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허성관의 글 중 역사지리 부분은 식민사관.동북공정 논리를 맹종하고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즉 허성관이 다녀왔다는 지금의 능원 위치는 거란.요국의 중경 대정부 지역이 아니라 고려의 북쪽 경계 안쪽 지역이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요하가 지금의 란하 중.하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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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 ⑥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
  • 박찬화 기자
  • 승인 2017.09.27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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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글 주소: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895

허성관 미사협 상임대표의 2016년 중국을 다녀오며 쓴, 우리역사 현장 답사기를 7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2016년 8월 4일(목) 적봉→요나라 중경→우하량(牛河梁) 유적지→조양→노룡현
→ 북방민족의 중원 정복로를 달리다

오늘 답사일정은 강행군이다. 적봉에서 요나라 중경(中京)까지 90km, 거기서 우하량이 70km, 다시 조양까지 100km이다. 조양에서 노룡현까지 300kmm가 넘는다. 대략 600km를 오늘 이동해야 한다. 아침 8시에 적봉에서 출발했다.


적봉시내를 남쪽으로 벗어나자 야트막한 구릉이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이 구릉을 넘으니 약간 내리막길인데 다시 평원이 펼쳐지고 멀리 조금 전과 비슷한 구릉이 보인다. 조금 더 가자 내몽고자치구와 요녕성 경계인데 요금소(중국에서는 수비참 收費站)가 나온다. 중국에서는 성(省) 경계를 통과할 때 어김없이 경찰이 검문한다. 잠간 쉬었다가 다시 구릉을 넘고 한시간 넘게 달리자 능원(陵園)과 요나라 중경 유적지 표지판이 나온다. 유적지에 초원청동기박물관(草原靑銅器博物館)이 있다고 되어 있다.

동이족들들은 모두 국가를 5개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부여의 5가, 고구려의 5부, 발해의 5경, 요나라와 금나라의 5경이 그렇다. 요나라의 5경은 상경임황부(上京臨潢部), 남경석진부(南京析津部), 동경요양부(東京遼陽部), 중경대정부(中京大定部),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인데 상경은 적봉 동쪽에 있는 지금의 파림좌기(巴林左旗), 남경은 북경, 동경은 요녕성 요양, 서경은 산서성 대동이고, 이곳 능원이 중경대정부가 있던 곳이다. 거란족 요나라 서울 한 곳을 답사하게 된 것이다. 이곳 중경과 상경을 제외한 세 곳은 이미 답사한 적이 있다.

중경성 옛 터에는 주위에 토성 흔적 남아 았고, 큼직한 멋진 요탑(遶塔)이 중앙에 서 있다. 요탑은 요나라의 표지유물이다. 남아 있는 요탑이 9개라는데 이 탑이 그 중 하나다.





오른쪽에 초원청동기박물관이 있다. 예상 외로 박물관 소장품이 충실하다. 특히, 비파형청동검 등 청동 유물이 다양하다. 이 동검들은 대부분 고조선 유물인데 박물관은 중국 주(周)나라 때의 유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주나라는 이 지역 근처에 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박물관에는 요나라 시기 유물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중셩성이 요나라 중심부의 하나였으니 당연히 출토 유물이 많았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요나라 주요 인물들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사람들이 있다. 요나라 최 전성기의 황제 성종(聖宗 971-1031), 그의 어머니 소태후(蕭太后 953-1009), 그리고 그녀의 애인이면서 재상이었던 한덕양(韓德讓 941-1011)이다. 성종은 12세에 재위에 올랐는데 소태후가 섭정했다. 소태후는 이름이 소작(蕭綽)안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이름 작(綽)이 의미하는대로 너그럽고 몸매도 빼어나고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기품도 있어 모든 사람으로부터 촉망을 받았다. 태후가 되자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해서 요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게다가 직접 대군을 지휘해서 송(宋)나라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송나라로부터 막대한 조공을 받게되는 전연의 맹(澶淵之盟 1004)도 이끌어 낸 여걸이었다. 이는 소태후가 초원의 여자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소태후를 보좌한 재상이 한덕양이었는데 그와 소태후는 요나라 조정이 인정하는 애인관계었다. 황제인 성종도 한덕양을 아버지처럼 예우했다고 한다. 초원민족은 유학의 윤리관에 물들지 않아 남녀관계에 너그럽고 개방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이 밀랍으로 전시된 세 사람은 우리와는 원수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고려에 세 차레나 침입했다. 마지막 침입이 1019년인데 소태후가 죽으면서 절대로 고려와 전쟁하지 말라고 유지를 남겼는데도 불구하고 성종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가 귀주에서 우리 강감찬 장군에게 대패하고 물러갔다. 이 때부터 요나라는 남송정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전성기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면에 고려는 동북아에서 국제적인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다.
요나라 중경성 유지에서 우하량 유적지로 향했다. 초원과 몇 개의 구릉을 지나자 조양시 건평현인데 커다란 제철소가 있다. 초원의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아마도 근처에 철광산이 있어서 세운 공장일 것이다.
우하량 유적지에 도착하자 여기에서 출토된 여신상이 일행을 맞이한다. 날씨는 여전히 따끈따근하다. 유적지 주요 지역을 보호하고자 공상과학 영화에 나옴직한 건물을 지어 덮어 놓았다. 유적지는 구릉에 모여 있다. 그런데 구릉 중간에 차도를 내서 유적이 다소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필자는 고고학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유물의 구체적인 가치를 알 수는 없다.
먼저 천단과 적석총 유지를 보았다. 얼핏보면 유골들은 복제해놓고 그저 돌무더기를 모은 것으로 보이지만 자그만치 가원전 35세기 유적이라고 하니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상고시대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풍속은 우리 동이족에 고유한 전통이다. 북경에는 여진족 청나라가 세운 거대한 천단이 있고, 서울에 있는 원구단도 천단이다. 이곳의 천단이나 북경의 천단이나 둥그런 형태이니 아마도 이 천단이 원조일 것이다. 적석총도 우리 조상들의 무덤 조성방식이었으니 우하량 유적은 우리외 깊은 관계가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어 여신묘로 이동했다. 여신묘 유적은 맨 땅에 표시만 되어 있다. 이곳에서 여신상이 발굴되자 세계가 깜짝놀랬다. 게다가 정교한 옥기도 대량 출토되었다. 서기전 35세기에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기 때문이었다. 정교한 옥기는 당시 기술 수준이 뛰어났고 분업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대형제단은 통치 권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여신상은 종교적 성숙도가 정착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 건국된 서기전 24세기 보다 천년 전에 이미 이곳에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적봉을 중심으로 한 이지역은 고대에는 지금 보다 온도도 높고 강우량도 많아 살기 좋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문화가 융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화장실을 찾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매캐한 향 냄새가 흘러 나온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곳저곳 기웃거리는데 촛불처럼 전기불을 켜놓은 신당에서 나오는 향 냄새다. 조그마한 방에 불과한 신당의 내부 분위기가 우리네 무당들이 공들이는 신당과 똑같다. 아마 중국 사람들은 이 신당이 자기들의 문화가 이니기 때문에 필자가 동물적으로 느낀 분위기를 감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신당에 모셔놓은 신체가 바로 여신이다. 아득한 옛날 모계사회의 지도자가 여신으로 추승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관광용으로 꾸며놓은 신당이지만 경건한 모습이다.
여신묘를 보고 밖으로 나오자 버스 2대를 타고 온 한국인 다른 답사단을 만났다. 일행 중에는 우리 시대의 춤꾼 이애주 교수가 있었다. 필자와는 면식이 없지만 이덕일 소장과는 잘 아는 사이에서 잠간 담소를 나누었다. 도대체 이 우하량 유적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 먼 곳까지 답사오는지! 아마도 여기가 우리의 시원 중의 한 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우하량에서 건평으로 들어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일행 모두 아침부터 시작된 답사로 출출했다. 소박한 동네 음식점인데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식당 옆이 술 가게인데 동네 양조장에서 빚은 백주도 팔고 있다. 가양주다. 맛을 보니 괜찮고 값도 싸서 세 근(斤)을 샀다. 중국에서는 술도 무게를 달아 판다. 오늘 숙박지인 노룡현에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서 저녁먹을 때 가볍게 한 잔 하기 위해서다.

야트막한 골짜기 길을 한 시간 쯤 가자 조양(朝陽)이다. 조양이 우리말로 아사달인데 지금 중국에 남아 있는 아사달 중에서 제일 큰 도시가 이곳이다. 조양시는 고조선과 고구려 중심지 중의 한 곳이었고,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기 전에 거점이기도 했다.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이 당나라와 투쟁하던 최전선 중의 한 곳도 이 곳 조양이었다. 뒷 날 당나라와 60년 동안 대립했던 치청(淄靑)왕국 제(齊)나라의 시조인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 732-781)도 이곳 조양이 고향이었다. 조양은 바로 우리 고대사의 중심이 된 곳 중의 하나이다.

조양시내를 흐르는 강이 대릉하(大陵河)다. 중국 하북성부터 요동반도 사이에 큰 강이 세 개가 흐른다. 제일 서쪽이 난하, 중간이 대릉하, 그리고 동쪽이 요하이다. 여러 가지 사료를 종합해보면 고구려가 망하기 전까지는 중국의 어느 왕조도 동쪽 국경선이 대릉하를 넘지 못했다. 난하와 대릉하 사이의 평원은 우리와 중국 왕조가 끊임없이 다투던 지역이었고, 일시적으로 중국 왕조가 차지한 적도 있었다.
조양에서 요탑을 답사히로 되어 있었으나 갈 길이 멀고, 오는 길에 요나라의 중경에서 멋진 요탑을 보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사실 우리 답사팀이 본 요탑들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탑 안에 커다란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요탑은 벽돌로 만들었고 규모도 크지만 돌로 만든 탑에 비해 공력은 적게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릉하 가에 버스를 세우고 잠간 내려가 본다. 강폭이 넓고 수량도 많다. 다리가 여러 개 놓여 있다. 수심이 얕아 보이고 오고가는 배는 없다. 대릉하 남쪽의 조양은 개발이 덜된 지역이고 북쪽은 도심이다.
조양시를 빠져나와 북경과 하얼빈 간 고속도로로 들어서 노룡현으로 향했다. 조양에서 노룡현까지 대략 300km이고 광대한 평원지역이다. 소위 요서주랑(遼西柱廊)이다. 북방민족들이 중원을 치러 갈 때에 대부분 이 길을 택했다. 우리 일행은 지금 우리의 조상과 형제 민족들이 중원으로 쳐내려가던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가는 길에서 조금 남쪽으로 길을 잡으면 산해관이지만 너무 늦고, 이미 산해관을 답사한 사람도 여럿이 있어 그대로 노룡현으로 직행했다. 날이 어두워져 풍광을 감상할 수 없어 아쉽다. 고속도로에 왕래하는 대형 트럭이 승용차 보다 많다. 활기찬 중국 경제의 모습이다.

노룡현성에 있는 노룡대주점(盧龍大酒店)에 밤 10시 경에 도착했다. 긴 하루의 여정이었다. 미리 전화로 주문한 음식으로 달게 먹고 자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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