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모든 이들이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비난하고 비판하려 한다.

비난은 당연한 일이지만 비판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윤내현처럼 낙랑군 위치가 진장성 동단 지점이라는 것이나,

리지린처럼 왕검성이 요동의 해성이라는 것이나,

윤한택처럼 고려 국경선이 요하 남쪽이라는 것 등등,

모두 식민사관과 동북공정 논리에 함몰되어 있는 꼴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북경에서 동쪽으로 차례대로 북운하.란하.대릉하.요하.압록강 등이 흐르게 표시된 지금의 <중국전도> 표시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에 맞서 비판하겠다고 하는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고?

 

서국의 25 개 정사와 모든 정사급 문헌.기록에도 북경 동쪽에는 차례대로 북운하.란하.대릉하.황하.요하.압록강 등이 흐른다고 섦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두번째 정사인 <한서/지리지> 현토.요동 군.현 주석에는 요동군 지역으로는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 및 백랑수,요수(<수경주>의 소요수),대량수 등이 흘러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25 번째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에는 봉천성 금주부 금현,반산구 및 봉천부 해성.요중현으로는 대요수 곧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황하와 역시 송.거란 시기부터 염난수를 개칭한 요하 및 백랑수.대릉하, 요수.혼하, 대량수.태자하 등이 흐른다고 설명되어 있다. 

즉 한 시기의 요동군 위치가 청 시기의 봉천성 금주부와 봉천부 접계 지점이라는 얘기다.

 

또한 <한서/지리지> 기록에는 낙랑군에는 820 리 길이 열수가 흐른다고 설명.기록되어 있으며,

역시 <청사고/지리지>에도 봉천성 봉황성직예구 동쪽 끝에는 이조선의 압록강이 흐른다고 설명되어 있다. 

즉 낙랑군은 요동군 동쪽에 설치되었었기 때문에 대요수.염난수 동쪽에는 당연히 열수가 흘러야 한다.

즉 요하 동쪽에 이조선 시기의 압록강이 흘렀다. 

 

위와 같은 물길들이 현 <중국전도>에 엄연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어떻게 낙랑군을 산해관.갈석산 위치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산해관.갈석산이 있다는 곳은 한 시기의 요서군 지역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한 시기의 요동군이나 청 시기의 봉천성 금현.반산구.해성현.요중현 등 4 개 지점의 위치다. 

즉,

<후한서/군국지> 요동.현토군 주석에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4000 리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고,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금주부 기록에는 봉천성 치소인 성경 심양 승덕현에서 서남쪽으로 금주부 치소가 있는 금현까지는 490 리 떨어졌다고 설명되어 있으며, 봉천성의 승덕현에서 서남쪽으로 경사 곧 지금의 북경까지는 1470 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지고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980 (1470-490) 리 떨어진 곳이 과연 어디일까?

또 그곳으로 대릉하.황하.요하.혼하.태자하 및 패수인 어니하가 흘러드는 곳은 어디일까?

참고할 만한 자료를 제시하자면 지금의 북경 북쪽 창평과 거용관 지역에 설치된 상곡군 곧 <후한서/군국지> 상곡군 주석에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200 리 떨어진 곳이라 기록되어 있다.

 

결국 서한이 건국된 서기전 202 년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의 요동군 및 봉천성 금주부.봉천부 위치와 그 지역을 흐른 물길은 아래와 같았다. 

 

그런데 1870 년대 초 일본 명치왕이 참모부에 지시했는지 혹은 참모부의 조작질을 용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쨋든 1875 년 일본명치왕참모부가 제작한 일본공식관찬지도라는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와 같이 청국의 동북 국경선을

지금의 산해관 지점 쯤과 동북쪽으로 지금의 노호산으로 이어져 지금의 서요하 동쪽 끝까지와 북쪽 국경선은 지금의 서요하 경유지와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다.

즉 거의 역사 사실에 가까운 표시다.

 

    

그러면 지금의 압록강과 지금의 노호산 사이인 지금의 요녕성 전체 영역은 대체 뭐란 말일까?

청국과 이조선 국경지역에는 청국의 책문과 의주.압록강 사이에 공지 120 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단 말일까? 

 

이후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와 1948 년 이후의 서국지도에는 한 시기부터 청 시기까지의 대요수.염난수 곧 황하.요하를 지금의 서요하와 지금의 요하라고 표시하고 있다.

 

 

결국 공식적으로 1934 년부터 요하가 동쪽으로 3000 리 쯤 옮겨진 것이고 당연히 요하 하류 주변의 모든 지명도 동쪽으로 3000 여 리 씩 옮겨진 것이다. 당연히 이조선의 압록.백산.토문강 등도 동쪽으로 3000 여 리 씩 옮겨졌고 명백한 조선강역 강탈이다. 

 

한편 주일공사 수행원이였다는 양수경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역사 수업을 받았는지 1900 년 황당한 아래의 추정.습작지도를 그려냈다.

 

- <역대연혁지도/요지리도>

 

 

청 시기의 황하潢河는 한 시기의 대요수였고 상류에서의 몽고어로는 錫拉穆楞下였다. 황하는 발원지에서 동남류하여 직예성 조양부의 건창현과 조양부 북쪽을 지나 봉천성 신민부 진안현과 금주부 광녕현.반산구를 차례로 경유해야 한다. 봉천성의 해룡부에서 발원하여 길림성 이통주를 경유한 후 다시 봉천성 창도부.신민부.봉천부를 차례대로 거쳐 서쪽 지류가 반산구로 흘러든 요하와 요하의 상류 서쪽 지류인 西拉木倫河와는 판이한 물길이다. 즉 양수경이 황하.석랍목릉하를 서랍목륜하라 표시하였다는 것은 땅사기꾼이라고 자인하는 꼴이다. 

 

위와 같이 일본의 지도조작 작업에 동참한 것이 명백한 양수경의 지리 인식은 이후 고힐강의 뚱딴지같은 고사변학파의 지지를 거쳐 1983 년 담기양의 <역사지도집>으로 전해진다.

 

결국 삼국.남북국.고려.이조선의 서북 강역은 물론이고 단군이 통치한 조선.부여와 천군을 숭배한 진辰.韓 지역까지도 원래 위치에서 동쪽으로 3000 여 리씩 옮겨져야만 한다. 즉 요하문명지가 서국 시조라는 황제 헌원이 살던 곳이 되는 것이고 이후 모용.우문.탁발선비와 해.거란 터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이 저질러야 했던 식민사관과 서국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목적이다. 

 

이러한 조작.이동된 지리와 이를 암묵한 자들의 저의를 깨닫지 못하면,

윤내현처럼 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제 위치에서도 서쪽 구석으로 쪼그라든 낙랑군 조차도 지키지 못하여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요서군 지역에 옮긴 명목상의 낙랑군 위치라고 억지 해석하며 위안삼으려 한다. 

 

또 이조선의 압록강 북쪽에 흐르는 서국 기록의 소요수.혼하가 고구려.고려의 압록이였고 그 위치도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 폭하인 것도 모르고 지금의 요하 남쪽이 고려 국경선이라고 주장한 인하대고조선연구소는 또 어떤가? 

 

참으로 무식하고 한심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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