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서기 645 년 

당 태종이 임유관.영주.요동을 경유하여 고구려로 쳐들어왔고 전쟁 후반에 고구려 연개소문은 정병 3 만을 이끌고  적봉진을 경유하여 상곡 지역으로 침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고구려 군사가 경유한 적봉진을 지금의 적봉으로 인식하고 아래와 같은 추정도에 `고구려 반격 가능성(?)` 표시를 하였습니다. 

 

추정도 - 645 년 당과 고구려의 전쟁상황도(출처; 김용만 저,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풍운아 연개소문)

 

 

 

 

그러나 위의 적봉진 경유 표식은 반도사관이며 동북공정을 옹호하는 반민족역사관일 뿐입니다. 아래는 <조선상고사> 425,426 쪽에 언급된 연개소문에 관한 서술 일부입니다.

 

연개소문이 요동의 전사를 양만춘.추정국 2 인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금 열하 부근)을 쫓아 다시 남진하여, 장성을 넘어 상곡(금 하간) 등 지를 습파하니, 당태자 치가 어양에 유하다가 대경하여 고급봉을 드니 봉화가 일야에 안시성까지 연하였더라.

 

당태종이 곧 임유관내에 변란이 있음을 알고 곧 회군하러 할 새,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인하여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달함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줄을 짐작하고, 추정국이 전군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의 협곡으로 잠출하여 돌격하고, 양만춘이 또 성문을 열고 공격하니, 당병이 대란하여 인마가 서로 밟으며 도망하고, 당태종은 헌우록에 이르러 마제가 니영에 빠져 요동치 못하고, 좌목이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거의 생금하게 되었더니, 당의 용장 설인귀가 달려와서 당태종을 구하여 말을 갈아 태우고, 전군선봉 유홍기가 단후를 맡아 혈전한 지 양구에 겨우 탈주하니, <성경통지>의 해성 고적고에 쓰인 바 [당태종함마처]가 곧 그곳이니, 지금까지 당지의 토인들 간에 오히려 당태종의 마가 니녕에 빠지고 화살에 눈을 잃고 생금될 뻔한 이야기가 상전하더라.

 

위 기록과 같이 어양에 유진하던 당태자 치가 대경하였다는 연개소문이 택한 신성.적봉진.상곡 기습로는 한국사학계가 추정하듯 먼 길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상류 지역을 가로지르는 불과 1000 리 이내 길이였고 당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임유관.영주.요동을 경유한 진격로 또한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하류 서쪽 지역에서 북쪽으로 중류에 이르는 길이였을 뿐입니다. 

 

 

 

즉 고구려.당 시기의 요수는 지금의 란하였고 고구려 강역은 서쪽으로 지금의 란하까지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한국사학계의 적봉진 경유 추정도는 오류입니다. 

 

 

 

결국 한국사학계는 신채호 선생이 적봉진을 `금 열하 부근`이라 비정한 것을 간신히 꿰어 맞추고 있지만 실상은 선생의 지리관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청나라 역사서인 <청사고/지리지>에 기록된 직예성 승덕부에 속했었던 적봉현 곧 적봉직예주였을 것이며 적봉이란 지명은 봉천성 지역인 요동에서 직예성 지역의 상곡에 이르는 청 시기의 성.부.주.구.현 지명 중에서는 하나 뿐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요하를 중국의 춘추시대부터 명.청 시기까지의 요하였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일본 명치왕군부였고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백조고길 등의 모든 역사학자였으며 한국에도 이병도를 필두로 지금의 대학 강단에 서있는 모든 역사학자가 저러한 지리관 곧 식민사관을 진리라고 신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는 고구려 군사가 상곡 지역을 기습하는데 경유하였다는 적봉과 당 태자 치가 유진하였다는 어양 薊가 표시된 고지도입니다. 아래 고지도는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하였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이며 원도는 1832 년 청국에서 간행되었다고 합니다.  

 

고지도 - 1832 년 청국에서 제도되고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되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부분도 

 

 

)               백하(어양군750 리고하)      고하(우북평군650리 경수)  승덕 2100리 란하(요서군 난수) 노합하 적봉릉하(백랑수)

 

 

위 황조도에서와 같이 적봉은 평천.풍녕.란평.건창.조양 등과 같이 직예성 승덕부에 속한 일개 현이였습니다. 옹정 7 (1730) 팔구구八溝口 설치하였는데 적봉이 팔구구의 북쪽 지역이고 평천이 팔구구의 남쪽 지역이라고 <청사고/지리지>에 기록.설명되어 있고 건륭 43 (1779)에는 적봉현을 설치하고 승덕부에 예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08 년에는 직예성 승덕부의 일개 현에서 직예성의 직접 지휘를 받는 적봉직예주로 승격되었다고 기록.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적봉현을 통령했던 승덕부나 직예주로 승격된 적봉직예주를 관할하는 직예성의 강역은 아래 추정도에서와 같이 북경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으로 각각 대략 600 여리씩 남.북 방향으로 약 1200 리 떨어진 곳까지였으며 적봉현.적봉직예주 위치는 황하의 남쪽에 위치하였고 승덕부 영역은 란하와 황하 사이지역이였기 때문에 적봉현.적봉직예주 또는 적봉진의 위치도 당연히 직예성 경계안에 위치해 있었으니 청 시기 흑룡강성 지역이였던 지금의 적봉은 적봉진이나 고구려 군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곳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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補論

 

 

<청사고/지리지>에 기록된 적봉직예주의 위치 설명입니다.

西南距省治1320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인 보정부까지 1320 리다.

 

적봉직예주에서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인 보정부까지 1320 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대한민국 경기도의 도청은 서울이 아니라 수원에 있는 경우와 같이 직예성의 치소는 북경이 아니라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350 리 떨어진 보정부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결국 보정.북경.적봉 등 3 개 지점은 대략 서남.동북 방향으로 나란히 위치하였다는 얘기이니 적봉에서 서남쪽으로 있는 당시 경사인 지금의 북경까지는 970 리라는 소립니다.

 

한 시기부터 청이 멸망하는 1911년까지 약 2100 여년 동안 서국 정사 지리지에 기록된 요하는 지금의 란하였기 때문에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당시 대요수.요하인 지금의 란하 중류 지역인 청국 시기의 심양까지가 1470 리라는 소리이며 적봉까지는 970 여리였으니 적봉은 지금의 란하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북경에서 지금의 적봉까지는 몇 리나 될까요?

 

지금의 적봉은 청 시기에는 흑룡강성 합이빈 정도일 것이니 <청사고/지리지>에 북경에서 봉천성 치소인 심양까지가 1470 리, 심양에서 길림성 길림부까지 600 , 길림부에서 길림성 합이빈까지 500 리로 기록되어 있으니 총 2570 리쯤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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