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수왕이 선왕인 광개태왕의 릉과 비를 조성한 곳은 어디였을까? 지금의 중국 요녕성 집안현 지역일까? 아니다. 앞에서 누누히 추적한 것과 같이 청 시기는 물론이고 수.당 시기의 대요수.요하는 지금의 란하 중류 지점 북쪽과 서북쪽 지류였기 때문에 광개태왕릉과 비가 조성된 위치 곧 청국 시기의 봉천성 흥경부 통화.회인현 역시 지금의 요녕성 서쪽 지역에 표시된 능원과 평천 사이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장수왕은 선왕인 광개태왕의 릉과 비를 국내성 부근에 조성하였고 이 국내성 위치는 청 시기에 이르면 흥경부 통화.

회인현 지역이 되는데 이 청 시기의 통화.회인현 위치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집안현 부근이 아니라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와 지금의 중국전도에 의하면 청 시기 직예성 승덕부에 속한 평천현 등의 명칭을 그대로 습용하고 그 위치만 동쪽으로 이동시킨 지금의 평천과 지금의 능원 사이 지점이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러한 약간 복잡한 상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 릉비 반출과 이동

 

아래는 고구려 광개태왕릉비 발견과 관련하여 일본인 시각 중 가장 객관적 것이라 본다. 

 

그런데 1913 년에 학자로서는 맨처음으로 비를 조사한 금서룡今西龍은 고로의 이야기를 토대로, `이 비는 30 년 전까지는 돌 위에 이끼가 무성하여 문자가 유존하는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은 것을 그 지현의 명령을 받들어 이끼를 불에 태워 없애버리고 문자를 노출시켰는데, 그 때 비의 일부를 훼손시켰으며 이후 이 비 곁에서 탁본 작성에 종사하였다 한다. 이 비는 거대하고 매우 안정감이 들기 때문에 원래 쓰러져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초망의 사이에 있던 것을 광서 3 년(1877) 변경 개척을 위하여 환인현이 설치된 이래 ..... 문자 있는 관민의 왕래가 있고부터 세상에 알려지기에 이른 것이다. 그 연대는 명치 15 년 경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라고 종래 일본 학계에서 이야기되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표시했다.                                                                                             

 

그러면 그 이전 일본 내에서의 릉비 발견과 관련한 정황과 인식은 어땟을까? 

 

일본에서 발표된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1888 년 11 월에 나온 둔강양필의 <고구려고비>(여란사화 권 8)로서, 거기에는 `이 비는 조선국 압록강 북쪽 통구 땅에 있으며, 근년 땅 속에서 파낸 것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1889 년 6 월에 출판된 <회여록>제 5 집에는 현지 사람의 얘기로서, 땅 속에 묻혀 있던 비가 3백 년 쯤 전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전년 천진의 공인 4 명이 이를 파내어 2 년이나 걸려서 비면을 닦아냄에 따라 이윽고 비문이 판독되게 되었으며, 마침 현지에 갔던 일본인 모씨가 공인이 만든 탁본 2 폭 중 한 폭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고 쓰여져 있다.

 

다음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인 관정우의 <고려호태왕비명고>(사학회잡지 제 22~25호 1891 년)에는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명치 15,6(1882~1883) 경에야 파낸 것이다`라고 되어 있고 그 2 년 뒤인 1893 년에 쓰여진 나하통세의 <고구려고비고>(사학잡지 제 47~49호)에는 `이 비문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명치15,6 년 경으로`라고 쓰고 있다.

 

한편 1898 년에 발표된 삼택미길의 <고려고비고>(고고학회잡지 제 2 편 제 1~3 호)에는 비가 1882 년에 발견되었다고 기록하고, 계속하여 `이 비는 무릇 1 천 5 백년의 성상을 거쳐 특히 흙 속에 매몰되고 또한 수류에 부딪혀 씻겼으므로 비면이 결손된 바 있을 뿐 아니라 그 남아 있는 부분도 요철이 심하게 되었으므로 큰 종이를 사용하여 한꺼번에 탁본할 수 없어서 여러 장의 조그만 지면을 사용하여 많은 시일을 소비하고서야 겨우 두 탑본을 얻었다고 한다.                                                                                                   

 

위의 인용문 4 구절은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이진희 저 이기동 역 1982 년 일조각)  48,49 쪽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 이진희가 한국어판서문에서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고고학이 전공이었으나 일본 학자들의 이와 같은 교만한 연구자세를 묵과할 수 없어 그들이 이용해 온 근본사료에 대한 검토를 시작하였다. 20 수 년 전의 일이다. 광개토왕릉비를 두고 본다면 일본과 중국, 우리 나라 학자들의 연구논문, 그리고 탁본과 사진 자료 등의 수집과 비교검토에 10 여 년을 보내어 1972 년 10 월, 그 결과 <광개토왕릉비의 연구>에 묶어 간행하였다.

 

그 속에서 나는 비의 재발견은 통설과는 달리 1880 년이었고 비면을 뒤덮고 있던 이끼 등을 불태워 쌍구본이 작성된 것은 1882 년이며, 이 쌍구본이 북경의 금석학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1885 년이었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이어 비면에는 1900 년이나 그 전해 경에 전면 석회를 칠해 원비문과 다른 `비문`을 새겼으며 원비면에서 뜬 탁본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 만주에 스파이 행각을 한 일본의 주구중위가 1883 년에 갖고 간 비문(쌍구본)은 비문을 읽을 수 있게 된 직후(1883년 4~6월)의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일본 참모본부편찬과에서 그것을 해독.해석했다는 사실을 10 여 종의 해독본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해명하였다.

 

또한 석회를 칠한 얼마 후에 비문의 일부를 수정하거나 첨가한 사실도 명확히 하고 이런 짓을 한 것은 일본 참모본부라는 것을 여러가지 상황증거를 들어 논했다. 그리고 탁본의 비교검토를 통해, 비문의 일부를 변조한 것은 주구酒勾였다고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비면의 과학적인 조사를 제창함과 동시에 `출병과 지배`설을 근본부터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였다. 

 

위 인용문들은 재일 고고학자 이진희가 광개태왕릉비문의 변조에 촛점을 맞추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글이다. 하지만 필자는 비문의 변조보다는 광개태왕릉비 자체가 반출.이동된 것에 더 주목한다.

 

사실 이진희는 일본이 청국 지리를 삭제.확산이동 시킨 것을 상상이라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즉 이진희의 지리인식은 일본이 조작한 식민사관 지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어쨋든 이진희는 러일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05 년 8 월 일본 내에서 동양사의 대가라는 백조고길(학습원 교수, 뒤에 동경제대 교수)이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 비문이 유명한 것은 조선 남부에 치우쳐 있는 신라.백제.임나 3 국이 일본의 신민이었음을 명백히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상 매우 가치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 역사에도 이 3 국이 일본에 조공했다든지, 혹은 속국이 되었다든지 하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일본 역사 등은 소위 전설이며 역사상의 가치가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 비문은 당시에 있어서 가장 신용할 역사상의 유물이다. 이에 의해서 일본이 조선 남부를 지배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 중요한 재료를 제공한 것이다. 나는 이 비를 일본에 가지고 와서 박물관이나 공원이나에 세우는 것은 실로 재미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영국이라든지 독일.프랑스 같으면 몇만 원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자기 나라에 가지고 왔을 것에 틀림없다. 다만 이 비문에는 일본에 재미 없는 사실이 적혀 있다. 당시 일본은 삼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지만, 북부의 고구려와는 반대의 지위에 위치한 것이다. 고구려라고 하면 마치 지금의 러시아와 같은 관계로서, 일본이 반도 남부에 세력을 얻으려 하면 고구려가 이를 좌절시키려 하고 있다. ... 그 관계는 마치 일본이 지금 조선을 충분히 제압하려면 북쪽의 러시아를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일본은 조선에 세력을 얻고 싶은 희망때문에 압서는 지나와 싸우고, 지금은 러시아와 싸우는 것처럼, 정치상의 관계에서 일본은 고구려와 싸움을 벌렸던 것이다. `                                 <백조고길전집 제 5 권>

 

`백조선생은 오래전부터 교장 안팎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바 압록강의 한 지류인 동가강 상류지방에 있는 고려 광개토왕의 사적을 새긴 석비를 발굴 운반하는 계획이 무르익었다 하여 이에 일행과 떨어져 단독으로 입한의 길에 올랐다. 우리들은 7 시 봉천을 출발,철령을 향해 진행하여 남북으로 서로 헤어졌다.`                                  <만선여행기념호, `만선여행일기`1906.7.29>

 

이어서 이진희는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1915 년에 발간된 <집안현향토지>에는 집안현지사인 오광국이 봉천제학사에게 보낸 1907 년 5 월자의 주목할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의하면 오광국은 일본군 제 57 연대장인 소택덕평 대좌가 와서 비를 `일본박물원(당시의 제실박물관, 현재 동경국립박물관)에 진열하고 싶으니 팔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그 비는 민간의 것이며 더우기 비석은 묵직하므로 둔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하자, 소택은 병륜(군함)과 비교하면 석비의 무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군함이 침몰한다 해도 끌어 올릴 수 있으므로 병력을 동원한다면 석비는 아주 쉽게 반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용의심심함을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본군이 또 반출하려 올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비를 사들여 그 곳에 정을 세워 이를 보호한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103,104 쪽

 

또한 `광개토왕릉비를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해 해군이 압록강 하구까지 군함을 돌려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연구자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 당사자의 한 사람이었던 압상삼장(1855~1927) 퇴역 중장은 1918 년 10 월 일본역사지리학회 예회 석상에서 그의 현역시대에 비를 운반할 계획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릉비 반출은 기획.추진되었고 이후 어느 시점에 일본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집안현으로 반출.이동된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위치로 이동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청국 직예성 지역을 흘렀던 란하.황하.요하.압록강 등을 삭제.확산이동시킨 지리가 조작이 아니라 역사사실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증거물로 쓰기 위해서다. 즉 이조선은 물론이고 중국의 역대 지리지에 전혀 언급된 적이 없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집안현 남쪽에 흐르는 강물을 역사 기록의 압록강으로 확고하게 인식시키려면 이조선.청국 문헌에 설명된 고구려 시기의 광개태왕릉비를 일본으로의 반출이나 혹은 땅에 파묻지 않는다면 새로운 압록강 부근으로 이전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위치의 태왕릉비는 조선 역사를 축소하기 위한 사기성 쓰레기 술수.조작의 증거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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