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 갉아먹는 불평등한 사회 “그러므로 형평성 형평성 형평성!” [.txt]
차별이 온몸을 마모시키는 ‘웨더링’
질병을 ‘각자 탓’으로 돌리는 사회 짚어
“가장 무시받는 이들 맞춰 대안 찾아야”
- 수정 2025-04-11 09:09
- 등록 2025-04-11 05:01



정치학으로 공부를 시작한 알린 T. 제로니머스(미국 미시간대 교수)는 행동과학을 거쳐 공공보건학에 연구의 뿌리를 내렸다. 불의하고 불평등한 사회가 어떻게 개인과 집단의 건강을 해치는지 입증하는 데 주력해 왔다.
그의 1985년 박사학위 논문은 미국의 흑인과 백인 영아 사망률의 차이를 다뤘다. 전자가 후자보다 높다는 사실과 산모 나이의 상관관계를 추적했다. 출산 경험이 있는 백인 여성 중 10대에 첫 아이를 낳은 경우가 18%일 때 ‘흑인 10대 엄마’는 45%였다. 당대의 논리는 ‘문란한 성생활로 생식 기능이 성숙하기도 전에 출산한 흑인 여성과 그 딸을 잘못 키운 부모’를 비난했다. 이 진단은 공공 교육프로그램 시행으로 이어졌고 10대 출산율은 감소(흑인·백인→16%·7%)했다. ‘비난 내러티브’의 효과는 거기까지였다. 그동안에도 흑인 영아 사망률은 백인보다 2배 높았고 심지어 흑인의 경우 10대 산모의 아기가 가장 건강했다. 백인은 20대 엄마의 아기가 10대 엄마의 아기보다 건강했지만 흑인은 산모 나이가 많아질수록 영아의 사망 위험도 커졌다. 유전학이나 개인의 생활습관에서 건강 격차의 원인을 찾으려는 집착이 “우리 눈을 가려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제로니머스는 판단했다. ‘다른 원인’을 찾아 데이터를 모으고 연구를 거듭하며 그가 창안한 개념이 ‘웨더링’(weathering)이었다.
웨더링. ‘풍화’나 ‘침식’ 또는 ‘마모’를 뜻한다. 불평등한 사회가 인간의 몸을 갉아먹고 소진시키는 현상을 그는 이 한 단어로 압축했다.
“웨더링은 인종, 민족, 종교, 계급 차별에 의해 공격당하는 소외된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생리학적 작용을 포괄하는 과정이다. 웨더링은 한 인간이 인종차별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인 사회에서 자라고, 성장하고, 노화하는 동안 세포 단위에 이르기까지 온몸을 구석구석 괴롭힌다.”
제로니머스는 웨더링의 핵심 동력으로 ‘인종’과 ‘인종화’를 꼽는다. 그에게 인종은 “권력자들이 피부색(또는 종교, 계급, 민족, 젠더, 성적 지향 내지는 성적 정체성)에 임의적인 구분선을 긋고 자신들이 보기에 ‘틀린’ 쪽에 서 있는 일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인종화는 “지배문화가 그 사회의 집단들을 자원, 명예, 권력을 누릴 자격 내지 권리가 있는 집단과 없는 집단, 경멸·처벌·박탈·낙인·탄압·착취를 받아 마땅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나누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인종 자체가 아니라 인종화가 개인과 집단의 건강을 손상시킨다고 본다. 백인과 달리 유독 흑인 산모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아기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이유도 웨더링(엄마의 사회적 스트레스 지속·반복 노출)에서 찾았다. 그는 영아 사망률에서 분석 범위를 넓혀 질병과 죽음을 ‘각자 탓’으로 돌리는 ‘인종화 이데올로기’(인종차별주의, 계급주의, 성차별주의, 연령주의, 외국인 혐오, 동성애 혐오 등) 전반을 파헤친다.
그의 연구는 미국 내 이민자 차별이 신생아들에게 미치는 해악도 경고한다. 2008년 5월 헬기에서 내린 이민세관단속국 무장 요원들이 아이오와주의 작은 시골 마을 육가공 공장을 덮쳐 라틴계 미등록 체류자 400여명을 체포했다. 제로니머스는 이듬해 1월까지 아이오와주 라틴계 산모들의 저체중아 출산 비율이 급격히 치솟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충격적 뉴스만으로도 그들은 ‘생리학적 위협’을 받았다.

웨더링은 ‘노오력’도 집어삼켰다. “타자화되고 폄하 당한 집단의 구성원이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거나 강력한 역풍에 맞서 성공해야만 하”는 능력주의 사회는 웨더링과 톱니바퀴로 물려 돌아갔다. 개인의 교육과 경제 수준이 올라가면 기대수명도 늘어날 것이란 ‘에이지워싱’(age-washing·건강 훼손을 구조적 차별이 아닌 각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고방식을 개념화한 제로니머스의 용어)의 메시지가 팽배할수록 성실한 사람들이 건강을 빼앗겼다. 흑인 여성이자 세계적 테니스 선수인 세리나 윌리엄스가 산후 혈전으로 생사를 오간 일도 제로니머스는 “웨더링의 발현”으로 해석했다.
인종화의 표적이 비백인만은 아니었다. 켄터키주 애팔래치아 산맥의 오슬로 카운티에 사는 가난한 백인들도 웨더링으로 고통받았다. 16살을 대상으로 ‘65살까지 생존 기대치’를 묻는 조사(2000년)에서 미국 평균 백인층의 12(여성)~20%(남성)가 ‘그때까지 못 살 것 같다’고 답한 반면 ‘힐빌리’ 또는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라 불리는 그들은 18(여성)~29%(남성)가 그렇게 답했다. 웨더링 폐해가 민주주의마저 허물 수 있다는 사실은 격차 해소 대신 그들의 불만만 정치적으로 이용한 트럼프의 두 차례 대통령 당선에서 확인됐다. 그들의 분노를 ‘확실한 내 편’으로 붙잡아 두기 위해 트럼프가 낙점한 힐빌리 출신의 성공한 변호사는 부통령 벤스다.
“웨더링을 당한 몸은 감염병이 유행할 때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는” 진실은 코로나 팬데믹 당시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국 사회에서 웨더링을 입증하는 조사 결과는 차고 넘친다. 고용 형태가 불안할수록 우울증 유병률은 높았고(정규직 15.7% <계약직 16.3% <비정규직 17.1%, 2005년 조정진 한림의대 교수 연구), 성소수자 노동자의 자살 시도는 일반인구에 비해 4.5배(2025년 4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성소수자 노동자 노동실태 및 정신건강 연구’) 많았다. 심한 불안과 우울을 경험한 이주민 비율(34.9%)은 내국인(11.2%)보다 3배 이상(2020년 국가인권위 ‘이주민 건강실태와 의료보장제도 개선방안 연구’) 높았다.
“웨더링 작용을 중단시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평한 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걸음”이라며 “형평성 형평성 형평성”을 외치는 제로니머스의 제언은 한국에서도 절실하다.
“웨더링을 근절하려면 어떤 정책안이나 프로그램 기획안을 평가할 때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이해관계자들을 위한 형평성을 구현하는 데 기여할지 못할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정하든 안 하든 우리 모두의 운명은 연결되어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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