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2004 년 중국 유국상이 발표한 요하문명 발굴 조사 보고서에 근거한 요하문명 유적.유물 발굴지 표시도다.

 

- 서요하 지역 신석기문화 유적.유물 발굴지 분포도

  원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중국인들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서요하 지역에서 발굴되었으니 요하문명이라 하고 자신들의 시조인 황제 헌원이 일으킨 문명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지금의 하북성 동쪽 끝 지역을 흘러내리는 란하는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부터의 표시일 뿐이고 또 지금의 서요하는 흑룡강이였으며 지금의 적봉 동쪽을 거쳐 동북류하는 물길은 송화강이였고 그 송화강이 4000 여 년 전에는 우수하牛首河였으니 우수하문명이라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위 <중국전도>에 청색으로 추기한 황하.요하와 적색으로 추기한 땅과 물길.산 표시는 서기전 202 년 유방이 한漢을 건국하면서부터 1934 년 초까지 약 2100 여 년 동안 정사급 지리지에 설명.기록된 지형.지세이며 설치된 성省.주州.부府.구口.현縣 명칭이다. 지명 일부는 당연히 개칭되었을지언정 그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1932 년 일본군부는 대한임정 서북 국경인 압록강을 건너 청 시기의 봉천성 심양 승덕현을 거쳐 서쪽으로 직예성 열하구 승덕부를 공격.점거하였고 1934 년에는 승덕부 남쪽을 경유하는 란하 중.하류를 삭제하고 란하 상류를 봉천성 심양 승덕현으로 흘러가는 황하 중류로 임의 연결한 후 란하라고 고쳐 표시한 엉터리 지도 <만주국지도>를 간행하였다.

 

 

 

즉 황하는 물론이고 황하가 흘러든 요하까지도 란하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저러한 핵심 지리 조작의 멍에를 뒤집어쓰지 않으려고 청국 시기의 지리에 맞추어 후속 조치를 하였다. 그 첫번째는 조작의 가장 핵심 골격인 요하를 동쪽으로 3000 여 리 쯤 떨어진 고구려 시기부터 이조선까지 창해.슬해로 불린 지금의 위치로 이동.위작시킨 일이다. 다음으로는 요하 중류로 흘러든 요하의 서쪽 지류 황하를 삭제하고 발원지 이후의 경유지를 동남류가 아니라 동북.정동류하는 당시까지의 흑수.흑룡강 물길을 대체하여 서요하로 명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삭제.연결.이동.변조.위작한 후 원래 3 강 유역의 모든 지명도 이동.위작한 3 강 유역에 기록에 맞추어 적절하게 재배치한 지리가 바로 <만주국지도>의 지리이고 지금의 <중국전도>의 하북.요녕.길림.흑룡강 4 성의 지리다. 그 결과는 세월까지 소급시켰는데 곧 지금의 란하 중.하류 지역에 설치된 전한의 요서.요동.낙랑 3 군 위치가 위 <만주국지도>에 표시된 것과 같이 동쪽으로 크게 이동된 지금의 요하를 기준으로 재설정되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에 표시된 지리를 금방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동.조작의 기획은 1872 년부터였다. 기획 수괴는 가짜 명치왕을 세운 극정한론자 서향융성西鄕隆盛이고 서향은 육군참모국 자원을 동원하여 무지막지한 엉터리  기획지도 <아세아동부여지도>를 간행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다가 1932 년 봉천 심양을 거쳐 직예 승덕부까지 공격.점거한 후 위 <만주국지도>를 공식화한 것이다. 

 

서향융성이 지리 조작을 기획한 당시 일본 상황을 묘사한 글을 제시한다.

 

그런데 명치유신을 단행한 명치정부의 대외정책은 구미 열강과 손잡고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할 방침으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명치 초기에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에서도 보여지듯이 그 제일보는 우선 한국에 향해졌다. 명치정부는 `정한征韓`을 실행함으로 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편입하는 한편 봉건 사족의 불만을 돌려서 구미 여러 나라에 압박받고 있던 불리한 상태에서 벗어날 계기를 만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정한征韓`의 기도가 구체적으로 검토되어 가는 가운데 서향융성西鄕隆盛은 1872년 8월 육군중장 북촌중뢰北村重賴와 동 소좌 별부진개別府晉介를 한국에 잠입시켰다. 그들은 한국인으로 변장하여 군사전략의 견지에서 각지를 조사하고 돌아갔는데, 별부別府는 `한국을 치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다. 2,3 개 대대면 충분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서향西鄕은 다른 한편 육군소좌 지상사랑池上四郞과 동 소좌 무시정간武市正幹의 군적을 벗겨서 외무성 10 등 출사로 꾸며 외무성의 팽성중평彭城中平을 붙여 만주로 보냈다. 그들은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상해를 거쳐 영구로 가서 심양까지의 각지를 조사하며 누볐는데, `당시의 만주지방 여행은 매우 곤란했을 뿐 아니라 청국 관헌이 일찍부터 일행의 행동을 괴상하게 보아 귀찮게 따라붙어 시종 미행하여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아주 애 먹었다`는 것이었다.

지상池上은 이듬해 1873 년 4 월에 귀국하여 `만주시찰복명서`를 서향西鄕.판원퇴조板垣退助에 제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이 `정한征韓`의 즉시 단행을 주장했다.

 

  지금 지나支那는 회비의 반란(역주: 중국 서북 변경지대인 타림에서 이슬람교도가 반란을 일으켜 1865~1877 년간 이슬람 국가를 세웠음)이 감숙지방에 만연하여 섬감陝甘총독 좌종상이 대군을 이끌고 정토에 힘쓰고 있으나 진압은 용이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만주의 병비에 이르러는 성경장군이 자주 개혁의 필요를 상주하고 관하의 상비병을 모아 조교를 실시하고 있으나 적폐가 오래되어서 사기가 부태하고 병사도 겁유하므로 상비군이라 해도 거의 이름뿐입니다. 더우기 강기가 이폐하고 회뢰가 공공연히 행해져 상민으로서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할 실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태로 몇해를 경과한다면 지나는 결국 토붕와해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가 한국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지금의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만약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다시 이 같은 기회는 얻을 수 없습니다.

 

서향西鄕은 지상池上 등이 귀국하기 전인 1873년 초에 대만 침략 준비의 일환으로서 해군소좌 화산자기樺山資紀(뒤에 大將)와 해군 비서인 아옥이국兒玉利國을 남청 및 대만에 잠입시키고 육군소좌 복도구성福島九成을 문관으로 꾸며서 영사로서 하문廈門(아모이)에 주재시켰다. 이처럼 명치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그 성립과 동시에 한국이나 대만 침략 준비를 위해서 군인을 현지에 미리 파견했던 것이다.

한편 육군참모국(역주:참모본부의 전신임)은 이 해 12월 미대청원美代淸元 중위 등8 명의 군인을 청국에 보냈다. 이 `제 1 회 파견은 정한론과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북청北淸으로 한정`(<대지회고록>)하여 한국 문제와 관련한 청국의 동정을 탐지케 했다. 이듬해 1874년 4월에는 일본의 대만 침략과 관련하여 대원리현大原里賢 대위 등 7 명을 청국 남부 각지에 잠입시켰고 1875년에는 복원화승福原和勝대좌를 공사관부 무관으로 북경에 파견했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이진희 著 이기동 譯 5장 3.참모본부와 酒匂景信의 프로필 134~136 쪽

                         

 

이러한 엉터리 지리 조작 지리에 근거한 조선 5000 년 역사의 재해석이 소위 식민사관이다. 또 그렇게 조작된 지금의 지리가 지금부터 2100 년 전인 전한 시기부터였고 변동도 없었다고 강변하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결국 서기전 4000 여 년 전후의 환웅천왕의 고조선과 서기전 2333 년 개국한 왕검조선의 문명인 우수하문명은 요하문명으로 바뀌는 것이고 또한 단군의 제위를 물려받은 부여와 그 단군부여의 남쪽 제후국이였을 왕험성 중심의 부왕.준왕의 조선 및 남쪽으로 경계를 접한 천군天君과 이후 진辰.마한馬韓.진한辰韓 강역 몽땅도 동쪽과 동남쪽으로 3000 여 리 이상씩 이동.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삼국.남북국.고려의 중심지와 이조선.대한임정의 서북강역까지도 동남쪽으로 3000 여 리 이동.축약된 것이다.  

 

하지만 서기전 2333 년 단군 왕검이 건국한 조선 곧 <삼국유사/기이.고조선.왕검조선>의 왕검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란하 동쪽, 지금의 노합하와 지금의 대릉하 서쪽 상류 지역이였다.

 

 

주)

1. 신채호 선생은 왕검조선이 삼한관경제를 실시하였고 실시시기는 전국시대부터였다고 하였으며 3한3조선 중 신한.진조선 도읍은 위 추정의 합이빈,

    번한.번조선 도읍은 개평, 마한.막조선 도읍은 평양이라 하였다.

2. 하지만 삼한관경제 실시는 선생의 추정이라 판단하며 왕검조선의 첫도읍 아사달은 선생이 추정한 합이빈 남쪽 500 리 쯤의 청국 길림성 쌍양현 치소

    인 소알연일 것으로 추정하고 그 근로는 <규원사화>를 저술한 북애선생이 아사달을 만주 소밀성이라 추정한 것과 <청사고/지리지> 길림성 쌍양현

    치소가 소알연인 것을 참작한 것이다. 아사달에서 천도한 백악산아사달은 마땅히 <규원사화> 기록에 따라 패수 북쪽이여야 하고 <요사/지리지> 동

    경도 녹주綠州 기록과 같이 진국발해의 서경압록부 3속현 신록.신화.검문 명칭을 참작하여 지금의 큰승덕 북쪽 지점을 추정한 것이며 세번째 천도지

    장당경은 기자의 동래라는 시기에 서쪽 지역의 번잡함을 피한 천도였기 때문에 첫도읍 아사달 방향이며 사통팔달하다는 후일의 개원 쯤의 위치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위와 같이 표시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 대한인은 어찌해야 하겠는가? 

 

중국 주석 습근평에게 지금의 란하 동쪽부터, 북쪽으로는 지금의 서요하를 따라 동요하와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지금의 온성까지의 땅을 반환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 참고자료
 
 
집필자 오강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능원 우하량 유적은 중국 요령성 능원시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돌무지무덤과 제단 유구 관련 복합유적이다. 이 유적은 중국에서 단일유적으로는 드물게 1983년부터 현재까지 오랜기간 발굴조사되고 있으며, 아직 유적의 일부만 발굴 조사되었다. 가장 먼저 발굴 조사된 것은 여신묘이며, 이 묘가 있는 구릉의 정상부에 돌무지무덤이 다양한 형태로 군집해 배치되어 있다. 이 유적은 중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기원전 30세기 요서 지역의 홍산문화가 이미 문명단계에 돌입하였다는 ‘요하문명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유적으로 표지성과 상징성이 매우 크다.

 
 

- 중국 요령성 능원시(凌源市) 능북진(凌北鎭) 묘후촌(廟後村)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돌무지무덤과 제단 유구 관련 복합유적.

홍산문화 후기의 적석묘와 제단 유구의 복합 유적이다.

능원시(凌源市) 능북진(凌北鎭) 묘후촌(廟後村)과 건평현(建平縣) 장복점향(張福店鄕) 마가구촌(馬家溝村)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능원시와 건평현이 경계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중국학계에서조차 이 유적의 소재지를 능원시로 소개하는 곳도 있고, 건평현으로 소개하는 곳도 있고 혼선이 일고 있다. 그러나 유적의 정확한 행정 소재지는 능원시이다.
 

1981년 요령성 일제 지표 조사 기간에 발견되어 1983년부터 현재까지 33년간 지속적으로 조금씩 발굴 조사되고 있다. 중국에서 단일 유적을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발굴 조사하는 사례는 몇 안되는데, 그만큼 이 유적이 갖는 표지성과 상징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 전체 16개 지점까지 편호되었다. 아직 유적의 일부만이 발굴 조사되었기에 유적의 지점 편호는 계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하량유적에서 가장 먼저 발굴 조사된 것은 제1지점의 여신묘이다. 여신묘(女神廟)는 평면 ‘中’자형의 반지하식 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 구조물은 주실, 주실 양측의 동측실과 서측실, 주실 남북의 남실과 북실, 남실 남측의 남단실(南單室)로 구성되어 있다.

 

적석총은 여신묘가 소재하고 있는 구릉의 정상부에 군집하여 배치되어 있는데, 1기가 단일 적석총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2기가 연축되어 있는 것, 여러 기가 연축되어 있는 것 등 다양한 형태의 것들이 있다. 적석총의 중심부 지하에는 판석으로 바닥석과 벽석 및 개석을 마련한 상자꼴의 석관이 배치되어 있고, 석관 내부에는 곧게 바로 펴서 묻힌 피장자와 함께 머리와 귀 부위를 중심으로 목부위, 복부, 기타 부위 등에 말발굽꼴 옥제 상투잡이, 옥룡(玉龍), 구운형옥패식(勾雲形玉佩飾), 옥벽(玉璧), 누에꼴 옥장식, 봉황꼴 옥장식, 인형(人形) 옥장식 등의 다종다양한 옥장식이 부장되어 있다.

우하량유적은 중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요하문명론'의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유적이다. 요하문명론의 요점은 기원전 30세기 요서 지역의 홍산문화가 이미 문명 단계에 돌입하였다는 것이다. 요하문명론은 1981년 11월 중국 절강성 항주시(杭州市)에서 개회된 ‘중국고고학회 제3차연회’에서 발표된 손수도(孫守道)와 곽대순(郭大順)의 논문(「論遼河流域的原始文明與龍的起源」)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손수도와 곽대순은 능원시(凌源市) 성자산(城子山), 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梁), 부신현(阜新縣) 호두구(胡頭溝) 등 홍산문화 취락지와 적석묘 등에서 출토된 옥룡(玉龍) 등의 옥기를 근거로 하여, 홍산문화기에 원시 농경(용의 기원과 관련), 사회 계층화, 권력, 예(禮), 예술과 종교가 발생하였고, 그러하기에 이를 초기 문명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곽대순의 이러한 주장은 1980년대 중국 고고학계의 대가이자 원로인 소병기(蘇秉琦)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이후 더욱 체계화, 구체화되어, 1995년에는 홍산문화의 적석 제단 · 여신묘 · 적석총 조합이 문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근거로 우하량 적석총과 제단이 최대 규모에 해당하는 1기를 중심으로 규모와 구조가 등급화되어 있고, 여신묘의 신상(神像)이 주신(主神)을 정점으로 하여 계층화되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즉, 홍산문화는 문명의 전야가 아닌 초기 문명이고, 초기 국가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산문화는 거대 종교 기념물, 대형 무덤, 직업의 전문화 현상이 확인되기는 하나, 이러한 류가 반드시 사회가 국가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심지어 부족 단계의 사회에서도 소규모 취락의 네트워크와 연대에 의해 얼마든지 축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두 요소만을 갖고 문명을 거론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하량의 대형 적석묘는 지상의 분구(적석)만이 거대할 뿐 매장 주체부의 규모와 부장품이 빈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고, 직업의 전문화도 옥기 외에는 단순하며, 취락의 위계화도 비교적 평등하여 국가 단계 또는 문명 단계의 유적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는가 한다.

 

물론 ‘요하문명론’은 요하 유역 등 중국 동북 지역에 중국 내지 등과는 다른 별개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중국 학계에서 학술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요하문명론’을 주장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결국 이 지역이 앙소문화의 충격을 받아 홍산문화 후기에 문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더욱이 홍산문화는 국제적인 학술 기준과 다른 문명의 물질적 발현 형태와 비교할 때 초기 문명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요하문명론’을 수용하는데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牛河梁遺址』(潮陽市文化局․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學苑出版社, 2004)
「論遼河流域的原始文明與龍的起源」(孫守道․郭大順, 『文物』 1984年 6期, 1984)
「遼西古文化的新認識」(郭大順, 『慶祝蘇秉琦考古五十五年論文集』, 文物出版社, 1989)
「遼寧史前考古與遼河文明探源」(郭大順, 『遼海文物學刊』 1995年 1期, 1995)
「동북아시아에서의 초기 문명 기원과 문명의 고고학적 발현」(오강원, 『한강고고』 창간호, 2007)
 
<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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