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와 나무꾼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오는 설화 중에 나무와 선녀꾼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은 산속 연못에 내려온 선녀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우연히 본 나무꾼이 옷을 감추어, 하늘로 오르지 못한 선녀와 아이를 낳고 살다가 아이가 자란 후 옷을 찾아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입니다. 

 

이와 똑같은 설화가 여진족 중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게 있는데, 1777 년 청 건륭제가 아계.우민중 등에 명하여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부족1/만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각건대, 만주는 윈래 부족의 이름이다. 삼가 <발상세기>를 상고해 보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장백산의 동쪽에 포고리산이 있고, 그 산 기슭에 못이 있었는데 포고리호라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가 그 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어떤 신작이 막내 선녀의 옷에 주과朱果를 물어다 놓았다. 막내 선녀는 그 주과를 입속에 물고 있다가 문득뱃속으로 들어가 곧 임신을 했다. 뒤이어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능히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자태와 용모가 기이했다. 아이가 커가자 선년는 주과를 삼키게 된 사연을 알려주고, 이내 그에게 애신각라라는 성씨를 내려주고, 이름은 포고리옹순이라고 하였으며, 그에게 작은 배를 내어 주고, 다시금 ``하늘이 너를 태어나게 한 것은 어지러운 나라를 평정시키기 위한 것이니 어서 가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선녀는 마침내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흐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어느 물가에 이르러 버드나무 가지와 쑥을 꺾어 깔개를 만들고 단정히 앉아서 때를 기다렸다. 그때 장백산 동남쪽 악모휘라는 지역에 삼성이라는 곳이 있어 서로 추장이 되겠다고 다투면서 싸움질을 하고 서로 적이 되어 죽이곤 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물가로 물을 길러 갔다가 돌아와서 뭇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싸우지 마세요. 제가 물가에 물을 길러 갔다가 어떤 사내 아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습을 살펴보니 범상한 사람이 아닌 성싶었습니다. 하늘이 이런 사람을 허투루 태어나게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아이한테 가서 물으니 ``나는 선녀의 소생으로 당신들의 혼란을 평정시키려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이름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뭇사람들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성인인데 그냥 걸어가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서로 손을 잡아 가마를 만들어 집까지 데리고 왔다. 삼성 사람들은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논의하고, 결국 자기 딸을 시집보내어 패륵으로 받들었다`

 

장백산 동쪽 악다리에 살았으며 나라 이름을 만주라 하였는데 나라의 터전을 맨 처음 열었던 곳이므로 국서를 가지고 이를 고증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설화 내용과 초반에는 별반 차이가 없고 후반들어 아이가 성장하면서 벌이어지는 일들이 완연히 다르군요. 저들의 시조설화라고 하는 만큼 아마도 우리의 나무와 선녀꾼 이야기가 원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쨋든 청나라의 시조 설화 배경은 장백산입니다. 

 

그러면 만주족 시조설화에는 장백산.포고리호.악모휘.삼성.악다리 등 뚜렷한 지명이 나타나는데, 과연 이들 지명들을 모두 추적.비정할 수는 있을까요?

 

 

추정지도 - 장백산과 포고리산(모란령)

 

 

 

 

저 지명들은 모두 청 시기의 길림성 지역에 있으며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와 고지도 <성경지여전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화 내용에서 언급되었듯이 시조의 탄생지는 장백산 동쪽에 있는 포고리산 포고리호 부근이고 물길을 따라 내려갔으니 물길 가에 악모휘.삼성.악다리성이 있어야 하는데 <청/지>에서는는 악다리성을 길림성에서 동남쪽으로 470 리 떨어진 돈화현이라 하며 악모휘,아막혜는 길림부에서 동쪽으로 300 리 떨어진 액목현이라고 합니다.

 

또 악다리성인 돈화현 부근을 흐르는 물길은 모란하라 하며 모란하의 발원지는 돈화현 서남쪽에 있는 모란령牡丹嶺인데 모란령 동북쪽에서 발원한 모란하가 북쪽으로 흘러 길림성 동쪽 380 리 떨어진 청 시조가 거주했던 아막혜俄漠惠 .鄂謨和인 액목현額穆縣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휘어 길림성에서 동쪽으로 800 리 떨어진 영안부寧案府 즉 영고탑의 경박호鏡泊湖로 흘러든다고 합니다. 설화에 등장하는 포고리산은 꼼짝없이 모란령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청/지>에는 길림성 치소인 길림부에서 서남쪽으로 820 리 떨어진 곳에 성경 심양이 있고 심양에서 서남쪽으로 1470 리 떨어져 경사 즉 북경이 있다고 하니 길림에서 북경까지는 2290 리 거리가 됩니다.

 

한편 길림부에서 동남쪽으로 600~1600 리 떨어져 있다고 문헌마다 달리 기록된 장백산 북쪽 기슭과 황구에서 5.4.3.2 도백하,낭낭고하가 발원하고 합하여 서북쪽으로 흐르다 서쪽, 다시 북쪽으로 휘어 흐르며 두도백하,휘발강 등 수많은 지류들이 흘러와 송화강을 이룬다고 하고 돈화현의 모란령 액목현 서쪽을 지나 길림부로 흘러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송화강은 발원지인 장백산과 서쪽의 성음길림봉 그리고 동북쪽의 모란령 사이를 관통하여 북쪽으로 흐르니 만주족 설화와 같이 모란령이 장백산 동쪽에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추정지도 - 장백산?

 

 

 

 

위 추정지도는 <청사고/지리지> 기록을 바탕으로 그린 것입니다. 장백산 위치는 봉천성 치소인 성경 심양에서 동남쪽으로 980 리 떨어진 탑전이란 장백부 치소 북쪽에 있다고 하였고 탑전에서 서북쪽으로 520 리 떨어진 무송현에서는 동쪽에 있다고 하였고 탑전에서 동북쪽으로 400 리 떨어진 안도현에서는 서쪽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주족들은 시조 포고리옹순이 아막혜 지역으로 강을 타고 내려간 이후 다시 상류에 있는 악다리성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서남쪽에 있는 흥경으로, 다시 서북쪽에 있는 성경으로 차례대로 거주지와 도읍을 옮겼습니다. 이러한 이주 과정에서 만주족에게 특별히 각인된 산은 악다리성 서쪽에 있는 동서 1000 여리에 이른다는 동.서 합랍파산, 고열눌와집, 납로와집, 용강, 백산까지 이어진 길고 첩첩한 산들 중에서도 거주지와 천도 노정에서 늘상 마주치며 녹녹치 않게 거대하고 높은 산이였을 것입니다.

 

동서 1000 여리에 이른다는 산 전체는 실제는 약하게 서북방향에서 동남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요하와 송화강을 가르는 분수령 역할을 하였고 이 중에서 중간 부분인 납록와집과 용강 등을 서남쪽으로 넘으면 태자하와 혼하 발원지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흥경에 이를 수 있는 지형입니다. 만주족은 바로 이 흥경으로 이주한 이후에 일어섰다고 하며 이곳에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웠습니다. 

 

위 추정지도에 표시되어 있듯이 악다리성과 흥경 사이 노정에 흔치 않은 산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휘남직예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省東南六百八十裡 明輝發府 今口北三十五裡有輝發城 宣統元年 分海龍府東南八社 設治大토川 置口...北輝發城山卽聖音吉林峰 又北輝發江 自海龍合一通河入 東流 右受三通黃泥蛤馬蛟河入吉林

봉천성 치소인 성경 심양에서 동남쪽으로 680 리 떨어졌고 명 시기 휘발부가 설치된 곳이며 지금의 휘남직예구 북쪽 35 리 떨어진 곳에는 휘발성이 있다. 선통 원년(1909) 해룡부 동남쪽에 있는 팔사를 나누어 대토천에 치소를 두고 구를 설치했다. ... 북쪽에 휘발성산인 성음 길림봉이 있고 그 북쪽에서 휘발강이 발원하는데 해룡부에서 흘러오는 일통하와 합쳐 동쪽으로 흘러가며 오른쪽에서 삼통.황니.합마.교하 등의 지류를 받아들이며 길림성으로 흘러간다. 

 

성음길림봉입니다. 성스럽게 불러야 한다는 소린지 성인이 불렀다는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성음이란 문구가 산이름 앞에 붙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길림성 서남쪽에 위치하고 동서1000 여리 분수령을 넘어 선 같은 곳이 봉천성 영역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이 성음길림봉이 있는 곳은 봉천성에서 동남쪽으로 680 리 떨어진 휘남직예구란 곳으로 길림봉에서 발원한 휘발강은 동쪽으로 봉천성 경계를 넘어 길림성 지역으로 흘러가 길림부에서 남쪽으로 270 리 떨어진 화전현에이르러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으로 합쳐진 후 돈화현과 액목현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흐른다고 합니다.

 

만주족들은 악다리성에서 서남쪽에 있는 성음길림봉을 주변을 거쳐 분수령을 넘어 흥경 지역으로 드나든 것 같습니다. <청사고/지리지>에서 성음길림봉이라 한 산을 <발상세기>나 <만주원류고>에서는 장백산이라 한 것 같습니다. 이 성음길림봉일 것으로 보이는 산이 1680 년 경 편찬된 <성경통지>에 실린 `성경지여전도`에는 장백산으로 표시되고 그 동남쪽에 압록강과 두만강이 발원하는 산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고지도 - 성경지여전도

 

 

주)                                                                                  장백산 압록강 ?산 두만강

 

 

 

위 성경지여전도에 장백산과 압록강과 두만강이 발원하는 이름 없는 산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산은 당연히 백산이며 백산 북쪽 기슭의 물길이 표시되지 않았지만 <청사고/지리지>의 장백산은 백산을 가르키며 백산에서 발원하여 북쪽 길림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산 이름 앞에 성음聖音이란 흔치 않은 이름을 붙친 이유가 바로 시조 설화에 언급되고 강희.건륭제가 말한 서국 중원 지맥의 시작이라고 해석한 장백산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 산이름 앞에 성음이라 덧붙친 것 같고 장백산은 남의 나라 땅에 있는 산에다 씌워 버렸습니다. 

 

<성경통지>를 편찬한 삼십 여년 후 1712 년 오라총관 목극등이 경계선을 획정한다고 하면서 장백산이 아닌 후조선의 백산 위에다 정계비를 세웠는데 장백산보다 좋아 보였거나 땅 욕심이거나 간에 아무튼 어정쩡한 대처로 국경선 지역의 땅을 빼앗긴 것은 분명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백산보>에서, 서북쪽 호곤퇴로부터 이어 온 백산의 서쪽 줄기는 고열눌와집.납록와집으로 이어지고 또 장백산이 되어 동남쪽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장백산에서 또 동남쪽으로 300 리 떨어진 곳에 백산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300 리 장백산 길을 빼앗긴 후유증

 

 

그러면 후조선 숙종 38 년(1712) 청나라 오라총독 목극등이 세웠다는 백두산정계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목극등이 백산에 오른 것은 오로지 땅 욕심일 뿐입니다. 만주족은 악다리성에서 길림봉을 거쳐 동서1000 여리 사이에 있는 지름길에 가까운 낮은 고개를 넘어 흥경지역으로 넘나들며 요동지역과 교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지름길 격인 낮은 고개가 혼하의 발원지인 납록와집과 동남쪽으로 300 리에 걸쳐 이어 뻗어 있는 장백산 또는 용강 사이에 있었을 것입니다.

 

오라총관 목극등은 후조선의 접반사와 함경감사를 연로하다는 핑계로 등정을 만류하고 백산 동남쪽 두만강 가에 있는 무산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후조선의 통관.군관 만을 대동하고 백산에 올랐습니다. 이 당시는 청나라 강희제가 60 년을 통치하면서 말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강희제 후반기 들어 집중한 것 중 하나가 만주지역에 대한 안정화와 보존이였던 것 같고 목극등은 강희제의 뜻에 따라 후조선과의 국경선 지역을 최대한으로 넓힌 충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도에서도 보이듯이 장백산은 명확하게 백산과 구별 표시되어 있으니 만약 세력이 대등하여 상식적인 경계를 획정한다고 하고 후조선으로서도 최대한으로 양보한다고 하여도 압록강 대안의 산마루를 경계선으로 했어야 합니다. 여기의 압록강은 삼수 압록이며 경계선은 삼수압록 서쪽 산마루인 용강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나간 한 시기의 개마대산이며 청인들은 노령산맥.노령.마천령.천산.천산산맥이라 하였고 후조선에서는 노령산맥은 밟아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노령 서쪽의 산들만을 회령.청석령.낭자산이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용강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개마대산의 상단 지역에 고구려의 국내 위나암성,국내성, 횐도성 등이 있었으며 서남쪽에 있는 태자하 상류 계곡으로 내려가면 흥경 지역이며 고구려 시기의 비류수와 흘승골성이 있었습니다. 또한 위나암성.국내성 지역 등을 경유하는 파저강이 동남류하여 압록강으로 합쳐지는 곳에 환도성이 있었고 부근에 장수왕이 조성한 광개토왕릉과 비가 있었습니다. 이곳이 청나라의 흥경부 통화.회인.집안현입니다.

 

결국 백산에 정계비를 세우면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압록강으로 경계를 확정하면서 압록강 서쪽 대안의 능선까지의 고구려 중심 지역을 모두 삐앗긴 것입니다.

 

그러면 백산의 북쪽 지역은 어떨까요?

 

고려 시기, 윤관이 17 만 대병을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내고 선춘령 아래의 공험진을 비롯하여 9 성을 쌓았는데

당시의 진격로는 서경 위봉루에서 현종의 배웅을 받고 부원수 오연총은 장춘구 즉 회인현에 있으며 노령산맥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물길들이 가장 서쪽에서 모여 이루는 파저강이 흐르는 지역을 통과하였습니다.

 

<고려사>

예종 2 년에 윤관을 원수로 삼고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여진을 쳤다. 왕은 서경에 행차하여 위봉루에 나가서 이들을 보냈다. 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에 주둔하고.....윤관은 스스로 군사 5 만 3 천명을 거느리고 정주 태화문을 나섰다. ...병별감이부윈외랑 양유송 등은 수군 2600 명을 거느리고 도련포를 나섰다. ....

 

또한 수군 2600 명이 도련포 즉 서경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동떨어진 동계에서 출진하였다는 것은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 군량이나 병기를 공급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선춘령이 두만강 북쪽 700 리에 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또한 임언이 지었다는 <英州記>에,

삼군이 분발하여 소리치니 하나로써 백을 당해서, 머리를 벤 것이 6000 여 며이요 항복한 자가 5000 여 명이었으며 넋이 뻐져 달아난 자는 셀 수가 없었다. 여진은 그 땅이 사방 300 리다. 동쪽은 큰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끼였으며 남쪽은 장주와 정주의 두 주에 접해있다.  산천이 수려하고 땅이 기름지니 본래 옛 고구려 땅이다.

라는 기록들을  함께 검토해 보면, 고려군 17 만의 진격로는 개마대산 상단을 향하고 이후 <청사고/지리지>가 기록한 300 리 길이의 용강 즉 <만주원류고>의 장백산 중간 지역을 북쪽으로 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용강을 북쪽으로 넘지 않는다면 동남쪽으로 뻗어 있는 백산 줄기를 타고 백산 동북쪽에 있는 두만강까지 진격한다는 것은 백산이 험하기 때문에 행군상으로도 불가능하고 이 지역이 산천은 수려하겠지만 땅이 기름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고려군의 진격로는 자연스럽게 백산 북쪽에 있는 송화강 상류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여 백산 동북쪽에 있는 분계강 지역을 거쳐 선춘령 지역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추정지도 - 윤관 원수의 17 만 고려병 진격로 추정도

 

 

 

 

위 고려병 진격 추정로와 같이 서경에서 청나라 흥경부 회인현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파저강을 따라 장백산과 백산의 중간쯤 지역에 후조선과 청과의 국경선이 그어졌어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백산으로 정해지는 바람에 백산 북쪽의 고려병 진격로 사이에 해당하는 지역을 잃었다고 당시  역사와 지리를 아는 유사들이 수백 리의 땅을 잃었다고 한탄해 마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백산에 정계비를 세우게 되는 조짐은 그 이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후조선 개국 초기부터 삼수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는 태조 이성계를 흠모하여 복속을 청하며 관작을 받은 수많은 여진족들이 거주하여 왔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알력이 생기고 영역 다툼도 일어나고 후조선과 명나라 국경지역도 침범하고 북경으로 향하는 후조선의 사신단을 위협하게 되니 후조선이나 명으로서는 당연히 주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종 시기에 이르러서는 두만강 지역에 거주하던 동맹첩목아가 칠성야인들로부터 살해되고 조카인 범찰과 그 종족이 흩어지면서 요동 동쪽의 큰 협곡지대인 흥경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러한 여진인들의 정세 변화에 맞추어 세종은 동맹아첩목아 부족의 거주지인 알동 부근 지역을 되찾아 두만강 변을 따라 6 진을 설치하여 조종의 땅을 다시 확보하고 삼수 압록강 연안에는 4 군을 설치하여 국경을 획정.안정시켰었습니다. 

 

이후 요동 흥경지역의 여진족 이만주 부족괴 이주해온 범찰 등이 수시로 회령에서 백산까지의 국경선 지역을 남쪽으로 넘어 삼수 압록강을 건너와 백성들을 살상하고 재산을 노략질하였고 명의 요동 변경도 노략질하자 명측은 요동지역에 군사를 증강하였고 이윽고 후조선측의 사신로 변경 요청을 계기로 국경선을 넘어서 후조선 영역에까지 진.보를 설치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후조선에서는 북경으로 향하는 사신단이 동팔참 지역에서 여진족의 위협과 호환을 당하자 안전한 사신행로를 새로 개설해 줄 것을 명에 요청하였는데 명 조정은 변경을 불허하였고 이 건을 빙자하여 요동 연산관에 주둔했던 명나라 군사들이 북경으로 향하는 후조선의 사신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세워 국경선인 회령을 남쪽으로 넘어와 명나라와의 흔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후조선의 진보까지 철수시킨 지역인 봉황산에 저들의 진보를 쌓고 군사를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예종 시기 양성지가 상소하여 이를 막아야 한다고 극력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산관에서 남쪽으로 240 리 떨어진 봉황산에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하는 것을 용인하게 되었고 봉황성과 진이보.진동보의 축성이 완성되자 성종 시기에는 사은사까지 보낼 정도로 정신 없이 사대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세종 20 년(1438)>

...이전에 본국 사신은 동팔참 길로 왕래하였는데, 본디부터 산이 높고 물이 험하며 한가닥 물이 굽이쳐서 이 물을 무릇 여덟 번이나 건너야 하며, 여름 장마에 물이 넘칠 때에도 배[舟]가 없고 겨울이면 얼음이 미끄럽고 눈이 많이 쌓여서 사람과 말이 많이 넘어져서 상하게 됩니다. 개주(開州)·용봉(龍鳳) 등 참은 인가가 아주 없고 초목이 무성하여, 근년에는 사나운 범[虎]이 자주 뛰어나와서 몹쓸 짓을 하므로 오가는 사람과 말은 고생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동 관하인 연산 파수막[把截] 남쪽에서 자유채(刺楡寨) 파수막경유하여 도사로 가는 길에는 백성들이 흩어져 살고, 또 산과 물이 험하지 않으니, 만일 황제에게 전달하여 이 길로 왕래하게 되면 편리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예종 1 년(1469)>

 

...1. 장장(長墻)에 대한 의논입니다.

 

...요동(遼東)의 동쪽 1백 80리는 연산(連山)을 경계로 하여 파절(把截)을 삼았으니, 성인(聖人)께서 만리를 헤아려 밝게 보시는데 어찌 토지가 비옥하여 가축을 기르거나 사냥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을 모르고서 수백 리의 땅을 버려 그 곳을 비게 하였겠습니까? 진실로 동교(東郊)의 땅은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어 양국(兩國)의 강역(疆域)을 서로 섞일 수 없게 하였으니, 만약 혹 서로 섞인다면 흔단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건대, 중국에서 장차 동팔참(東八站)의 길에 담장[墻]을 쌓아서 벽동(碧潼)의 경계에 이르게 한다고 하니, 이는 실로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바이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본국 평안도(平安道)의 백성 가운데 부역(賦役)에서 도망한 자가 저곳에 흘러 들어갔으니, 동쪽으로는 개주(開州)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대개 고을의 취락(聚落)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몇천만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 임진란 직전에는 율곡 이이가 명 측이 봉황성을 넘어 의주 압록강 대안까지 넘보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극력 상소하였지만 조정은 느긋하다 못해 무대응으로 일관했습니다. 임진.정유왜란과 정묘.병자호란 등으로 파국의 경험을 한 이후에도 청을 속으론 경멸했을지언정 외형상.실질상으로 이미 망한 명과 청에 사대의식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사회강>을 저술한 임상덕이나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 등은 삼국사 이후를 서술하면서 중국의 나라들이 조선 땅을 침입할 때는 토벌이라 써야 하고 조선이 중국을 침입할 때는 범犯이라 써야 한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후조선과 명이 임진.정유왜란을 겪은 반면에 요동지역과 후조선 4 군 사이 지역에 거주하던 명 건주위도사 누르하치가 이끄는 부족은 주위 제세력들을 공략하거나 포섭하여 복속시켜 날로 강성해졌습니다. 장백산 동쪽 모란령 아래에서 시작하여 아막혜 지역을 장악하고 다시 거슬러 올라 악다리성을 세우고 만주라 한 후 서남쪽으로 장백산을 넘어 심양.요양으로 가는 길목인 혁도아랍 즉 흥경에 둥지를 틀고 차례로 명나라 심양.요양 지역을 공략하여 점령한 후 명나라 배후세력인 후조선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북쪽으로 몽고를 정벌한 후 입관하여 청을 세운 것은 불과 시조로부터 9 대, 약 270 년 전후의 일이였습니다.

 

후금이 일어나는 시기까지도 후조선 조정에서는 미개한 야인이라고 얕보았고 세종 이후 태평성대에 취하여 문약해지고 있었으며  임진왜란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였고 게다가 반정까지 일어나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시 강화에 맞서 후금을 상대한다고 하여도 반정 공로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군병으로는 역부족이였을 것입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각지의 군병이 한양으로 집결하였지만 그 숫자나 병기는 보잘 것이 없었나 봅니다. 아마도 광해조가 명의 요청으로 강홀립에 딸려 보낸 일만의 군사가 후조선의 전병력이였을 정도인 것 같고 그만큼 후조선은 문약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명이 멸망한 후에도 대보단을 설치하는 등 사대하는라 바빳으며 오직 종묘사직을 지키는 것이 조정의 목표일 정도니 영토가 어떻게 잘려나가든 크게 관심두지 않았습니다.

 

만주.장백산.흥경.성경.북경을 잇는 선은  지형.지세적으로 거의 직선입니다. 즉 후조선은 저들의 목표 방향에서 벗어나 있지만 목표인 명나라를 정복하려면 반드시 꺽어야 하는 후방의 적이였습니다. 결국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은 후 왕권은 유지되었지만 서북쪽 경계선은 크게 후퇴시켜야 했습니다.

 

추정지도 - 명나라 말 후조선 서북 경계

 

 

 

 

                       주) 1. `가` 선 서쪽의 붉은 굵은 선이 명 주원장과 후조선 이성계가 협약한 국경선이며,

                                국경선에서 `가` 선까지 명나라와의 말썽을 없애려고 백성은 물론이고 군사의 진보까지도 철수시킨 지역.

                            2. `가`선에서 `나`선까지 지역을 병자호란 이후 청의 압박으로 명 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성과 군사를 철수시

                                 킨 지역  

추정지도 - 병자호란 전.후 후조선 서북경계

 

 

 

 

 

                          주) 1. `1` 선이 명과의 국경선

                                     2. `2` 선은 병자호란 후 청과 협약 혹은 강압으로 백성과 군 진보를 철수시킨 선

 

장백산 북쪽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인들 대부분도 북경으로 입관하였기 때문에 광해조가 계속 집권했더라면 장백산과 백산 사이 지역을 중립지대로 설정하여 출입을 금지시키는 협약을 맺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대북 관계가 파국으로 흘러 정묘.병자란을 겪은 후에는 오히려 후조선 측 영역으로 더 깊숙히 봉금지대가 설정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고려 말 요동 정벌 도중에서 회군 후 후조선을 개국하면서도 철저하게 명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사대 의식으로 뻣속까지 젖어있는 후조선 조정은 야인이라고 철저하게 무시했던 후금의 무력에 굴복하여 의주 압록 지역을 내주고 지금의 요하 지역으로 국경을 물리웠습니다. 또한 지금의 요하를 원래의 압록강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불렀으니 이 또한 모든 혼동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병자란 이후부터는 지금의 요하를 압록강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또한 국경선으로 이해하였으며 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책문까지 불과 120 여 리 정도 지역이 새로운 중립지대가 되어 연경행 사신들도 청이나 조선의 진보나 역이 없기 때문에 노숙을 해야만 했고, 원래의 의주 서쪽에 있었던 봉황성.진동보.진이보 등의 이름만을 따서 동쪽으로 옮겨 새롭게 차지한 출입금지 지역에 역참의 기능을 갖춘 보를 설치하여 후조선 사신들이 책문을 통과한 후 요동 연산관에 이르기까지의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감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 새로운 국경선 지역과 후조선 초기부터 야인과의 경계였고 4 군이 설치되기도 했던 그 압록강과 발원지인 백산 지역과의 국경선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의 대릉하 중류 부분 북쪽에 있었던 백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삼수압록을 따라 국경선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대릉하 하류가 남쪽으로 꺽어지는 부분을 따라 경계를 나눈 것으로 보입니다. 청나라가 멸망하는 1911 년 까지도 백산은 청과 후조선의 경계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쉽고 역겨운 사실이 조금만 관심있게 들여다 보아도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지금 전해지고 교육시키는 역사 서술행태 즉 1604 년 구암 한백겸의 `남자남북자북`설로 한반도 한강이 조선과 한의 경계를 짓고 각각 발전하였다는 역사 인식이 후조선 중.후반기 당시에도 큰 호응을 얻었다 하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몇백 년에 걸쳐 벌어졌지만 장백산과 백산은 제 위치에서 국경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200 여 년이 흐른 후에는 더 어의가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1873 년 부터 일본 명치 정부의 서향(사이고다까모리)은 육군 장교들을 중국.대만.조선에 스파이짓을 시킵니다.

이 군인들 중 우리 군인 계급으로 영관급들은 국가의 제도.외교.관습.상관례 등을, 위관급들은 주로 지형지세에 대한 정보를 수집케 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 중국 동북삼성 지역에서는 앞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도를 조작하기까지에 이르렀고, 이 조작의 시작이 승덕의 난수였고 중간 지점이 의주 압록강이였고 끝 지점이 바로 후조선의 백산이였습니다.

 

지금의 란하 최하류가 한 시기부터 무수한 물길들이 경유하여 바다와 같이 넓었기 때문에 명 시기에 제작된 `요양총도`에는 지금의 요동만처럼 그려졌습니다. 이것에 착안한 일본은 `요양총도`를 지금의 요동만으로 확신시키려고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하였습니다. 

 

우선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에 불과하였던 요하를 지금의 요하로 옮겨야만 했고 그 완성은 백산이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백산을 옮긴다는 말은 그 기슭에 있는 모든 것까지도 움직여야 한다는 말인데 이 백산이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백산과 서쪽 줄기인 백산대맥이 무려 동서 1000 여 리에 이른다는 산괴입니다. 그 백산대맥에서 흘러나가는 요하.혼동강과 백산에서 발원하는 압록강.두만강 등을 모조리 옮겨야 하며 이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기 위하여 한 시기의 난수濡水를 염난수로 즉 지금의 란하로, 백랑수를 지금의 대릉하로 옮겨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입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죄질이야 천만,억 년을 두고도 갚을 수 없는 고단위 사기질입니다. 

어찌되었건 일본은 조작에 성공했고 남은 것은 한국의 고대 역사지리는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1911 년 이후에 편찬되었을 <청사고/지리지>에는 장백산이 기록되어야 함에도 그 자리는 성음길림봉이 차지하고 있고 대한제국의 북쪽 경계였던 백산은 장백산으로 바뀌였습니다. 

 

하지만 산 이름까지 그럴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설화에 등장하는 장백산을 잊지 않으려고 한 것일까요?

만주족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마도 일본이 후조선을 강제 병합한 직후인 청나라 선통 3 년(1911)에는 청도 신해혁멷으로 멸망하고 동북 3 성 지역이 북경 이홍장 정권의 군벌들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청.러시아와 해전을 치룬 이후 진출했던 파사.의주 압록강 지역이나 백산 지역 분계강과 두만강 사이의 간도 지역을 장악하고 행정.경찰.군사력을 동원하고 있었던 터라 어수선해진 틈을 이용하여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 편찬에도 쉽게 손을 뻗쳤으리라고 봅니다. 

 

아마도,

`성경도에 표시된 장백산을 정확하게 조사한 바로는 만주족들이 신성시하는 성음길림봉이 맞고 1712 년 청과의 감계협약에 따른 국경선은 후조선의 백산인 동시에 청의 장백산이다.`라고 후일 어느 쪽이든 후조선에 반박하려고 <청사고/지리지>를 고쳐 썻을 것이라 추정해 봅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아방강역고>의 백산을 장백산으로 바꿔 불러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오랑캐 운명이 100 년을 넘길 수 없다

 

1636 년 병자년 후조선을 재차 공격하여 인조의 무릎을 꿇린 후 후금의 군주 홍태시는 심양에서 청으로 개국한 후 황제의 위에 올랐고 이후 산해관을 무혈.통과하여 1644 년에는 북경에 입성하여 정도하였습니다.  

 

이후 후조선 조정 내에서는 `오랑캐의 운명이 100 년을 넘길 수 없다`는 말들이 오갔는데, 이는 북방 오랑캐인 만주족이 북경 부근 지역을 차지하였지만 계속 장악하지 못하고 쫓겨나 본래의 거주지인 영고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조롱 섞인 예측이며 `만주회귀론`이라 이름붙쳐진 설인데 사실 뚜렷한 근거는 없었습니다.

 

사대 대상이던 명이 만주족에 의해 멸망당하니 임진왜란 시기 명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보은 의무감과 두 차례 호란을 겪은 후에 절치부심하며 복수설치 대한 기회를 엿보았으나 점차 가망성이 사라지고 화이론의 주인이였던 명이 사라지자 이제는 후조선이 명을 이어받은 화이론의 주인이라며 `조선중화론`이 고개를 들면서 마음 속에는 여전히 청인을 얕잡아 보아 일어나는 감정적 표현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바램과는 달리 청국은 강희.옹정.건륭제 시기를 거치며 계속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오삼계의 반란 등 작은 내란이 있었지만 곧 평정되어 안정기로 들어섰으며 이어 대만을 함락시키고 북쪽으로는 영고탑 북쪽 혼동강이 흑룡강으로 흘러드는 곳으로 침입한 러시아를 후조선의 포수를 동원하여 간신히 쫓아내는 등 영토를 더욱 확장시켰고 변경은 안정되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도 청은 제사를 핑계로 백두산에 왕래하려 한 일이라던가, <황여전람도> 지도 작성을 빌미로 조.청 간의 국경지대를 조사한다거나, 조.청 간의 정계를 위해 목극등이 파견되었다던가, 건륭제의 심양 행차 등등은 후조선으로서는 예사롭게 볼 수 없었고 이전부터 회자되었던 만주족의 영고탑 회귀설과 관련하여 영고탑으로 돌아가기 위한 퇴로 확보 조처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만주족이 쫓겨갈 것이라는 예측을 하면서도 후조선 효.숙.경종.영조 조정 내에서는 또 다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앞서는 고민으로는, 만주인들이 본래 거주지인 건주위 혹은 영고탑으로 쫓겨 돌아가는 길에서 틀림없이 몽고의 공격을 받을 것인데, 그 공격 지점이 산해관 동북쪽에서부터 대략 심양까지의 사이 지역일 것이고, 공격을 받은 만주인들이 후조선의 서북영토로 침입.통과하여 갈 것이라는 걱정이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몽고의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오삼계의 란이나 옹정제의 교체 시기 등 어수선한 틈을 타서 영고탑장군이 반란을 일으킨다거나, 혹은 만주족들이 무사히 영고탑 지역에 들어간 후에 예상되는 후조선 북계지역 즉 6 진 지역과 폐사군 지역의 방어에 관한 것이였습니다. 이와같이 양 호란 이후 효.경.숙종.영조 년간에는 효종 초기의 북벌.복수설치론 보다는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청인들의 동태에 대해 더 관심을 가졌고 그에 따른 방어 대책을 세우는데 많은 시간을 할해했습니다. 

 

이러한 결과 국토의 서북쪽과 북쪽 경계 지역의 鎭.堡.봉수대 등이 증설되고 더불어 지리적 관심이 증대되어 경계지역과 만주족의 본거지와 후퇴 경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성경지><주승필람><몽고지> 등등 지리지 등의 반입이 늘어났으며 더불어 후조선 국내에서도 경계 지역에 대한 지도 제작이 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첫번째로 우려되는 만주족의 침입 경로로 예상되는 지역인 산해관 밖 성경 심양 사이 부근과 맞닿은 후조선 국경 지역에 관한 지리.지형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여러 말들이 오간 것 같습니다. 설왕설래한 이유 중에는 만주족의 영고탑 회귀 시에 몽고의 반격을 장담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겠지만 더욱 근본적인 것은 만주족의 원 근거지나 후조선의 서북쪽과 북쪽 경계 지역인 성경.흥경.건주위.오라.선창.영고탑.선춘령 등 지역의 지명.지형.지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점이였습니다.

 

1669 년 함경감사 남구만은 만주족의 퇴로가 성경.선창.영고탑으로 이어지며 후조선의 서북쪽 경계 밖을 지날 것이라 하였습니다. 물론 몽고가 반격하고 그 지점이 산해관에서 심양 사이이고 만주족이 열세라면 당연히 후조선 경내로 쫓겨들어 올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숙종 6 년(1680) 청에서 제사를 핑계로 백두산을 왕래하려 하자, 숙종은 평안감사에게 백두산 경계를 더욱 철저하게 하도록 명하며, 이 문제를 허적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효종대부터 계속되어 온 만주족의 영고탑 회귀설이 언급되었고 또 몽고의 반격과 만주족의 예상 퇴로가 언급되었습니다.

 

어제 김석주가 이 문제를 듣고 말하기를 `이는 꼭 효종의 하교 내용과 같다. 효종께서 일찌기 말하시기를, ``내가 어찌 가서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들이 패해서 돌아갈 때에 반드시 화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효종께서 말하시기를, `이는 그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반드시 몽고에게 저지를 당할 것이므로, 저들은 장차 의주로부터 양덕.맹산을 경유하여 함경도로 들어가서 그 본토로 방향을 바꾸어 갈 것이다.`라고 하셨다.``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사게는 비록 알 수가 없지만 대개 그 뜻을 관찰하건대, 길을 우리 땅에서 잡아 그 본토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6 년 3월 갑오 , <후기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67 쪽 배우성

 

이로부터

300 여년이 흐른 20 세기 한국에서는 17 세기의 지명.지형.지세 기록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만주족의 예상 퇴로를 그리는데, 이것이 영 쌩뚱맞습니다.

 

 

추정지도 - 만주족 회귀경로 ,<후기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81쪽 배우성

 

 

 

주) 1. 적색표시 경로는 후조선 효종과 허적이 말한 것으로 추정한 의주-양덕-맹산 경로임     2. 청색표시 경로는 후조선 경종 2년(1722) 이태좌가 말한 것으로 배우성이 추정한 봉황성 혹은 금복주金復州 혹은         애양성 중에서 봉황성과 애양성 침입로를 함께 표시한 것입니다.

 

위 추정지도를 그린 배우성은 아마도 한반도 평양이 단군조선 왕험성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또한 당연히 청의 성경 심양이 현대 지도에 표기된 요하 하류 변에 있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인들이 퇴로를 위와 같이 표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효종과 숙종 그리고 김석주와 허적이 인식하는 의주.양덕.맹산이나 함경도.영고탑 등이 과연 저 위치였을까요?

 

만주인들의 영고탑 회귀설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경종 2 년(1722)에 기록된 이태좌의 말입니다.

 

강희제가 이미 죽은 뒤에는 십중팔구 화란이 일어날 것인데, 내란이 이미 일어나면서 혹 다른 적이 다시 생기거나 혹은 진인이 처음으로 일어난다면, 저들은 그대로 중토에 웅거할 수 없어서 반드시 영고탑을 소굴로 삼을 것입니다. 대저 산해관의 바깥쪽에는 동북쪽으로 심양이 있고, 심양의 서북쪽은 모두 몽고 지방인데,몽고가 만약 그 잔비함을 틈타서 그 귀로의 한 부분을 끊으면, 저들은 나아가서 영고탑에 도달할 수 없고, 물러가서 다시 산해관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 형세는 혹 봉황성으로 달아나거나, 혹은 남쪽으로 금.복주에 나가거나, 혹은 애양성에 나가게 될 것입니다.그런데 금.복주는 우리의 선사포와 마주 대했고, 애양성은 우리의 서쪽 변방 강변 7 군과 대치한 땅이므로, 만약 이로부터 길을 취하여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곧바로 설한령을 경유하고 다시 함경도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서 북으로 장백산에 곁에 도달할 수 있어서 영고탑의 지름길이 됩니다. 이것은 지난해에 호차 목극등이 엿보았던 곳이니, 이것이 그 첫째로 근심할 만한 것입니다. 가령 피인들이 중간에서 막혀 끊기는 근심이 없이 순조롭게 영고탑에  돌아간다면, 저들의 경계인 선춘령 이남은 우리 북부 지방과 서로 연화煙火를 볼 수 있고, 한 줄기 두만강으로 대략 저들과 우리의 경계를 한정했을 따름이니, 만약 무산.갑산 사이에 이르게 되면, 곧바로 텅 비어서 거침이 없고 사람이 없는 땅입니다. 그리고 남관에 접하는 가장 지름길이 되니, 만일 근심이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이를 제지하겠습니까? 이것이 그 둘째로 근심할 만한 것입니다.                                                                        <후기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79,80 쪽

 

이와같이 반도사관자들은 의주.양덕.맹산.인산진.양하.대총강.아골관 등등 모두 한반도 안에서 찾습니다. 특히 요하나 심양을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이라고 하며 또한 몽고의 근거지를 지금의 심양 북쪽이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혹,

후조선 의주에만 눈길을 주게 되면, 즉 산해관.요하.심양 등 위치에 대한 정확한 검토를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글을 읽을 줄 알며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후조선의 서북쪽 경계 지역인 의주.봉황성 등의 검토와 동시이면서도 최소한 동일한 노력으로, 청국의 동북쪽 경계 지역 지리에 대해서도 검토하고 파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며, 이는 기본 상식 중의 기본에 속할 일일 것입니다.

 

위 추정지도를 보노라면 산해관.요하.심양.영고탑을 대체 어디서 찾고 있는 것인지, 또한 아무리 넓디 넓은 땅을 차지한 몽고라 하여도 그 위치시킨 것을 보노라면 그저 한심할 따름입니다.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중하고 또 중요한 단군조선의 태백산.왕검성이나 후조선의 백산이 어디에 있는지, 또한 열수.압록수가 어떠한 물길인지, 압록수가 애양하.대총강과 어떻게 다른지 등등, 조선과 지나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의 지형이나 지세를 전혀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관심도 없는 자들로 보입니다. 그러니 저런 엉터리 경로를 그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퇴각하는 만주족들이 몽고의 반격을 받아 후조선의 서북 국경을 침입하여 예상되는 적로賊路 6 개가 영조 시기인 1750~51 년 편찬된 <해동지도> 의주부에 파악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첫번째로 꼽는 것이 인산진과 양하가 접경하는 지역입니다.

 

제1적로 麟山鎭與楊下接境 相距三十里 而西距十里有大摠江 江之西卽彼邊姑母城也            南行數里有兄第山 北距十里有權豆山 由此兩間 西至鴉骨關三十里 而達于鳳城 此乃賊路第一也            若從此路而來 則及由塔峴之路卽古之長城口也 自此以南踰銀石峴十三里 則無備四通五達之地

 

인산진과 양하가 접해 있는 지역으로 30 리 떨어져 있는데, (인산진에서) 서쪽으로 10 리 떨어져 대총강이 있고 대총강 서쪽에는 저들 즉 청국의 고모성이 있으며, 남쪽으로 몇리 내에는 형제산이, 북쪽으로 10 리 떨어져 권두산이 있고, (인산진과 양하) 사이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30 리 떨어져서는 아골관이 있어 (남쪽으로) 봉성에 이르니 이곳이 적로(중에서 가장 중요한) 첫번째다. 이곳으로 침입한다면 탑현을 지나 옛 장성구에 이르고 또 남쪽으로 13 리 떨어진 은석현을 넘는다면 비책이 전무한 사통오달의 땅에 이르는 것이다.

 

자, 당시 후조선의 의주부는 어디였을까요?

 

효종 시기에는 양덕.맹산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의주가 있었다고 하며, 경종 시기에는 봉황성.애양성.금.복주 등이 의주나 의주와 가까운 강변 7 군 그리고 선천의 선사포와 대치한 곳이라며 이 세곳을 통과하여 청천강 이북을 통과하여 설한령.함경도.두만강.장백산 곁을 지나면 영고탑에 이르는 지름길이라 하였는데, 이번 영조 시기에는 인산진과 양하가 접하는 30 리 경계 지역이 의주부라 합니다.

 

의주, 과연 어디일까요?

이제껏 듣도보도 못한 대총강.애양성.선사포.설한령 등과 금.북주와 아골관 등은 대체 어디란 말일까요?또한 지금의 요동반도 서북쪽에 위치한 금.복주가 어찌 선사포 즉 평안도 선천과 마주대했다는 말일까요?

 

 

추정지도 -  1699 년 약천 남구만이 지적한 만주족 영고탑 회귀로                 1736 년 영조 11 년 <몽고지도>를 구입한 후 이일제가 답한 몽고 근거지와 만주족 근거지 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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