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팔참]
봉황성에서 심양까지는 닭보다 꿩이 많다고 하면서 백지 1 다발이면 생꿩 1 마리를 바꾸니 종이가 귀하고 꿩이 천함을 미루어 알만하다. 또한 누에가 많아 실을 뽑고 방직하는 일을 전부 남자가 한다. 이처럼 동팔참은 책문 이후부터 요야에 이르기 전의 지역을 가르키는 것으로 영이 주가 되어 이루어진 지형으로 요야와 구별해서 불리었다.
< 이승연 성균관대학교 건축학 석사논문 연행록연구총서 9 284 쪽>
최부 <금남표해록>1488
해주.요동 등지의 사람들은 반은 중국인이고, 반은 우리나라 사람이고, 반?은 여진 사람이었다. ... 석문령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荷谷 허봉 선조 원년(1567) 진하 부사
동팔참의 땅은 산동에 예속되어 요동의 외요가 되며, 산천은 우리나라와 꼭 같아서 준엄한 영과 큰 하수가 많다.
김창업 (1712) - 봉성에서 요동까지
홍대용 (1765~1766) - 책문에서 백탑보까지
김경선 (1832)
책문에서 영수사까지로 하루 2 참씩 합하여 8 참이 되어 이름지은 것이다. 팔참이 사이는 높은 산과 험한 고개, 큰 내와 깊은 숲이 많아 길이 매우 험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수레를 뒤집을 염려가 있다. 대개 그 난립한 산 중간에 널려 있는 들판이 많다.
채제공 <含仁錄> 17
(금석산에 머무르면서)
내 땅이면서 내것이라 못하는 땅 칼집 속에서 용의 울음만 듣는다
吾土末能爲我有匣中虛聽劒龍吟
책문을 넘어서면 청나라의 실질적인 영토 내에 들어간다. 그러나 조선인의 왕래가 심양까지 이러렀으므로 이 지역까지 영향력권으로 묶을 수 있다. ... 이후 책문에 들어서면 후대로 갈수록 사행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생업으로 하는 호인들로 붐빈다. 이를 입증 해주는 것으로는 연행록의 호수 기록을 들 수 있는데, 김창업(1712)은 10 여 호, 김순협(1729)은 12, 3 호, 박지원(1780)은 2,30 호, 김경선(1832)은 3,40 호로 기록하고 있다.
<이승연 성균관대 공학 석사 논문>
홍대용 <당헌연기>
책문은 변방의 황폐하고 궁벽한 지방으로 습속이 유치하고 사나우며, 입고 먹는 것을 오로지 조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행이 도착할 때마다 땔나무 같은 모든 물건의 값이 때를 틈타서 마구 뛰어오르고 방세도 매우 비싸게 받는다. 의주 사람들과는 이웃처럼 친숙하게 지내며 우리 나라 사정을 잘 알고 있어, 이해 타산에 밝고 교활한 것이 모두 우리 나라 풍속 그대로다. ... 북쪽 풍속은 사람을 비켜 세우는 법이 없는데, 오직 봉성 사람들만은 우리 나라 사정을 익히 알고 있어서 성장이 자나갈 때면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소리절러 길 아래로 비켜 세웠다. ... 책문을 열자 수백 명의 청인과 산서 상인이 몰려 나왔다.
유득공 <연대재유록>
책문의 호인은 사납고 거세어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매우 무례한데, 이 두 사람은 사람을 대접할 때에 예의가 매우 정성스럽고 도타우니, 풍속이 변방과 크게 다름을 알겠다.
[송참]
여기에 오면 비로소 소나무가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이 송참이라 불렀다.
[연산관連山關]
김정중 <연행록>
옛 鵝골關이다. 원발점에 들어가 말을 쉬게하고 좌우의 가게를 찾았다.
가는 곳마다 가게 주인이 한 잔의 차를 내어 들기를 권하니, 제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예절이 있다. 문 위 춘첩자가 있는데, `문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복을 받고 호는 동.서.남.북의 재물을 들이다`는 글귀가 우리 나라의 저자문에 붙은 축어와 비슷하다.
[분수령分水嶺]
권협 <연행록>
분수령 이북의 지세는 북쪽에서 내려와 골짜기의 여러 물이 모두 태자하에 모여서 서쪽 혼하로 들어가고, 분수령 이남의 물은 모두 팔도하로 모였으니, 분수령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김창업 <노가재연행록>
분수령은 평찬하며 서쪽 물은 요하로 들어가고 동쪽 물은 중강으로 들어가므로 이렇게 이름지였다. 금주.복주.해주.개주 등 요동의 모든 산은 여기에서 나아간 산맥이다.
김순협 <오우당연행록>
대개 송참부터 이 곳(분수령)까지의 120 리 사이는 비록 봉교나 골수와 같이 높고 큰 산들은 없어도 여러 험한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연이어져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도 마을을 열 만한 곳이 없다.
[회령령會寧嶺]
요동의 지세를 잡아주는 주요한 맥으로 요동의 여러 산이 이를 쫓아 뻗었다.
회령령 이후부터 요야에 이르기 전까지는 청석령.대석령.소석령.왕상령.석문령 등이 연이어져 있는데 험준하기가 마찬가지다. <이승연>
김정중 <연해록>
회정길, 여기부터 마을 모양과 물맛이 자못 우리 나라와 같은 느낌이 든다.
[답동]
언제든지 물이 괴어 논과 같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이름 지은 것
[청석령靑石嶺]
청석령은 책문을 건넌 후 봉황산을 넘어 요동 벌판으로 가기 직전에 위치한다. 일찍이 연암이 好哭場이라고 칭했던 요동벌판을 가려면, 초하구를 지나 분수령-유가령-연산관을 거쳐 회령령(일명 마천령)과 청석령이라는 두 개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회령령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높고 험하여 눈이 내려 얼어붙는 겨울 연행길일 때는 사행 일원들이 직접 건너지 못하고 첨수하와 호랑곡으로 둘러 다녔다.
청석령은 그 높이가 회령령과 거의 같으나, 각 연행록에는 거의 건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석령이라는 이름은 그 고개를 이루는 돌 빛이 모두 푸른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말고도 이 고개를 건널 때 연행록 저자들이 기억하는 것은 바로 봉림대군의 `청석령 지나거냐`로 시작하는 시조, 이른바 `청석가`(일명 호풍음우가)이다.
병란 당시 청 태종의 인질로 잡혀 심양으로 가던 봉림대군이 이곳에서 그 시조를 읊었기에, 별다른 기념비나 유적이 없이도 병란과 관계된 유적지로 인식되고, 그곳에서 병자호란과 관련된 회상을 진행하고 있다. 이거이 바로, `기억`이 장소를 되살리는 경우에 해당한다.
[석문령]
석문령을 넘어 냉정에 이르면 산세가 점점 낮아지며, 여기서 10 여 리 정도 가면 비로소 산이 다하고 넓은 들이 펼쳐지는데 바로 요동의 넒은 들판, 곧 요야가 나온다. <이승연>
최부 <금남표해록>1488
석문령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 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과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대개 우리 나라 사람과 같았다.
김경선<연원직지>
대개 동서로는 여기서(신요동)부터 산해관까지 이르고 남북으로는 의산醫山에서 시작하여 바다 가까이 이르러 그 길고 넓게 뻗친 것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천지가 큰 것을 알게 된다.
[요야]
석문령을 넘어 냉정에 이르면 산세가 점점 낮아지며 여기서 10 여 리 정도 가면 비로소 산이 다하고 넓은 들이 펼쳐지는데 바로 요동의 넓은 들판, 곧 요야가 나온다. 심양을 지나면서 소릉하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인가와 시사가 수리에 걸쳐 즐비한데 대표적인 지역으로 신민점.소흑산보.광녕점.여양역.대릉하점을 들 수 있다.
주류하를 넘어 요서 지역에 들어서면 몽고족과 관련된 기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승연 성균관대학교 건축학 석사논문,총서 9. 284쪽>
[고려총]
김경선 서장관 <연원직지> 1832
요동들 첫머리에 있는 촌으로 촌가 수십 호가 있다. 동녕위의 옛터로 고려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崔認齋(명은 晛 1563~1640)의 기록에는 `고려촌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고려말을 하고 차차 자라면서 의상과 관복은 고려 것을 많이 쓴다.`고 했는데 지금 보기에는 촌락이 매우 쇠잔하여 그 사람들이 아직도 고려의 후손인지 알 수 없다. 대개 동서로는 여기서(신요동)부터 산해관까지 이르고 남북으로는 의산醫山에서 시작하여 바다 가까이 이르러 그 길고 넓게 뻗친 것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천지가 큰 것을 알게 된다. ... 일판문에서 이도정의 사이는 옛부터 물맛이 가장 나쁘다는 곳이다. 이곳은 요동 들판 가운데에 위치하여 물과 샘이 모두 고여 있고 빠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물맛을 보니 과연 신 듯도 하고 떫은 듯도 하여 실로 입에 대기가 곤란했다.
김창업 자벽군관 <노가재연행록> 1712
지리를 상고해 보면 이 물은 요수로서, 호지에서 나와 장성으로 들어가고 남으로 혼하와 태자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이 세 물이 합쳐지는 곳을 삼차관 또는 삼차하라고 하는데, 근년에 사람들이 우장을 경유할 때 건너던 곳이다.
이 물을 건너 2 리 쯤 가면 또 작은 물이 나타나는데, 바로 周流河의 지류이다. (千山의) 경치는 큰 길과 달리 지나는 곳마다 염전이 많았으니 그 토양이 비옥함을 역시 알 만하다. ... 봉성에서 주류하에 이르기까지는 초가가 많고, 주류하부터 산해관까지는 토옥이 많다. 토옥이 나타난 이후로 이따금 와가는 있어도 초가는 전혀 볼 수 없다. 이것은 이을 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요양]
이덕무 수행원 <입연기> 1778
구요양으로 향할 때 신요양을 바라보니, 태자하 가에 큰 나무를 쌓아놓은 것이 보였다. 거의 7, 8 리에 이르도록 가득 찼다. 마두들이 말하기를 `이 나무는 혼춘지방에서 가져와서 여기에 쌓아두는 것으로 여러 곳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모두 동량棟樑감으로 쓰이는 나무입니다.`라고 했다.
[주류하]
김정중 사행단 외 <연행록> 1791~92 주류하를 2 리쯤 지나서 작은 물 하나를 건넜다. 곧 주류하의 지류인데, 서쪽 기슭 에 작은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는 성이 있으며 나무숲이 우거져 마을이 그림 같다. 그 서쪽은 몽고 지방이다.
[사하沙河]
이덕무 수행원 <입연기> 1778
고가자부터 주류하보까지는 황사가 깔려 있었다. 이날 바람이 세차게 불어 하루 종일 날려 하늘을 뒤덮으므로 길을 갈 수 없을 정도였다. ... 변성에서 신점까지 193 리이다. 이 노정은 비가 오면 질기 때문에 길 좌우에 약간 높게 흙을 쌓아 놓았다. 그 중 일판문과 이도정 사이가 더욱 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가물어서 길이 매우 건조하고 깨끗했다.
김정중 사행단 외 <연행록> 1791~92
대방신에 이르러, `바람이 매우 사나와 들판의 모래가 불려서 얼굴을 치니, 눈속과 콧속, 입속으로 들어가서 지척 사이지만 동행하는 말과 사람을 분간하지 못했다.`
여양역을 지나면서, `큰바람이 모래를 날려 사람을 때려서 나는 눈을 뜰 수도 없고 입도 열수가 없었다. 나날이 이러다가는 흙먼지의 위장이 될 것이니, 어찌하랴?`
권협 告急使 <연행록>1597
(귀로)대개 통주부터 땅에는 사토가 많은 까닭에 강물이 사하라는 명칭이 많다. - 태자하 부근 사하보, 영원위 부근 사하소, 중후소 부근 사하점, 난하 부근 사하역
[요택]
서호수 사은부사 <연행기> 1790
일판문에서 이도정에 이르는 20 리 사이가 요야에서 가장 저습한 곳이다.
李押 부사 <연행기사> 1777~78
요야에 들어온 이후로 물맛이 심히 나쁜데 일판문.이도정이 더욱 그러하다.
허봉 <조천기>
요야는 한 번 장마가 들면 물이 괴어서 빠지지 않으므로 길을 가는데 불편하다.
[의무려산]
최부 <금남표해록> 1488
의무려산에서 북경에 이르는 지역은 초목이 나지 않아 산들이 모두 민둥하며, 특히 의무려산은 토질이 거칠고 나빠서 초목이 나지 않는다.
채제공 정사 <함인록> /상 사하역 1778
기자의 영역이라 은나라 제도 남았으나 한인들은 만주족과 결혼을 많이 한다.
[십산삼점 금주위성]
김창업 자벽군관 <노가재연행록> 1712
마을 남녀들이 조금씩 모여들기에 그 모습을 보았더니 몽고족이었다. 금주성 서북쪽으로 10 리 정도에 帶山이 있고 그 밖은 다 몽고 지방인데 5,60 리 정도의 가까운 거리다. 그리고 몽고에서 북경을 가려는 사람은 모두 이 길로 가야 하기
때문에 도로에 오가는 사람은 거의 반 이상이 몽고인이었다.
[중안보中安堡]
[송산점 행산점 탑산점]
허봉 <조천기>
성 안에는 사람 사는집이 아주 드물었고 피난 간 집들이 많았다. 대개 일찍이 흉년을 만났고 또한 달자의 난리를 격은 까닭에 아직까지 회복되지 못했다고 했다.
김창업 자벽군관 <노가재연행록> 1712
탑산점 길에서 기장을 실은 몽고 수레를 만났다.
[중후소]
김정중 사행단외 <연행록> 1791~92
중후소에 닿으니... 길 곁에 홍당무가 있는데 크기가 수박만 하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것이 있으나 색깔과 크기는 그것만 못하다. 어찌 나라에 크고 작은 구별이 있어서 그러하랴? 오히려 토성이 여기에는 맞고 우리 나라에는 맞지 않아서겠지.
3) 산해관내
[고려보]
고려보는 산해관을 지나 풍윤현과 옥전현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이덕무의 <입연기>, <계산기정>, 김경선의 <연원직지>를 참고로 고려보의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상에 전하기를 병자호란.정축호란 때에 우리 나라 사람 중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여기에 정착해 살면서 한 마을을 이루어 고려보라 이름지었다 한다. 그후 자손들도 계속 이곳에 살았다. 처음에는 적어도 100 여호는 살았으며 1778 년 무렵에는 수십 호 정도, 1803 년에 이르러서는 모두 다른 마을로 이주하고 다만 십여 호만이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승연 성균관대 공학 석사 논문>
이압
이 곳만은 우리 나라 사람이 와서 논을 만든 이래 그대로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도랑 제도도 우리 나라와 다름이 없다.
이덕무 <입연기>
담과 집의 제도는 자못 우리 나라의 평안도와 비슷했다.
김경선 <연원직지>
촌락 앞에는 수십 무의 논이 있었는데, 압록강을 건넌 후 처음 보았다. 과연 우리 나라의 제도와 같았다. 또 그 떡과 엿 같은 거도 오히려 본국의 모양 그대로 전해졌다. ... 동치미의 맛이 우리 나라의 것과 같다고 하는데, 이는 정축년에 포로로 간 우리나라 사람의 유법이라 한다.
<계산기정>
시장에 속절병粟切餠(인절미) 같은 떡이 있는데 고려병이라고 불렀다. 이것 역시 그 당시 떡 파는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떡을 모방해서 만든 것인데, 이전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사먹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쟁반에 받쳐들고 나와서 길을 막으며 먼저 팔려고 다투었다.
김창업 <노가재연행록>
대개 성은 전으로 쌓았고 높이은 3 길 이상인데, 산해관이 가장 웅장하다. 무녕현.옥전현.풍윤현.삼하현과 모든 역보에 다 성이 있으며 그 높이는 3 길 이하가 없다. 현 이상의 성엔 모두 십자가루가 있다.
명 사신 예겸
향 한양
요동 압록강? 낭자산 배음산 신색 고령 연산동관구 분수령 용봉산 개주참 탕참 (압록강)의주(의순관) 소곳관 양책관 암반관(정주) 곽산 신안 안흥 안정 평양
황주 봉산 검수관 용천관 안성관 보산관 금암관 홍의관 금교관 개성 동파관
임진강 원평 벽제관 모화관 경복궁 태평관
향 요동
모화관 벽제 동파 개성 금교 홍의 금암 보산 안성 용천 검수 봉산 황주 생양 평양 안정 숙영 안주 인지 살수 박천 신안 운흥 임반 차련 양책 소곳 의주 압록강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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