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내현의 역사 인식과 관련하여 가장 큰 문제 부분은 지리다. 윤씨가 작정하고 비판하려는 한국사학계와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식민사관 맹종자 딱지를 뗄 수도 없고 동북공정 논리도 반박할 수 없다. 게다가 윤씨가 지리를 잘못 이해하고 설명한 결과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척결하려는 염원을 가진 재야 연구자들 중 거의 대부분도 더 혼동스런 길을 가고 있다.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지리의 중심에는 요동이 있다. 한국사학계는 물론이고 윤씨 역시 요동을 크게 곡해하고 있기 때문에 요동 지리를 중점적으로 다루려 한다.

 

 

1. 각기 다른 요동 인식

 

사실 요동 지리는 매우 단순하고 간단하다. 근세 신채호.계연수가 란하 중류 유역이라고 이미 교시하기는 하였지만 두 사람이 지리 분야에 특출나기 때문은 아니다. 이조선 500 여 년은 물론이고 그 이전 1500 여 년 동안 줄곧 두 사람의 인식과 같이 요동.봉천은 지금의 란하 중류 유역이였고 2000 여 년 동안의 모든 조선인들이 상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두 사람 생존 시기에 일본명치왕이 조작을 기획하고 실행하여 성공하는 중이였기 때문에 두 사람도 상식.경험적으로 언급하였을 뿐 요즘의 윤내현 등과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인들이 크게 혼동스러워 하고 결국엔 두 사람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뿐이다.

 

윤내현은 <고조선연구> 제1편 고조선 연구 총론 제3장 고조선의 강역과 국경 2) 고조선후기의 서쪽 경계(186,187쪽)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지금까지의 고찰로써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 고조선시대(중국은 서한 초 이전)에는 지금의 란하 유역을 요동이라 불렀는데, 일반 의미의 요동지역 즉 넓은 의미의 요동은 란하 유역으로부터 그 동쪽지역인 지금의 요서지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 요동의 서부 일부는 진제국과 서한제국의 요동군이었다. 따라서 고대 요동의 대부분은 고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서남부 일부가 중국의 요동군이었던 것이다. 그 경계상에는 장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위와 같은 윤내현의 지리 인식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지도에 표시하면 대략 아래와 같을 것이다. 

 

주) 위 추정도의 물길 표시는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것임.

 

윤씨가 설명한 진제국과 서한제국의 요동군이라 주장한 란하 유역은 위 추정도에서 `가` 표시 지점과 같이 엄밀하게는 란하 최하류의 서쪽 강안 지역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반 의미의 요동 곧 위 추정도의 `나` 지역을 요동이라 명명하게 된 이유를 183,184 쪽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그런데 <후한서>와 <삼국지>는 중국의 동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역사서로서 그 <동이열전>과 <오환선비동이전>에 기록된 만주와 한반도의 상황은 중국 동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상황인 것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가 지금의 요동 지역에 있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지금의 요하가 요수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요수라는 강명이 지금의 란하로부터 요하로 이동해 있었다. 이와같이 요수라는 강명이 동쪽으로 이동한 것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었던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에 한4군이 설치되어 지금의 요서지역이 서한의 영토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두 문장은 윤씨의 고대 지리 인식의 핵심 부분이며 한국사학계는 윤씨 주장과는 약간 다르지만 서한의 요동군 위치는 처음부터 `다` 지역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진시황이 설치한 요동군과 서한이 설치한 요동군 위치는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하류의 서쪽 지역과 중류의 동서 지역이였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위 추정도와 같이 갈석산이 포함된 얇은 적색 실선 원으로 표시한 `가` 지역이 시황 진 시기의 요동군 영역이고 북쪽의 굵은 적색 실선 표시의 `나` 지역은 서한이 설치한 요동군 영역이다. 서한은 진 시기 요동군의 남쪽 지역 곧 갈석산부터 북쪽으로 백랑수 하류 남쪽 지역까지를 요서군으로 재편했고 또 염난수 중류 동쪽 지역의 진국 요동외요를 요동군으로 정식 편제했다.

 

위와 같이 단정하는 근거는  <한서/지리지><후한서/군국지>의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요동.현토.낙랑 등의 8 개 군.현 기록과 <수경주>의 고수.난수.대요수.소요수.패수 기록 및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다륜약이구.적봉직예주.승덕부.조양부.영평부 기록 등이다.  

 

즉 서국 한漢 시기 지금의 북경 주위에서부터 동쪽으로 차례대로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 등 5 개 군이 설치되었고 그  5 개 군 지역을 역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차례대로 습여수,750 리 길이 고수,650 리 길이 경수, 2100 리 길이 난수, 백랑수 등이 흘렀다. 또한 <청사고/지리지>에 처음 그 길이가 기록된 란하 곧 위 추정도의 난수의 최하류가 경유하는 서한이 설치한 요서군까지는 낙양으로부터는 동북쪽이고 아마도 요서군의 치소 양락현까지를 3300 리라고 설명한 것이 <후한서/군국지>의 요서군 주석이다. 

 

또한 그 요서군에서 동북쪽으로 300 리 더 떨어진 요동군으로는 우북평.요서 2 개 군의 북쪽 지역을 동북류한 백랑수, 백평산.지석산砥石山에서 발원하여 동남류하여 요동군 망평.양평현을 경유한 후 안시현으로 흘러내리는 1250 리 길이 대요수, 요동군에서도 400 리 더 떨어진 현토군의 서개마현을 경유한 후 요동군 서안평현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 염난수, 현토군 고구려현에 있는 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류하여 요동군 요수현을 경유한 후 대요수로 흘러든다는 요수(소요수)가 흘러들어야 한다.

 

또 요동군의 동쪽 경계 밖에는 패수가 흘러야 하고 그 패수부터 동쪽으로는 낙랑군 지역이며 이 낙랑군까지는 낙양으로부터는 5000 리 떨어진 곳이여야 한다. 또한 그 낙랑군 중심에는 820 리 길이 열수가 흘러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지역은 어디일까?

윤씨의 추정과 같이 지금의 란하 최하류 지점이였을까?

또 요동군과 일반 의미의 요동이 따로 있었을까? 

 

전국시대 연국이 설치한 요동군이건 시황 진이나 서한이 설치한 요동군이건 상관없이 <한서><후한서><진서><위서><당서><요사><명사><청사고> 등 서국의 모든 정사 지리지는 물론이고 특히 <수경주/고수.포구수.난수.대요수.소요수.패수> 기록까지도 충족시킬 수 있는 요동군 위치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한이 건국된 서기전 202 년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요동.봉천 위치는 변동이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는 한국사학계의 요동 위치 추정은 윤씨의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윤씨의 일반 의미의 요동 운운은 역사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사학계가 주장하는 현재의 요동과 요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또 신채호.계연수는 대체 어떤 근거로 고대의 요하는 란하, 패수는 금(1910 년 당시) 란하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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