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년 12 월 17,18 일 개최되었다는 고구려사 학술회의에서 노태돈은 <고구려인의 종족적 기원>을 발표했다는데,
2008 년 11 월 7 일 대한민국 동북아재단이 발행한 <초기 고구려역사 연구>에는 노태돈 본인의 의사에 따라 수록되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내용을 왜 수록하지 않는가?
학문적일 내용이 아닌가?
중국에 이쁨 보이려는 구절이라도 있는가?
발표를 하고도 그 논문을 싣지 않는 것이 상식.순리적이라 보는가?
동북아재단은 왜 비상식적인 노태돈의 의사를 존중하는가?
길림대학 교수라는 위존성魏存成은 <고구려의 흥기와 현도군과의 관계> 제목의 논문에서, 고구려 정권은 한나라로부터 당나라에 이르는 오랜시기 동안 압록강 양측의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의 북반부에서 700 년간 존속하였다고 하였다.
또 요녕성문문연구소 연구원 李新全도 <고구려의 초기 도성과 천이> 제목의 논문에서, 고구려의 초기 도성은 국내외 학자들이 1 세기의 노력을 거쳐 대부분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동부산구에 자리하고 있는 환인현 오녀산성으로 보고 있다고 하였다.
노태돈은 동북공정 논리를 막지 못한 책임감을 느끼고 공개하지 않은 것인가?
그 학술회의에 참석한 조법종은 <고구려 초기 도읍과 비류국 연구> 제목의 논문에서,
... 첫 도읍 흘승골성의 경우 현재의 오녀산성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졸본부여의 경우 여러 논의가 진행되고 있고 ... <광개토왕릉비문>에는 비류곡 홀본 서쪽 산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로 해석된다. ...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시조 추모왕의 죽음과 관련된 지역으로 `홀본 동강`이란 장소가 제시되고 있는 점이다. 즉 앞서 도읍을 정한 홀본 서 산성에 대비되어 홀본을 사이에 두고 홀본 동강에서 시조는 승천이란 표현으로 죽음을 맞이해 장례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주몽은 `비류곡 홀본 지역의 서쪽 산성`에 도읍하였음을 보여준다. ... 한국측 사료에 나타나는 홀본이나 졸본과는 달리 중국 사료에서는 흘승골성으로 고구려 도읍지역에 대한 표현이 간단히 나타나고 있다. 또한 주몽이 흘승골성에 이르러 거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이 사료만 보면 이미 존재하는 흘승골성을 주몽이 활용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압축적으로 정리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성의 수축과정에 대한 기록이 생략된 것으로 파악된다. ... 20 세기 초 이후로 백조고길.위존성.이전복 등 학자들이 모두현재의 오녀산성을 흘승골성으로 파악하였고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단 경철화의 경우 흘승골성을 현재의 하고성자고성下古城子古城으로 보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으나, 전후 자로를 고려할 때 오녀산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파악된다. ...
라며 일본.중국인들의 주장을 반복하였다.
또 김기흥은 중국인과의 학술회의에서 뜬금없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보이는 주몽의 출자 계보 구조>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단다.
대체 왜들 그러나?
왜 중국인들의 주장에 동조하며 영양가 없이 쓸데없는 주댕이질만 하는가?
고구려 강역이 어디인 줄 정녕 모르는가?
고구려가 서쪽으로 마주한 한漢나라 요동군 위치와 요동군으로 흘러내린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가 지금의 어느 물길인지 가늠이 안된단 말인가?
<한서/지리지> 우북평군 백랑현의 백랑수, 요서군 비여현 주석의 난수濡水, 요동군 망평현 주석의 1250 리 길이 대요수, 현토군 서개마현에 주석된 2100 리 길이 염난수, 현토군 고구려현 주석의 요수 등을 정녕 모르겠다는 말이냐?
식민사관은 물론 동북공정까지도 맹종하는 한심한 인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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