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학회에서 발표된 강종훈 님의 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에 대한 김기섭 님의 토론문입니다.

 

 

김기섭 님은 "백제의 요서경략설 재검토:4세기를 중심으로"(한국고대의 고고와 역사, 학연문화사, 1997년) 글에서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부정하는 요지의 글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근초고왕이 영동장군령낙랑태수 호로 피봉된 것이 요서경략설의 진원지라고 보고, 백제의 과장 제스처를 남조에서 사실로 착각한 것이 요서경략설의 내용이라고 보았습니다.

 

다만, 아래 토론문에서 보듯이 화북경영설은 언급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김기섭 님도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보입니다. 강종훈님의 글도 역시 화북경영설은 차후에 언급하는 것으로 미뤄놓았지요. 다음은 한국고대사학회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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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께서는 이미 10여년 전에 遼西經略說(요서진출설)에 대한 상세하고 깔끔한 연구사 정리를 하신 바 있습니다. 그때에는 관련된 문헌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면서 긍정론과 부정론의 장․단점을 세심히 체크하셨는데, 적극적인 반대 자료가 없는 한 덮어놓고 기록을 부정하기보다는 시간 여유를 가지며 자료와 연구성과를 더 모아보자는 취지였기에, 대체로 긍정론에 후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10년이 지난 오늘 발표하신 논문이 긍정론에 서있는 것은 일면 자연스럽습니다만, 그동안 어떤 자료와 연구성과가 강종훈 선생님의 생각을 굳히도록 하였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강종훈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미 부정론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 바 있는 저로서는 몇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자리를 빌어 직접 질문하고 답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요서경략설의 요점은 3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는가? 둘째, (당시 백제의 국력이라든지 동북아시아의 정세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셋째, 왜 이처럼 기록들에 차이가 나는가?(南朝계통 기록에서만 보이고, 北朝계통 사서에는 빠져있는 이유, 그리고 南朝계통에서도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 이유..)

 


먼저, 時期에 대해, 강종훈선생님께서는 서기 385년이라고 아예 못박았습니다. 당시 백제의 내부 사정과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감안하면, 이외에 遼西經略이 가능한 시점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시점이 서기 故國壤王 2년(385) 후반기와 廣開土王 12년(402) 이후인데, 광개토왕 12년 이후로는 백제의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해 도저히 해외 경략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서기 385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기 385년은 백제의 枕流王 2년이자, 辰斯王 원년입니다. 이때는 故國原王․近肖古王때부터 본격화한 고구려․백제의 전쟁이 점차 고구려 우위로 접어들던 무렵입니다.

 

 

 

이듬해인 진사왕 2년에 백제가 靑木嶺에서 八坤城, 그리고 西海에 이르는 長城을 설치한 것을 보면, 백제가 近仇首王 초기까지 平壤城을 공격하던 공세적 입장에서 이제 바야흐로 수세적 입장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三國史記/百濟本紀>를 읽어보면 백제는 근구수왕 말엽부터 이미 국세가 기울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동안 애타게 노려온 지척의 平壤城조차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멀리 바다 건너 遼西지역으로 군사를 보냈다는 것은, 당시 백제의 처지로 볼 때 너무 과분한 것이지요.

 

 

 

또, 東晋의 입장에서도 서기 385년(孝武帝 10년)은 秋8월에 姚萇이 苻堅을 죽이고 황제를 칭하였으며, 9월에는 呂光이 姑臧에서 涼州刺史를 자칭하고, 苻丕가 晉陽에서 황제에 오르는 등 지척에서의 일이 급해 遼西지역에까지 신경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東晋이 慕容垂에게 연전연패하던 시점에 백제가 餘巖과 연계하여 後燕의 근거지 근처에까지 진출한다는 것은 너무 큰 모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에야 영토와 자원에 대한 욕심이 지나칠 정도로 커서 해외 진출 등에 열을 올리지만, 과연 당시에도 그러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과연 서기 385년경 백제가 요서지역으로 파병할 능력(船舶..)이 있었는지, 파병했다면 그것이 과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듯한) 고구려에 대해 어떤 군사적 실효를 거둘 수 있는지, 오히려 後燕이라는 거대 세력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켜 곤란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할만한 상황인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둘째, 史書에 대한 문제입니다. 얼마전 余昊奎선생님께서 <晋書>의 徐巖이 餘巖 곧 부여계 유민인 扶餘巖인바, 餘巖의 385년 7월경 군사활동을 南朝의 史家들이 착각하여 「백제의 요서진출」로 잘못 적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만, 南朝의 史家들이 과연 그 정도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고 신중치 않았다고 볼 만한 다른 증거가 없기에 선뜻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종훈선생님께서 「남조의 지식인들이 백제의 요서 진출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본 것은 일면 수긍하고 싶은 대목입니다.

 

 

 

그러나 「남조 지식인들의 확신」과 「사실」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가령, <南齊書> 등에는 서기 490년경에 北魏가 수십만의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했으나 대패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三國史記/百濟本紀> 東城王 10년(488)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宋書>․<南齊書><梁書>에는 倭의 5王에게 新羅․任那․加羅지역과 관련한 爵號를 준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史家의 개인적 입장과 관계없이 5세기 무렵 南朝의 기록에는 의문의 여지가 많은 것입니다.

 

 

 

더욱이 遼西지역을 직접 관할한 北朝계통의 역사서에 백제의 요서경략과 관련한 사실이 한 조각도 적히지 않았으며, 枕流王의 사망시점을 정확하게 밝힌 <三國史記>에도 역시 요서 진출과 관련한 기사가 전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南朝쪽의 기록을 신용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385년경 백제가 잠시 요서지역을 경략하였다고 가정할 경우, 488년 혹은 490년경에 있었다는 北魏의 백제 침략을 요서경략설의 차원에서 설명하려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여쭙고 싶습니다.

 


덧붙여 「徐巖兄弟」를 餘巖과 枕流王으로 풀이하셨는데, 서로 다른 정치 세력임에도 姓이 같다하여 「兄弟」라고 표기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여암과 백제의 침류왕의 연대하였다고 가정할 때, 史家들이 더 주목할 사람은 역시 백제의 침류왕일 것입니다. 慕容氏정권의 입장에서도 令支만 차지하고 들어앉은 餘巖보다야 고구려와 경쟁할 정도의 군사력을 지니고 중국의 東晋으로부터 책봉까지 받은 백제의 침류왕을 斬한 사실이 더욱 자랑스러울 터인데, 다만 「徐巖의 형제」라고 적은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마지막으로, <宋書>에서는 「백제가 요서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百濟略有遼西]」라고 하였고, <梁書>에서는 「백제도 遼西․晉平 2郡을 점거하고 百濟郡을 두었다[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矣 自置百濟郡]」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백제의 군사가 동원되었다고는 하나, <晋書>에는 餘巖의 활동만 적었을 뿐입니다. <宋書>․<梁書>에는 여암에 관한 부분이 전혀 없고, <晋書>에는 백제에 관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그리고 北朝계통 사서에는 둘 다 없습니다)


과연 같은 사건에 대해 이토록 다른 서술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이는 당시의 중국 史家들이 상당히 무책임하였으며, 그들이 지닌 자료가 대단히 엉성하였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晋書>와 <宋書>․<梁書>의 기록을 억지로 연결시키려 할 때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晋書>에는 여암이 令支에 웅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宋書>에는 백제가 晉平郡 晉平縣을 통치하였다고 기록되었으며, <梁書>에는 遼西郡․晉平郡의 땅을 점거하고 百濟郡을 설치하였다고 나옵니다. 정치․군사활동의 주체는 물론 地名도, 領域의 크기도 서로 다른 두 기사를 한가지 사건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저는 가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강종훈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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