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김정호가 1860년 쯤 제작하였다고 알려진 <대동여지전도- 이하 대동도라 약함>다.
- <대동여지전도>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위 <대동도>가 조선 강역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라고 인식한다.
또한 아래는 <대동도> 보다 약 50 년 쯤 앞서서 간행된 한치윤.한진서 <해동역사/지리고>에 실린 <한 나라 시원 이후의 이군도- 이하 이군도>다.
- <이군도> 1823 년
위 <이군도> 역시 지금의 요하.압록강.백두산과 대한반도 지역을 묘사한 것이라고 인식한다.
결국 한국사학계는 1780 년 박지원이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심양을 거쳐 산해관으로 들어가 연경에 이른 후 열하까지의 로정을 아래 실선 표시와 같았다고 한다.
- <연행로>
과연 조선 강역이 지금의 대한반도에 그쳤으며 서기전 108 년 설치되었다는 한나라의 낙랑군이 지금의 대한반도 평양 지역일까?
아래는 2007 년 한국보물 1537 호로 지정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이하 서북도>다.
- <서북도>
아마도 한국역사학계는 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와 같은 고지도 등에 근거하여 <대동도><이군도> 역시 역사사실을 정확하게 묘사한 고지도라고 인식할 것이고 또한 박지원이 건넌 압록강.요하도 지금의 압록강과 요하라고 주장할 것이다.
아래 고지도는 지도의 제목이 없어
나는 <백산대맥도>라 명명하는데
1750 년 경 조선 영조시기 홍문관에서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 같다.
- <백산대맥도>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국립중앙도서관/웹지도검색/ 5. 산해관요동성경흥경영고탑
http://www.dlibrary.go.kr/Map/HISM_ViewerFrame.jsp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싸이트를 열람하니 개편하여 찾을 수가 없슴)
위의 두 고지도 <백산대맥도>.<서북도> 차이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한반도 북반부 부분의 묘사 여부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지역을 묘사한 지도라고 인식할 것 같다. 하지만 두 지도가 묘사하는 범위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엄청난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 <서북도>가 묘사하는 범위
위의 <서북도><대동도> 등의 고지도에 익숙한 우리 한국인들은 <이군도>에 표시된 낙랑군 조선현 지점을 당연히 지금의 대한반도 평양 부근이라고 인식할 것이고 박지원의 연경행로도 위의 <연행로>와 같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백산대맥도>는 아래의 실선 지역을 묘사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밖에 없다. 그 근거는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 기록이다. 즉 당시의 요하는 지금의 란하였었다.
- <백산대맥도>가 묘사하는 범위
조선 강역은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청국의 동북쪽 지리를 정확하게 인식하면 저절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데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 기록데 의하면 청나라가 설치한
직예성.봉천성.길림성.흑룡강성의 위치는 아래와 같았었다.
따라서 김정호의 <대동도>, 한진서의 <이군도>, 한국보물 1537 호 <서북도> 등 3 개 지도는 청국 강역을 늘리고 동시에 조선 강역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변조된 조작도가 명백하고 박지원을 위시한 조선 시기의 연경행 로정은 아래와 같았다.
- 연경로정
아래는 1621 년 명나라 사람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다.
- <조선도>
거의 대다수 한국인들은 위 <조선도>를 지금의 대한반도에 있던 조선의 지리를 묘사한 것이라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대한민국지도에 익숙하기 때문일 뿐이다. 위 <조선도>는 아래 적색 실선 지역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한진서가 묘사한 <이군도>의 묘사 범위도 한국사학계가 인식한 지금의 대한반도일 리가 없고 아래 지역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치윤.한진서는 조선과 관련한 중국 문헌 기록만 발췌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였고 두 사람 모두 연경사신단의 일원으로 의주에서 북경까지 다녀왔기 때문에 당시의 요동과 요하를 모를 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저들이 약도로 지목한 낙랑군 위치가 지금의 평양이겠는가?
다만 한진서는 염난수와 관련된 마자수.서안평 등의 위치에 대해서만큼은 잘못 인식하였다. 즉 마자수는 패수로, 서안평은 안평으로 표시해야 옳고 혹 마자수.염난수 두 이름을 정확한 위치에 표시한다 해도 마자수는 최상류 지류이고 염난수는 2100 리 길이의 본류로 인식했어야만 했다.
또한 한국사학계의 일부는 정약용이 왕검성.평양성을 대한반도의 평양 지역이라 주장했다고 명시적으로 비난한다. 하지만 한진서.한치윤을 포함하여 모든 조선 선학들의 경우와 같이 정약용도 평양을 당연히 지금의 중국 요녕성 건창현 부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왜일까?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청나라의 모든 지리지와 고지도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당시의 요하는 지금의 란하이기 때문이다.
한편 신채호 선생이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고 언급한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요수가 청 시기의 란하라는 뜻이 아니라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1920 년 대에는 일본이 청 시기의 란하 중.하류를 지도에서 삭제하고 란하 상류를 황하 상류.요하 중류로 인위적으로 연결한 조작 작업을 이미 끝낸 시기였기 때문에 청.명 시기는 물론이고 수.당 시기와 더 거슬러 올라 한 시기의 요수도 지금의 란하이며 1920 년대 당시의 란하라며 정확하게 고증한 것이다.
이러한 지도 조작 정황을 모르고 문성재는 춘추전국시대의 요수를 중국 정사 지리지 기록과 같이 지금의 란하라고만 인식하였으니 란하 동쪽에 흘러내렸던 요하는 당연히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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