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약도는 서강대 산학협력단이 만든 서기 221∼265년의 동북아역사지도이며 약도 좌상 귀퉁이에 얹어진 것은 중국 요서 지방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재야사학계의 견해라고 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산학단의 약도에 지리적 문제가 있다고 하여 보고서를 접수하지 않았다고 하며 기 지원된 연구비까지 환수시키겠다고 합니다. 재단이 취한 조치가 의외이고 신속한 점에 놀랍지만 동북아재단이 재야의 주장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며 접수 불가 사유로 드는 지리적 문제라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아마도 시일을 끌겠다는 것이라 봅니다.
산학단이 만든 약도는 중국의 25 개 정사 기록에 설명된 왕검성.낙랑군.평양성 등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땅에 표시한 것으로 한마디로 쓰레기로 아무런 고민도 없이 만든 저런 약도는 5 시간도 아닌 5 초면 만들 수 있습니다.
한편 재야 주장이라는 약도에 진번.임둔군이 표시된 것이 몹시 궁금합니다.
도대체 진번.임둔군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 군 설치 사실과 4 군 명칭이 중국 정사에 언급되었지만 처음 기록된 정사 지리지인 <한서> 지리지엔 낙랑.현토군 뿐이며 낙랑.현토군 위치도 제대로 찾지 못하여 티격태격하면서 쓸데없이 진번.임둔군을 왜 표시합니까?
또, 낙랑군이 저렇게 넓었는지, 현토군 표시된 지역에 2100 리 길이의 염난수가 흐를 수 있는지, 그 염난수가 요동군으로 들어갔는데 요동군은 어디에 있었는지 더 고민해야 하지 않습니까?
윤내현이 <고조선연구>에서 위만이 강역을 넓히면서 지금의 란하 위치에 있던 요하가 지금의 요하로 옮겨졌다는 것인데,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한서> 지리지는 무제가 설치한 4 군 중 낙랑.현토 2 군만 기록되어 있어 위만 손자 우거가 멸망하고도 30 여년이 지난 서기전 75 년 4 군을 2 군으로 통폐합한 이후의 지리를 서술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반고가 설명한 요동군을 흐르는 대요수는 위만의 영역확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결국 <한서> 지리지에 설명된 대요수는 청이 멸망하는 1911 년 당시의 요하와 같은 물길이며 지금의 란하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재야사학계도 앞으론 대릉하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 지역 내에 있었던 왕검성,고구려 평양성과 한반도 평양의 관계를 밝히는데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도- 단군조선.부여 외 추정 강역
'식민사관.동북공정 실체 > 한국의 식민.공정 맹종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병직.이영훈, 일본 돈 받은 식민지연구 (0) | 2022.01.07 |
---|---|
[스크랩] 2012 미의회 조사국(CRS) 보고서에 창피한 해명 (0) | 2022.01.07 |
대동여지도 만들려 백두산 수차례 답사? 김정호 신화는 허구 (0) | 2022.01.07 |
엉터리 서양지도 인용하는 동북아재단 (0) | 2021.06.06 |
대고려국 건국 기획 (0) | 2021.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