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은 현재 중국 요녕성 집안 지역에 있다는 고구려 광개토왕 릉비입니다. 고구려의 강성함을 나타내는 광개토태왕의 업적이 비문에 새겨져 있기 때문인지 대한인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개토태왕비에는 중요한 문제들이 엉키어 있습니다. 즉 과연 신묘년 기사가 원래의 비문에 새겨진 내용일까요? 또 과연 지금의 위치에 릉과 비가 세워져 있었을까요? 
우선 첫번째로 1980 년 경 재일교포 고고학교수 이진희가 주장한 것과 같이 수차례에 걸친 비문 변조와 비문 변조를 위한 비문 일부 또는 전면에 석회를 바른 사실입니다. 일본 학계에서는 선명한 자구를 얻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나름 상식적인 추정을 하였지만 전해지는 탁본들의 제작 시기가 후대로 가면서 자구가 다른 것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쨋든 태왕릉비문의 제일 첫번째 변조는 발견 시점인 1882 년과 가장 가까운 시기인 1883 년에 가을쯤 탁본하였을 것이라 알려진 일본 국립박물관 소장의 탁본이 만들어진 시기일 것입니다. 이진희에 의하면 태왕릉비문 내용이 1889 년 공식적으로 발표된 후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중국 등에 알려진 박물관의 탁본은 정식 탁본이 아니라 1 면 30 여 매 총 120 여 매에 이르는 쌍구가묵본을 이어 붙쳐 정식탁본처럼 만든 것이라 하며 소장된 과정도 일본 육군 참모본부 소속 장교인 사코오 가께아끼가 밀정으로 천진.우장 등에 파견되어 압록강 서쪽 지류인 동가강 지역 정보를 수집하더 중 태왕릉비 발견 소식을 듣고 현지에서 읽어보고 그 유용성을 간파하고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한편 사코오가 가져온 쌍구가묵본 중에서 변조되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문구는 아래 문장입니다.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에 건너와 백잔(百殘)을 파()하고 0 0 0(3字缺)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위 문장은 태왕릉비문 중 가장 유명한 문장으로 일본의 강대함이 표현된 문장입니다. 이진희는 일본.중국에 전해진 여러 탁본들을 비교한 결과 후대로 갈수록 변자되고 명확해지는 이유를 들어 위 문장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변조되었는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가 없으니 관계자 입회하에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공동 조사하여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일본은 1883 년 쌍구가묵본을 얻은 후 전체 내용을 해독하기 위해 일본 내의 내로라하는 국학자들을 육군 참모본부 편찬과로 불러들였고 5~6 년 간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뜻이 통하지 않자 마침내 그 배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코오를 소환하여 120 여 매의 배열 등의 조언을 구하기까지 하였다고 하며 결국 위 문장이 비문에 새겨진 문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당시 횡정충직은 육군사관학교 교수 신분으로 참모본부 편찬과에도 복무하면서 해독 작업의 실무를 지휘한 자였고 해군 소속 청강수 등과 각각 태왕릉비문 석문을 썻는데 횡정이 청강의 것을 수정하였다고 하며 또한 횡정이 식민사관 중 핵심 내용인 임나일본부와 관련한 <임나고>를 작성하였다고도 합니다. 

 

결국 조선역사를 축소하기 위한 조작사관인 식민사관의 틀을 본격적으로 작업한 시기는 1883 년 태왕릉비문 탑본 입수와

더불어 시작되어 결과과 발표된 1889 년 사이에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오늘날까지 알게 된 횡정충직의 해독본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그는 먼저 1884 년 7~12 월에 영락태왕 비의 석문과 그 고증문, 영락태왕비문의 쌍구탑본을 가져온 밀정 사코오의 견문 보고에 기초한 <비문지유래기>를 쓰고, 거기에 그가 1882 년에 쓴 <임나고>와 <임나국명고>를 권말에 붙여서 참모본부 편찬과에 제출했었다.                            <광개토왕비의 탐구> 68 쪽 

 

또한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의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7 쪽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호태왕 비문과 <일본서기> 기술과를 결부시킨 연구로서 제 2 차 세계대전 후 가장 높게 평가된 것은 말송보화(학습원대학 명예교수)의 <임나흥망사>(1949)였다.

말송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묘년 다음 해에 해당하는 임진년(392) 겨울 10 월, 백제 진사황이 구원으로 사냥나가서 열흘이 지나도

          록 돌아오지 않다가 11 월 구원 행궁에서 돌아가 아신왕(아화왕)이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진사왕의 죽음과 아힌왕의

          즉위에 대하여는 <일본서기> 응신 3 년(임진)기에 `이해, 백제 진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귀국(일본)에 예를 잃은 고로 천황은

          기각숙미.우전실대숙미.석천숙미.목토숙미를 파견하여 그 무례를 꾸짖음. 이에 의해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이로써 사과함.

          기각숙미 등은 아화를 세워 왕으로 삼고 귀국하다`고 되어 있다. 진사왕이 죽은 해와 아신왕 즉위의 실정은 <일본서기> 기재를

          채용해야 할 것, 아울러 저 신묘년의 왜의 도해 결과의 하나가 이 백제왕의 교체로써 나타난 것, 비문은 사건이 시작된 해(신

          묘)에 걸어 기록하고 <일본서기>는 사건이 종결된 해(임진)에 걸어 기록한 것, 이것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정된 해석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즉 신묘년(391)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0 0 0(임나.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했다는 비문과 <일본서기> 응신 3 년(392)조의 기술과의 접점이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말송이 주장하는 391,392 년 사건의 전제 사건을 시기 순서대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신공 46 년(서기 246 년)조의 사마숙미의 탁순국 파견 및 47 년조의 백제의 공물을 신라가 빼앗아 천웅장언을 신라에 파견했다는 기술, 특히 49 년(249년)조의 황전별 등이 일본에 온 백제의 사자 구저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현지의 백제 장군 목라근자와 합세하여 신라를 치고 비자벌 이하 7 국을 평정하고 비리 이하 4 읍을 항복시키고 나아가 남쪽의 탐미다례를 쳤다는 기록에서 7 국인 비자벌.남가라.훼.안라.다라.탁순.가라 등은 낙동강 유역의 요지로 옛 변한의 가야 전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왜.대화 정권은 369 년에 가야 전역을 평정하여 영토로 삼고 통치기관으로서 임나일본부를 두었으며 이어 391 년에 또다시 대군을 보내어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중국의 동시대 문헌 자료에 근거하면 왜가 대한반도 등으로 대군을 보낸다는 것이나 그 대군이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일본.왜의 꿈일 뿐입니다.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신공 49 년인 249 년 사건 기록을 이주갑 인상 곧 120 년을 늦추어 369 년의 역사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쌩뚱맞은 덧해석을 한 것이니 참으로 낯 뜨거운 억지주장인 것입니다. 즉 일본인들이 신뢰한다는 <일본서기><고사기> 등을 역사서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진희는 신묘년 문구 뿐만이 아니라 다른 비면의 비문도 변조.조작된 것이 분명한 만큼 한.중.일 삼국이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공동 조사하자는 것이였으며 공동조사 이전까지는 그 어떤 해석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우 정확하고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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