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곡군에서 동쪽으로 요서군까지

 

이번 글부터는 요하가 지금의 요하가 아니고 지금의 란하였다는 것을 중국 고대 정사 기록을 통하여 검증하여 백제 흥망지와 낙랑군 위치가 지금의 산해관 약간 북쪽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위 추정도와 같이 1910 년 대한제국 멸망 당시 요하는 지금의 란하 정북쪽 지류였습니다. 이러한 지리는 지금부터 2200 여 년을 소급한 부.준왕 조선 시기 서기전 200 년 전후한 당시에도 비슷했습니다. 즉 전한 시기 요동군 망평현을 경유하는 1250 리 길이의 대요수는 지금의 란하 서북쪽 지류였었고 정북쪽 지류는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였습니다. 이후 10 세기 초 거란.요국 시기에 서북쪽 지류인 대요수는 황하로, 정북쪽 지류인 염난수는 요하로 개칭되었으니 결국 청국이 멸망하는 1911 년까지 약 2100 여 년 동안 요하 하류는 같았지만 그 상류에서 1000 여 년은 서쪽 지류로, 이후 1000 여 년은 동쪽 지류를 요하라고 명명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고대사 지리 비정에서 가장 혼동스러워하는 요서.요동.현토.낙랑 4 개 군 위치도 지금의 요하 하류 유역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중.하류 유역에 있었고 백제 또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 지역에서 건국하고 멸망하였던 것입니다.  

거의 모든 한국인들에게는 낯설은 지리이겠지만 중국 역대국들의 주요 지리 기록을 통하여 검증해 보겠습니다.

 

먼저 지난 2100 여 년 동안 편찬된 수많은 지리지에 엄청난 량으로 설명된 내용들을 한 구절로 표현하면서도 정확한 기록이 있는데 바로 중국 4 번째 정사인 <후한서/군국지>의 아래와 같은 유주 11 국.군 곧 탁군.광양군.대군.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현토군.낙랑군.요동속국 주석의 리 수 기록입니다. 

 

涿郡 高帝 洛陽東北一千八百 

                  탁군은 고제 때 설치되었고 (위치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1800 리 (떨어져 있다.)            

廣陽郡     高帝置 爲燕國 昭帝更爲郡 世祖省幷上谷 永平()8年復 薊本燕國 刺使治[]

[]漢官曰 洛陽東北二千 

代郡 秦置 洛陽東北二千三百           

上谷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二百里 

漁陽郡  秦置 洛陽東北二千  

右北平郡  秦置 洛陽東北二千三百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

玄莵郡 秦置 洛陽東北四千里

樂浪秦置 洛陽東北五千里

遼東屬國 ... 洛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첫번째 탁군 기록만 번역했는데 번역이랄 것도 없는 아주 간단한 문장이며 광양군 이하의 원문 뜻도 탁군과 똑같은 문장 구조이기 때문에 맨 끝의 요동속국 내용도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3260 리 떨어져 있다`라고 새기면 됩니다.

 

위 유주 전체 기록을 보면 약간 의문도 들 것입니다. 즉 11 개의 국.군 위치는 인접하여 설치하였을텐데 낙양에서 1800 리에서 5000 리까지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하는 점입니다. 

 

우선 지금의 북경에 설치되었던 광양군까지를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2000 리 떨어진 지점으로 설명하였고 동서 방향으로 인접하여 설치된 탁군.대군.어양군.우북평 등 4 개 군도 2000 리 대로 기록되어 일견 납득할 수 있는 리 수 기록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곡군의 경우는 다릅니다. 즉 상곡군은 탁군.광양군 북쪽에 설치된 군이였고 세 군은 접경하였을 것인데 낙양에서 상곡군까지는 광양군까지 2000 리를 훌쩍 뛰어 넘어 3200 리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로 낙양에서 우북평.요서 2 군까지는 2300 리, 3300 리라며 역시 인접한 군임에도 불구하고 1000 여리 차이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한편 요서군 동북쪽에 설치되었을 요동.현토군까지의 리 수는 납득할 만하고 낙랑군까지의 리 수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가장 동북쪽에 설치되었고 또 그만큼 떨어졌을 것이라 여긴다면 일단 문제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접경.설치된 것이 확실한 상곡.광양과 우북평.요서 등 2 개 지역의 4 개 군의 리 수 주석입니다. 4 개 군은 물론이고 유주에 속한 모든 군의 크기는 대략 비슷하여 동서 폭과 남북 길이는 대략 200~300 여 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4 개 군의 거리 차이는 최대 300 여 리 안팎에 그쳐야 합니다. 혹 남북 길이가 300 리 정도를 훨씬 넘는다고 하여도 1000~1400 리 차이가 난다는 것은 납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2000 리 대든 3000 리 대든 어느 한 쪽의 리 수 기록이 잘못된 것입니다. 아마도 후대에 잘못 판각하여 간행하였거나 또는 잘못 필사한 것을 인용하였거나 아니면 고의적으로 조작했거나 등등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 낙양으로부터 떨어진 리 수가 2000 리 대의 군 중에서 지금의 북경 서.남쪽 지역에 설치되고 한 4 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탁.대군은 검토에서 제외하고 우선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 5 개 군 위치에 대해서 간단하게 검증하겠습니다. 

 

2000 리 대의 광양.어양.우북평 3 군과 3 군의 서쪽에 설치된 상곡 및 우북평 동쪽에 설치된 요서 등 합 5 군의 대표적 속현 혹은 치소는 거용.계.어양.무종.비여였습니다. 이 속현들은 후대들어 계는 경사 곧 지금의 북경, 어양은 밀운 혹은 삼하로, 무종은 옥전으로, 비여는 노룡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위치를 2009 년 간행된 중국전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위 황색 추기 표시와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200 리, 3300 리 떨어졌다는 상곡.요서군과 그 사이에 위치한 광양.어양.우북평 3 군까지의 2000 리, 2000 리, 2300 리 주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잠시 리 수 기록을 놓아 두겠습니다.

 

한편 전한 시기부터 난수로, 거란.요 시기 이후 란하로 개칭된 물길은 <수경주/난수> 기록과 같이 발원지에서부터 일관되게 동남류하면서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 지역을 경유하기 때문에 위에 황색 추기 표시한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의 추정 위치는 크게 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한서/지리지> 기록과 같이 거용관 부근에서 발원한 습여수가 동남류하며 상곡군 창평을 지나 어양군 로현으로 흘러가 750 리 길이의 고수로 합류되었습니다.  

 

 

따라서 <후한서/군국지>의 간단한 리 수 주석을 근거로 추정한 후한 시기의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 등 5 개 군 위치는 최소한 위 중국전도에 추기한 것과 같아야 합니다. 아래는 복잡한 중국전도 표시를 간결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또한 아래 지도는 중국 인터넷에 떠도는 조위 시기 유주 지역 추정 지도인데 상곡.광양.어양.우북평 등 4 개 군의 위치를 추정하는데 충분히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낙양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요서군보다 불과 300 리 더 먼 요동군 위치는 어디여야 할까요? 한.중.일 역사학계는 지금의 요하 하류 지역이 요동군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요서군의 동쪽 끝 지점이였던 산해관 곧 지금의 산해관이 원래의 산해관 위치라고 일단 가정하면,

지금의 산해관에서 요동군 설치 지역이라는 지금의 요하 하류까지를 300 리라고 할 수 있나요?


<한서/지리지> 기록과 같이 요동군으로  2100 리 길이의 염난수와 1250 리 길이의 대요수가 흘러들어야 하고 또한 요서군 서쪽에 설치된 우북평군에서 발원하는 백랑수가 동북류하면서 요서군 북쪽 지역에 설치된 유성현 북쪽 지역을 경유한 후 동남쪽으로 크게 휘어 요동군의 남쪽 지역이며 대요수의 하류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요하 하류에서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를 찾을 수 있나요?또한 <후한서/군국지>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2300 리 떨어진 우북평군에서 발원하는 백랑수 곧 거란.요국 시기 이후 개칭된 대릉하가 지금의 대릉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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