은 원숭환으로 하여금 군대를 맡겼다. 당시 총사령관이던 모문룡은
피도에서 은밀하게 만주와 내통하였고, 환관과 결탁하여 군비를 뇌물로 쓰곤 하여
원숭환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뒤 모문룡이 죽자 환관들이 재원을 잃어 원숭환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황태극이 요서에서 원숭환의 방어을 뚫지 못하자 전략을 바꾸어
원숭환이 적과 밀약 했다고 무고하니 사종이 이에 속아 원숭환을 하옥시켰던 것이다.
[연행록 연구 총서 6 344 쪽 - 서정대 관광과 교수 조기영의 `이흘의 <조천일기>에
나타난 17 세기 문화 양상`]
- 이흘 연행의 평
<성호사설/권9 인사문 조천엄사>
1621 년 심양이 함락되어 사행길이 막히고 비로소 바닷길을 개척하던 즈음에
사신의 명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에 휩쓸려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다. 박이서.유간.정응두.윤창립은 바다에 표류하다 죽었고, 강욱은 길에서
죽었고, 오직 이필영.이지선만이 무사히 돌아왔으며, 인조 7 년(1629)에는
윤안국이 바다에 표류하다 죽었고, 이미 도착해서도 이흘은 이듬해 옥하관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우암집/ 우암 송시열 1607~1689>
기사년(1629) 8 월 진하사 동지중추부사 이흘이 동지사 윤안국 등과 함께 출발하여
각화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윤안국은 태풍을 만나 물에 빠져 죽고, 나머지 배는 모두
흩어져 흔적이 없어졌다. 이흘 혼자서 배를 타고 육지에 올라가서 원숭환의 군문에
이르니, 군문이 한관의 위의를 이제 다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대개 요동이 오랑캐
에 함락된 뒤로부터 우리나라의 행인들이 모두 등주.래주를 말미암아 들어갔는데
영원 길은 이흘이 간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산해관에 이르러 길이 막혀 앞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다음해 3 월에 두 척의 배를
구하여 망양정에서 닻줄을 풀었는데 큰 바람을 만나고 또 해적을 만났으나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천진에서부터 육로로 이틀 동안 가서 황성에 이르렀으며,
6 월이 되어 병으로 옥하관에서 죽었다.
황제가 순천부에 조서를 내려 널 재료를 주고, 각 부서에서 빈소를 차리고 염습할 모든
도구를 주고, 또 예부의 관원을 보내어 제사 지낼 것을 보냈으며, 황토를 깔고 용정과
황산을 설치하여 대략 친임의 의식을 따르도록 하였다. 또한 악기를 뜰에진열하고 삼작의
예를 행하였으며, 병부에서는 40 여명의 상여꾼을 내어주고, 또한금자패에 `어제`라는
두 글자를 써서 상여앞에 걸어달도록 하고 말하기를, `상여지나는 길에 이것을 보이면
비록 각로의 집이라 하더라도 감히 막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8 월에 각화에서 배를 타고 10 월에 평양 석다산에 돌아와 닿았다.
이흘李心+乞
1568~1630 호 설정雪汀
1591 문과 급제 1597 문과 중시 장원급제
1629 사은사, 동지사 윤안국과 연경행 -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 명 장수 원숭환이
황제에게 아뢴 내용 가운데 조선이 왜구와 사귀고 오랑캐에게 관대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진하사로 하여금 사정을 갖추어 변명하기 위함.
연행록연구총서 6 역사 318~325쪽 조규익.이성훈.전일우.정영문 엮음 2006
海路
1629,7,8 천자에게 보내는 표문을 검토 확인하고 한양 출발
7.12 송도 출발
7.19 평양 도착
8.1 대동강 포구에서 출발
8.2 급수문을 지나 龍岡에 이름, 安岳과 黃州 경계임
8.3 長連.丁粉으로 옮겨 숙박, 동지사가 오지 않고 닻을 만드느라 출발하지 못함
8.6 암초에 걸리고 풍랑에 배에 물이 들어옴, 三和의 塞川 院堂里에 정박.
8.8 큰 바다.용왕.풍백 삼신의 제사를 산 위에서 지냄, 작은 협선을 삼
8.9 榮島를 돌아 珠羅川의 德島를 지나고 石多山 앞바다에서 숙박,
이 날 800 여 리를 감 ?
8.12 牛里寨와 僭寨를 지나 가(木+하)도에 정박,
이날 800 여 리를 감 ?
8.14 유숙하면서 바닷길을 잘 아는 중국 사람을 구함
8.16 車牛島로 못가고 大界島로 가서 정박함
8.19 鹿島를 지나 石城島에 도착, 이날 천수 백리를 감 ? 서북쪽에 요양 땅임
, 명나라 장수 김정경의 군문 쪽으로 가서 정박.
8.20 長山島에 도착
8.22 廣鹿島에 정박, 이 날 백 여리를 감. 배위에서 유숙함
8.23 광록도에서 정박하는데 마침 세찬 비바람을 만나 다른 두 배가 위험했으나
다행이 아무 일이 생기기 않았슴.
8.26 삼신제를 지냄. 역풍이 불어 배 위에서 유숙함, 장계와 편지를 보냄
8.27 三山島를 지나 海城島 - 일명 龍王堂에 정박
9.1 파도가 심해 유숙함, 날이 추워 겨울옷을 입음
9.2 平島이 이름, 이 날 백 여리를 감
9.3 배 위에서 삼신제를 지냄
9.4 비바람이 거세서 평도에서 유숙함
9.6 역풍으로 旅順을 향하다가 鐵山의 부리를 보고 배 위에서 제사를 지냄,
오후에 여순에 정박하여 유숙
9.11 雙島에 정박
9.12 역풍으로 배 위에서 유숙
9.13 南迅( 책받침 변이 아니라 삼수 변임) 포구 앞 염창에 당도함, 이 날 400 여
리를 감, 정풍을 얻은 것은 오직 이 날 뿐임
9.14 여기부터 覺華까지는 큰 바다임, 새벽에 삼신제를 배 위에서 지냄, 북신 포구에
정박.유숙
9.17 새벽 1 시에 天妃神의 제사를 지냄, 覺華島로 향하다가 풍랑이 심해 早隸頭에
정박, 여기서부터 寧遠까지 50 리이고 각화까지 물길로 130 리임, 동지사의
배가 풍랑에 휩쓸려 빠짐
9.18 머물러 배를 수리함
9.19 海平島를 지나니 煙臺가 보임, 覺華島에 당도하여 선상에서 숙박, 영원까지
10 여 리임, 북으로 松山城이 있고, 醫無閭라는 산이 있는데 북쪽 진산이라고 함,
산 밖에는 오랑캐 撻子의 땅이라고 함
9.20 오후에 육지에 내려 어촌에서 숙박
9.21 寧遠衛 공관에 홀로 당도하여 숙박
9.24 서장관 일행이 도착, 이 날부터 대기함
10.18 서장관이 북경으로 떠남, 객관에 머문지 한 달이 다 되어감
10.25 曺庄을 지나 沙河에 숙박, 영원에서 조장까지 15 리, 조장에서 사하까지
30 여 리라고 함
10.26 사하에서 東關까지 30 리인데 동관에 도착.숙박
10.27 동관에서 沙河驛까지 36 리임, 사하에서 狗兒浦를 지나 前屯衛까지 28 리임,
전둔위에 도착.숙박
10.28 전둔위에서 高嶺까지 20 리, 고령에서 中前所까지 20 리, 八里浦를 지나
羅城까지 30 리임, 관 밖에서 유숙
10.30 정세를 알아봤더니 며칠 머물러 袁崇煥이 오기를 기다려 적의 소식을 자세히
탐지하고 가야한다고 하여 대기
11.1 계속 대기함
12.6 정세를 알아 봄
1630.1.1 망궐례에 참석함
1.27 김후각에게 돌아갈 배를 알아보게 함
2.30 유경우.김의인.전대인이 영원에서 와서 김후각이 배를 타고 각화에 있어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고 함
3.1 손각부로 가서 하직을 고함
3.2 왕병비의 아문으로 가서 하직을 고함
3.4 바다에 도적이 많다고 하여 배에 오르지 못함
3.7 장계를 써서 북경의 정월 통보와 봉태자 조책을 함께 보냄, 집에 보내는 편지는
중국 사람이 열어볼까봐 언문으로 씀
3.8 望海亭으로 향하면서 娘娘廟에 제사를 지냄
3.9 개양제를 지내고 수백 리를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金山부리에 정박
3.10 要口를 지난 듯함
3.11 수백 리를 감
3.12 津口에 들어감, 天津까지 120 리라고 함, 大丘堡 아래까지 가서 정박
3.13 서풍이 크게 불어 정박
3.14 1백여 리를 가서 멈춤, 천진까지 6,70 리라고 함
3.15 아문 성 동쪽 포구에 당도
3.16 육지에 내려 娘娘廟 뒤채에서 숙박
3.17 天妃廟에 참배하고 분향함
3.20 묘당에 가서 잡희를 구경함
3.21 桃花口를 지나 楊村에 이르러 숙박, 이 날60 리쯤 감
3.22 武城을 지나 槨顯에 이르러 숙박, 이 날 130 리를 감
3.22 雪里堡,通州 서관리,東岳廟를 거쳐 朝陽門으로 달려감,
성문 안에 들어가지 못하여 동악묘 건너 절에서 숙박
.....
4.27 서장관이 와서 같이 이야기하고 통주로 떠남
5.11 새벽부터 이질 설사가 잦아 약을 먹고 누워서 조리함
.....
6.4 임태의를 불러다가 진맥했는데 병증세가 매우 위중,
6.8 옥화관에서 운명
- 인조 8 년(1630) 좌찬성에 추증, 忠章 시호를 내림
-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우암집>에서
....
황제가 순천부에 조서를 내려 널 재료를 주고, 각 부서에서 빈소를 차리고 염습할
모든 도구를 주고, 또 예부의 관원을 보내어 제사 지낼 것을 보냈으며, 황토를 깔고
용정과 황산을 설치하여 대략 친임의 의식을 따르도록 하였다. 또한 악기를 뜰에
진열하고 삼작의 예를 행하였으며, 병부에서는 40 여 명의 상여꾼을 내어주고
또한 금자패에 `어제`라는 두 글자를 써서 상여 앞에 걸어달도록 하고 말하기를,
`상여 지나는 길에 이것을 보이면 비록 각로의 집이라 하더라도 감히 막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8 월에 각화에서 배를 타고 10 월에 평양 석다산에 돌아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