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발해의 서경 위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아래는 그의 저서 <강역고/발해고>에 있는 그 고민의 일단입니다. 

 

요의 녹주는 곧 발해의 압록주인데, 신주에 치소를 두었다. <당서/지리지>에는 환도성에서 동북쪽으로 200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에 이르고, 400 리를 육지로 가면 현주 중경에 이른다고 했다. 그러니 이른바 신주 서경은 마땅히 지금의 우예자성 북쪽 강 건너 땅에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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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성이 만일 동경이라면, 중경은 마땅히 지금의 우장과 해성 사이에 있었을 것이고, 남경 남해부는 금주.여순 어귀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동.서.남.북의 이론과 실제가 서로 맞을 것인데, 여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른바 서경 압록부는 동경 동쪽 몇백 리 밖에 있다. 속말의 서생이 아무리 배운 것이 적더라도 동쪽을 가리켜 서쪽이라 하고 북쪽을 남쪽이라 하여 이처럼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추정지도 - 1830 년 대 청나라 역사지리가들과 정약용 등 조선 선학들이 인식한 지리

 

 

 

 

위 추정지도와 같은 지리를 인식하였던 정약용은 당시로부터 약 1000 년 전의 고대국 震진 곧 발해의 상.중.동.서.남경 등을 청국 시기의 봉천성 곧 요동과 길림성 길림부를 벗어나 훨씬 동쪽 지역인 영고탑이 있는 길림성 영안부 지역 중심으로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학계에서는 명.청 시기의 요하를 지금의 요하였다고 단정하기 때문에 정약용 등이 인식한 진의 5 경 위치도 지금의 길림과 지금의 압록강 주위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약용 등 조선 선학들을 명백하게 욕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아이들이 꼭두각시국 만주국을 세우고 1934 년에 만주국지도를 만들면서 위 추정지도에 적색으로 표시된 난수.란하를 지도에서 지우고 그 이름을 동쪽으로 옮겨 원래의 요하 위치에 란하라고 표시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 선학들이 인식한 요하는 현대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지금의 요하일 수가 없고 지금의 란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신채호가 <조선상고사> 등에서 고대의 요수는 란하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청국이 멸망하는 1911 년 당시 난수.란하를 비롯하여 그 동쪽에 아무 문제없이 약 2100 여년 동안 흐르고 있었던 대릉하.요하.압록강.살수.대동강.소양강 등도 차례대로 동쪽으로 약 2000 여리 씩 이동되어 지금의 대릉하.지금의 요하.지금의 압록강.지금의 청천강.지금의 대동강.지금의 소양강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 시기 간행된 아래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지금의 요하.압록강.흑룡강 등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고지도 - 1751 년 조선 영조 26 년 제도된 것으로 알려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원본 2 부

 

 

주)               산해관                            요하      심양  흥경압록강 길림부           백두산흑룡강영고탑(길림성영안부)     

 

 

 

                          

 

 

주)     산해관                       요하              압록강 송화강 백두산(장백산)토문강 호이합하   흥개호    오소리강             흑룡강

 

또한 명 시기 간행된 아래 조선도에 표시된 바다.압록강.대동강.소양강 등도 지금의 요하.압록강.대동강.소양강 등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쪽 끝에 흐르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와 그 동쪽 지류인 지금의 청룡하 및 지금의 대릉하를 묘사한 것이며 대동강은 1:550 만 축척의 현대 중국지도에는 표시될 수 없는 아주 작은 지류였습니다.

 

 

고지도 - 1621 년 명나라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

 

 

주)   바다(灣.요하하류) 압록강 고려서경대동강                        조선-개성                       소양강                   바다(지금의 요하)

 

 

 

 

 

 

그러면 정약용의 진국 5 경 비정은 정확하였을까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진국은 요동 지역을 거의 차지하였고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에 주석된 염난수 곧 진.발해 시기의 구려하.서압록강이 발원하여 전.후한 시기 요동군 서안평현을 경유하는 지역 부근에 서경 압록부를, 요동군 요양.요수현 남쪽인 청 시기 해성현 지역에 남경 남해부를 설치하였었고 중경은 왕검조선의 태백산 아사달 지역에, 상경.동경은 숙신.읍루 지역인 청 시기 길림성 쌍성부와 영안부에 설치하여 당시의 철리.월희.흑수말갈을 통령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정약용은 진국이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국이 멸망하고 약 200 여년이 흐른 후 편찬된<삼국유사>에서 당시의 요하를 압록강.안민강이라고도 하였다는 설명과 같이 거란.요국 및 고려 시기의 요하는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명백하게 <한서/지리지>의 염난수일 수 밖에 없는데 이 염난수는 <한서/지리지> 기록 직후 그 이름이 잊혀졌고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곧 진국이 건국한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압록수가 동남쪽에 따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압록수.구려하.안민강 등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진국은 한 시기의 현토.요동 전지역인 거란.요국의 동경요양부 전체와 서쪽으로 더 나아가 상경 임황부 동쪽 지역까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국의 압록수인 전한 시기의 염난수는 고구려의 국내성 남쪽을 흐르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압록수와는 전혀 다른 압록수로 고구려 압록수의 서북쪽 지역에서 대략 정남류하였으며 그 발원지는 <통전/동이하/고구려> 기록과 같이 말갈 지역의 백산 곧 <청사고/지리지> 기록과 같이 청 시기 봉천성 창도부 요원주에 있는 고열눌와집이였고 청 시기 요하의 동쪽 상류인 동요하.혁이소하였습니다.

 

이 동요하는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에 주석된 마자수로 청 시기 서요하.신요하로 명시된 물길과 합쳐서 요하가 되었으며 전한 시기의 염난수인데 대략 정남쪽으로 흘러내리다가 요동군 서안평현을 경유한 물길이였고 당 시기 두우가 편찬한 <통전> 설명과 같이 고구려가 차지한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며 고구려 땅 중앙을 흘러내리는 압록수 곧 동압록과 합쳐진후 안평현을 지나 바다를 들어갔던 것입니다. 

 

아마도 요동군 서안평현은 고구려의 안평현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왕망이 북안평으로 개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쨋든 전한 시기의 염난수이며 진국의 서압록은 거란족이 진국을 꺽고 굴기한 이후에서야 요하로 개칭되었으니 <삼국유사>에서 요하는 압록강.안민강이라고도 하였다는 설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당 시기 <통전><신당서> 등에서는 진국의 서압록과 고구려의 동압록수를 혼동하여 영주에서 진국으로 향하는 이정을 동압록을 경유하는 신주.서경압록부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진국의 서경압록부는 고구려의 국내성 남쪽을 흐르는 압록수 부근이 아니라 전한 시기의 염난수 곧 요동군 서안평현 부근에 설치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백랑수 추정도 - 진국 5 경 위치와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중심지와 확장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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