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 년 일본은 유명무실하였던 왕에게 권력이 돌아오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명치왕은 군부 수장 서향융성과 더불어 유신을 단행하였는데 재일교포 고고학자인 이진희는 명치왕군부 대외정책의 첫째는 조선 정복이였다고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명치유신을 단행한 명치정부의 대외정책은 구미 열강과 손잡고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할 방침으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명치 초기에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에서도 보여지듯이 그 제일보는 우선 한국에 향해졌다. 명치정부는 `정한`을 실행함으로 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편입하는 한편 봉건 사족의 불만을 돌려서 구미 여러 나라에 압박받고 있던 불리한 상태에서 벗어날 계기를 만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정한`의 기도가 구체적으로 검토되어 가는 가운데 서향융성(西鄕隆盛 사이코 다까모리)은 1872 년 8 월 육군중좌 북촌중뢰北村重賴와 동 소좌 별부진개別府晉介를 한국에 잠입시켰다. 그들은 한국인으로 변장하여 군사전략의 견지에서 각지를 조사하고 돌아갔는데, 별부는 `한국을 치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다. 2,3 개 대대면 충분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진희의 <광개토왕릉비의 탐구/참보본부와 주내경신(사코오 가께아끼)의 프로필>134쪽
위와 같이 일본은 내부의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려고 조선 침략을 기획하였고 2 명의 밀정을 파견하여 조선의 군사 정황을 파악하고 불과 3 개 대대 병력이면 넉넉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후 육군 대장 서향융성은 압록강 북쪽의 만주와 남중국 하문 등 청국 땅에도 육군 장교 밀정들을 잠입시켰다고 합니다.
서향은 다른 한편 육군소좌 지상사랑 池上四郞과 동 소좌 무시정간武市正幹의 군적을 벗겨서 외무성 10 등 출사로 꾸며 외무성의 팽성중평彭城中平을 붙여 만주로 보냈다. 그들은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상해를 거쳐 영구로 가서 심양까지 각지를 조사하며 누볐는데, `당시의 만주지방 여행은 매우 곤란했을 뿐 아니라 청국 관헌이 일직부터 일행의 행동을 괴상하게 보아 귀찮게 따라붙어 시종 미행하여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아주 애먹었다`는 것이었다.
지상은 이듬해 1873 년 4 월에 귀국하여 <만주시찰복명서>를 서향.판원퇴조板垣退助에게 제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이 `征韓`의 즉시 단행을 주장했다.
`지금 지나는 회비回匪의 반란(역주:중국 서북 변경지대인 타림분지에서 이슬람교도가 반란을 일으켜 1865~1877 년간 이슬람 국가를 세웠음)이 감숙지방에 만연하여 섬감총독 좌종상이 대군을 이끌고 정토에 힘쓰고 있으나 진압은 용이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만주의 병비에 이르러는 성경장군이 자주 개혁의 필요를 상주하고 관하의 상비병을 모아 조교를 실시하고 있으나 적폐가 오래되어서 사기가 부패하고 병사도 겁유하므로 상비군이라 해도 거의 이름뿐입니다. 더우기 강기가 이폐하고 뢰로가 공공연히 행해져 상민으로서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할 실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태로 몇해를 경과한다면 지나는 결국 토붕와해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가 한국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지금의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만약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다시 이 같은 기회는 얻을 수 없읍니다.
서향은 지상 등이 귀국하기 전인 1873 년 초에 대만 침략 준비의 일환으로 해군소좌 화산자기樺山資紀(뒤에 대장)와 해군 비서인 아옥이국兒玉利國을 남청 및 대만에 잠입시키고 육군 소좌 복도구성福島九成을 문관으로 꾸며서 영사로서 하문(아모이)에 주재시켰다. 이처럼 명치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그 성립과 동시에 한국이나 대만 침략 준비를 위해서 군인을 현지에 미리 파견했던 것이다.
한편 육군 참모국(역주:참모본부의 전신임)은 이 해 12 월 미대청원 美代淸元중위 등 8 명의 군인을 청국에 보냈다. 이 `제 1 회 파견은 정한론과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북청으로 한정`(<대지회고록>)하여 한국문제와 관련한 청국의 동정을 탐지케 했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134,135,136쪽
위와 같이 이진희에 따르면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해 1872 년 2 명, 1873 년 8 명의 육군 장교를 장사꾼으로 위장시켜 청국 북쪽 지역인 영구.심양 곧 봉천성 지역이며 남만주라고도 불리는 곳을 여행하며 조선문제와 관련된 청국 동정을 탐지케 했고 이때 대만에도 밀정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 내에서는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이 왕정복고가 초래한 근대화 추세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반발하고 있었으며 또한 징병제도 도입으로 인하여 크게 위축되어가는 상황에서 서향은 사무라이 계급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조선과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보고 아래와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 자신이 조선과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사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한 뒤 일부러 무례한 행동을 하여 조선인에 의해 피살되도록 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조선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정당한 구실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강조함으로써 반대의견을 모두 물리쳤다. 여러 번에 걸친 간곡한 탄원 끝에 그의 제안은 1873년 8월 18일 덴노(명치왕)의 재가를 받게 된다.
<다음 백과 사이고다카모리>
하지만 마침 서구 시찰에서 돌아온 이와쿠라[岩倉] 사절단 일행은 서향의 결정에 경악하면서 해외 원정보다는 국내 발전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며 사이고의 제안을 취소시켰고 이에 반발한 서향은 귀향한 후 1877 년 2 월 반란을 일으키고 토벌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산현유붕山縣有朋과의 6 개월 전투 끝에 패하여 자살하였습니다.
결국 1872 년 서향이 시작한 조선 침략 기획과 실행은 1872 년과 1873 년 2 차례에 걸친 북청 지역 파견으로 끝을 맺었고 짧은 기간이여서 성과가 적었다고는 하지만 군사를 조선 뿐만이 아니라 청국 내에서까지 운용하려고 기획하였습니다.
<대지회고록>(1936 간행)에 의하면 그들의 임무는 `대륙정책 수립을 위한 자료 수집을 주로 함과 동시에 구미 각국의 침략과 조선을 주제로 하는 일지日支(일본과 청국)관계의 절박함에 의한 우리 국책의 구체와에 수반하여 동서 대책의 실현을 위해 병兵을 지나支那영토에 사용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한다고 하는 극히 광범위한 데 미치고 있다. 하지만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이 때는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듯 하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136 쪽
이때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으로 빗장을 꼭꼭 닫고 있었습니다. 서강 열국과의 맺은 불공평한 계약에 의해 입는 막대한 손실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벌충하려는 일본에게 조선.대만은 좋은 먹이감이였습니다.
한편 서향의 반란이 진압된 후 1877 년 12 월 일본명치왕군부는 이전의 참모국을 확대개편하여 육군참모본부를 설치하고
일본 서부지역과 조선.청국 지역을 관장하는 관서국장에는 후일 대장까지 승진하고 강제병합 당시 수상이였던 계태랑桂太郞 중좌를 앉혔습니다.
육군참모본부가 설치된 것은 이른바 서남전쟁(역주:1877 년 명치유신 최대 공로자의 한 사람인 서향융성을 중심으로 구주 녹아도에서 일어난 불평사족의 반란, 서향의 자인으로 반란은 평정됨)의 뒤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1878 년 12 월로서, 그 임무는 <육군성연혁사>에 의하면,
본부장 아래에 관동.관서 2 국 및 총무과가 있고.....관서국의 중,서부 감독부, 名古屋.大坂.廣嶋.熊本의 네 진대의 참모부와 통보하여
전적으로 제 3 군관(名古屋 진대 소관).....의 지리정지地理政誌를 상세하게 밝히고 또한 겸하여 조선으로부터 청국 연안에까지 확대
하여 유사시에 있어 그 참획의 도략을 갖춘다.
고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89쪽
위와 같이 참모본부는 구 참모부와 마찬가지로 군사를 조선을 넘어 청국 연안에 사용하는 데 필요한 지리자료를 상세히 밝히려고 하였고 지리를 파악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밀정을 파견하였습니다.
각 진대에서 `소좌, 대위, 중위 각 한 명씩 강골 유위의 인물을 선발하여 본부원을 구성하는 한편 이듬해 1879 년에는...11 명(뒤에 한 사람 늘려 12명)에 대하여 청국 출장을 명하여... 그 12 명의 장교가 `한적의 소양이 있는 우수한 청년사관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해 가을에는 桂 자신이 청국 각지를 누비며 대청 작전책을 기초하는 한편 14 명의 `지나 어학 연구생을 선발하여 육군 유학생으로서` 북경에 보냈다. ... 그들은 북경 등지에서 약 1 년간에 걸쳐서 중국어 훈련을 받은 다음 세 팀으로 나뉘어 밀정 활동을 벌였다.
상해.한구 팀...
북경.천진 팀
천진(우장) 도홍의島弘毅 중위(두번째, 뒤에 중좌)...
북경(우장) 이집원겸웅伊集院謙雄 중위(두번째, 귀국 후 사망)...
광주.하문 팀...
그들은 1880 년 말까지는 중국어를 습득하는 한편 봄.가을에 소규로 밀정 여행을 하고, 이듬해에는 2 개월, 마지막 해인 1882 년에는 4개월간 각기 오지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1 년 늦게 파견된 주내와 옥정은 1883 년가을에 소환되었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137,138,139쪽
위와 같이 밀정을 파견한 결과 얻은 성과는 참모본부 제 2 국장 소천우차가 1886 년 1 월 참모본부장에게 보낸 상신서에 개술되어 있는데 아래는 그 요약입니다.
즉, ...명치 6 년(1873) 육군 장교 몇명을 청국에 파견하여 비로소 인국 정세를 탐정한 단서를 열었습니다. ... 명치 12 년(1879) 다시금 조직을 일정하여 청국의 각 요충지에 분주 장교를 파견시키고 따로 관리자 두 명을 두어 그 중 한 사람은 북경에 두어 산동 이북의 주재장교를 관할하고 다른 한 사람은 상해에 두어 장강 이남의 주재장교를 관리하게 했습니다. ...이로부터 사업이 착착 진보하여 이후 4 년이 지나지 않아 대개 연해의 요충지방을 측량하여 크게 용병상의 목적을 이루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2 차 밀정 파견이 시작된 1879 년으로부터 4 년이 지난 1883 년에 이르면 발해 연안의 요충 지역 지리는 측량 지도까지 만들 수준이였고 참모본부 내에는 측량은 물론 지도 간행과 편찬까지 전담하는 부서까지 설치했습니다.
한편 1880 년에 참모본부가 편찬한 <참모연혁지> 제 1 호에 의하면 관동국.관서국.총무과의 2 국 1 과가 설립기의 참모본부 본체로서 따로 반속으로서 지도과.편찬과.번역과 측량과.문고과가 설치되었다. 이들 과 중에서 특히 편찬과의 임무는 `본부 및 외국의 政誌地理에 관한 것과 아울러 각국의 병제, 내외 각지의 전사 등을 류찬휘집하고 혹은 본부장의 특명에 의해 일본의 편찬에 종사할 경우도 있는 것이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89
편찬과장인 대원리현은 1874 년부터 십수년간에 걸쳐서 청국 각지를 스파이짓하며 누비고 비 반출 계획에도 관계한 인물로서 `영희본`을 수집하고 비문 해독 작업의 직접적인 지휘자였다. ... ...하촌수개下村修介는 1875년 복원화승 대좌가 청국 공사관부무관으로 부임할 때 수원으로 동행하여 각지를 스파이짓하고, 뒤에 참모본부 관서국에서 편집한 <지나지지支那地誌> 총체부(1887 년 11 월 간행)와 동 편찬과 편집 <지나지지> 만주부(1889 년 10 월 간행)를 편집한 중심 인물이다. ...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89.78.79.80쪽
위에서 편찬과 과원 하촌수개가 편집하였다는 <지나지지/총체부.만주부>가 어떤 지도인지 알 수 없지만 <만주부>가 어떤 지도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지도가 있습니다. 이보다 14 년 전에 간행했다는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입니다.
조작지도- 아세아동부여지도(亞細亞東部輿地圖)
일본기원(紀元) 황기(皇紀)2535년, 명치8(明治8,1875) 년에 일본 육군참모국(陸軍參謨局)에서 발행한 일본의 공식 관찬
지도이다. 아세아동부여지도의 초판은 1874년에 제작되었으며 아래 지도는 그 이듬해에 제작된 두 번째 판 본이고 그 후,
수 십년에 걸쳐 여러차례 교정,증보되었다.
출처: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연구/고지도
위 <아세아동부여지도>의 지형지세 묘사는 대단히 정확한데 측량기법에 기초한 지도인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1875 년 이전의 청국 지도를 참고하고 일본 밀정들이 목측에 기반한 지리 정보를 토대로 일본 육군참모본부 측량.지도 부서에서 작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과 청국의 국경선 표시는 일본 명치왕군부의 희망사항을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조선과 청국은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접경하고 있었고 그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이든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지금의 청룡하이든 <아세아동부여지도>의 표시와 같이 지금의 중국 요녕성 지역만큼 떨어져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1875 년 간행하였고 청국과 조선의 지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였다면 아래와 같은 적색 실선의 조선.청국 국경선을 표시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선과 청국의 국경선이 위의 적색 실선과 같았다는 조선 측의 지도는 대한 땅에서는 이미 변조.조작되어 제시할 수 없지만 중국 땅 곧 송.명.청 시기의 고지도나 중국의 역대 정사라는 <요사><명사><청사고> 등의 지리지 기록 등 허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또한 1 세기 전에 간행된 서양지도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지도 - 송.요 시기 간행된 <지리도>
주) 청색1.3- 지금의 란하 2- 대릉하 4- 지금의 란하 정북쪽 지류 5- 혼하
고지도 - <성경여지전도>
- 위 성경여지전도가 묘사하는 범위
위와 같이 송.요 시기나 청 시기 요하는 지금의 란하 정북쪽 지류였기 때문에 한 시기의 요동군이였으며 이후 수.당.요.금.원.명 시기의 요동이였고 청 시기의 봉천 지역은 당연히 지금의 중국 하북.요녕성 경계 지역인 승덕.평천.반가구수고 지역이였습니다. 또한 조선.청국 사이의 국경선인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지금의 청룡하였습니다.
따라서 1800 년 대는 물론이고 청국이 멸망하는 1911 년까지의 조선.대한제국의 강역은 당연히 아래와 같았었고 조선이 건국된 1400 년 초나 훨씬 거슬러 올라 서기전 100 년 경의 지리도 아래와 같았습니다.
따라서 <아세아동부여지도>와 같은 엉터리 지도를 일개 국가의 공식 관찬 지도라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언급하는 것 자체가 몰염치한 짓입니다. 아래는 일본인의 변조.조작 손길이 닿지 않은 간행 당시의 원본 서양지도들입니다.
고지도- 인도와 중국지도 CARTE DES INDES ET DE LA CHINE
출처: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http://www.dokdohistory.com/kor/gnb02/sub06_02.do?mode=view&page=5&cid=40921&sf_cat1=CWS998
주) Netherland, Guillaume, Delisle, 1750, 62.7×60.9㎝
기욤 드릴(Guillaume Delisle, 1675– 1726)은 18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도 제작 가문을 형성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클로드 드
릴(Claude Delisle)은 법학과 지리학 그리고 역사학에 정통한 지도 제작자였다. 기욤 드릴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지
도수업을 받았으며, 1718년 최초의 왕실지리학자가 되었다. 그가 그린「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지도」는 최초의 세부적인
미국 내륙 지도로 알려져 있다. ... 이 지도는 원래 1705년 프랑스에서 동일한 명칭으로 간행된 것을 1750년 네덜란드에서 재
간행한 것이다. 지도의 내용은 1705년 지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고지도- 마닐라에서 아바츠까지의 중국해와 달단해 탐사도
Carte Générale des Découvertes faites en 1787 dans les MERS DE CHINE et DE TARTATIE ou depuis Manille, jusqu’à Avatscha par les Fregates Francaises la Boussole et l'Astrolabe
출처: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http://www.dokdohistory.com/kor/gnb02/sub06_02.do?mode=view&page=4&cid=40924&sf_cat1=CWS998
주) France, Philippe Triere, 1797, 49.8×69.2㎝
라 페루즈(Jean-François de Galoup, Comte de la Pérouse)의 항해 경로를 수록한 1797년의『라페루즈 탐사 아틀라스』( Atlas du Voyage de la Perouse)에 삽입된 지도이다. 판각자는 라 페루즈가 트리에르( Philippe Triere)이다. ... 라 페루즈 함대는 1797년 5월 25일 대한해협을 지났고, 5월 27일 당시 서양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았던 한 섬을 발견했는데, 그 이름을 이 섬을 발견한 천문학자 조셉 르포트 다젤레(Joseph Lepaute Dagelet, 1751-1788)의 이름을 따서 다줄레 섬이라 명명했다. ...
위와 같이 18 세기 서양지도에서도 조선의 서북쪽 강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과 요녕성 경계지인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 부근까지였고 조선의 서쪽 해안선 역시 지금의 압록강까지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 하류 지점까지였습니다.
그러면 일본의 공식 관찬지도라는 <아세아동부여지도>에 표시된 지금의 산해관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발해 해안선과 평행으로 이어져 지금의 동요하 합류지점까지와 그 동쪽으로 현재의 대한민국 헌법상 국경선인 지금의 압록강.지금의 두만강 까지의 어정쩡한 강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땅은 일본 명치왕군부가 역사적으로 무연고 지역으로 조작하여 갖고 싶은 땅을 표시한 것입니다. 즉 아래 <성경여지전도>에 표시한 적색 실선이 통과하는 지명을 동북쪽으로 약 2000 여 리 이상 확산.이동시키고 동시에 조선의 서북쪽 강역과 북쪽 강역을 지금의 압록강.두만강 남쪽 지역으로 구겨 넣은 결과 만들어진 그림일 뿐입니다.
결국 아래와 같이 조선의 서북쪽과 북쪽 강역을 삭제.축소시킨 것입니다.
육군참모본부 편찬.지도.측량과에서는 <아세아동부여지도>같은 엉터리 공식 관찬지도 간행은 물론이고 조선.청국.서양에서 간행된 원본 지도들을 변조.조작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조작지도 - 2007 년 12 월 31 일 한국보물 1537 호로 지정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위는 아래의 무제목 가칭 <백산도>를 변조한 것입니다.
위 두 개의 지도가 묘사하는 범위는 아래와 같은 것입니다.
또 아래 <황조일통여지전도>와 같이 지금의 란하 중류로 흘러야 하는 황하의 중.하류를 변조하여 지금의 서요하로 만들었습니다.
조작지도 -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부분도
주) 황조일통여지전도의 원도는 1832 年(淸.道光十二年),董方立、李兆洛에 의해 8권의 지도첩으로 제작된 이 후, 수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刻本제작으로 지도가 거칠기는 하지만, 청대에 제작된 전국적 지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지명과
산수(山水)명을 표기하고 있는 지도로 평가된다.
원도는 북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위 지도는 1865년(淸,同治4) 徑香閣 간행본으로 일본 쓰쿠바 대학 소장본이다. 원래는 8본의 방안지도를 20.6×14.1cm 크기의 한 권에 수록하여 총, 8권 (64본)의 지도첩으로 되어 있으나, 전체지도로 향고도가 편집하였다.
http://blog.daum.net/sabul358/18281872
위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되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는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정확하게 묘사하였을 <황조일통여지전도>의 황하 중.하류를 동남류가 아니라 동류하는 물길로 변조 즉 청 시기의 적봉에서 조양으로 흐르는 황하를를 동북쪽으로 3000 여 리 밀어내 아래 추정도의 흑색 실선과 같이 지금의 적봉에서 지금의 통요 지역으로 흐르게 변조하여 황하를 요하로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추정도 - 1832, 1865 년 간행 <황조일통여지전도>의 묘사 범위
주) 적색 실선 지역은 1832 년 <황조일통여지전도>가 묘사하는 범위이고 흑색 실선 지역은 1865 년 재간행 <황조일통여지전도>를 통하여 인식되기를 바라는 묘사 범위
일본 명치왕군부는 서양지도까지 가져다가 색칠하여 조선.청국 국경선을 변조하였습니다.
<예수회의 정보에 의거한 중국령 달단지도>
1732 년 프랑스인 진 밥티스트 당빌이 간행한 <달단령 중국 및 일본지도>를 독일 천문학자 요한 토비어스 마이어가 수정하여 독일에서 발행하였다고 함
출처: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http://www.dokdohistory.com/kor/gnb02/sub06.do?mode=view&page=9&cid=40915
한편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이러한 지도 조작 습작질과 유사한 일들은 당연히 조선.대한제국 땅에도 벌어졌습니다.
즉 <산경표>를 해설한 박용수는 일본인 소등(小藤文次郞.고또분지로)이 1900~1902 년 사이에 2 회에 걸쳐 총 14 개월 간 우리나라 전국을 답사하여 1903 년 `조선전도`와 `조선산악론`이란 논문을 발표했고 이어서 1904 년 일본 동경 환선주식회사에서 `한국지리`를 발간하였으며 1908 년에는 대한제국 땅에서 대동서관이 `고등소학대한지지`를 출판했는데 이것이 대한제국의 지리 교과서였다고 합니다.
또 그 `고등소학대한지지`에는 아래와 같은 편찬 취지의 글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산지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치 못하여 산맥의 논이 태반 오차를 면치 못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전문대가인 실양(실양창영失洋昌永 야쓰쇼에이)의 지리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 <산경표> >신경준 지음 박용수 해설 1990 년 푸른산 16 쪽
그런데 일본인 실양이란 작자는 `일본정치지리`를 저술했고 정치지리학이 전공이며 이 자가 위에서 말한 1904 년 출간된 `한국지리`의 저자라고 합니다.
결국 조선.대한제국의 서북쪽 강역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지역에 흐르는 지금의 란하 지류인 청룡하가 당시의 압록강이였기 때문에 아래 <대동여지전도>와 같이 지금의 압록.두만강은 당시의 조선.대한제국의 국경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축소조작지도 - <대동여지전도>
따라서 위 <대동여지전도>는 김정호가 아니라 일본인 소등.실양 등이 만든 것입니다.
고산자 김정호가 조선 지도를 제대로 만들었다면 아래의 대한제국 강역 모습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 1910 년 당시 대한제국 강역
결국 지금의 요하.압록강.백두산 위치는 원래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2000 여 리씩 이동된 것입니다.
일본의 이러한 조작질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식민사관을 탈피했다 할 수도 없거니와 만주국 땅인 장물을 지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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