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 쌀 부족 국가 조선에서 빼낸 쌀로 버텼다 [책&생각]

소 역시 유출되고 열등화 지속
홍삼과 주세는 총독부 재원 노릇

식민지 식료산업 연구로 드러나
“1차사료 동원 객관적 이해 추구”

  • 수정 2024-07-26 09:03
  • 등록 2024-07-26 05:00
군산항에서의 미곡 적출 장면. 조선흥업주식회사 편, ‘조선흥업주식회사 30주년 기념지’(1936). 돌베개 제공

음식조선
제국이 재편한 음식경제사
임채성 지음, 임경택 옮김 l 돌베개 l 3만2000원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는 정치와 외교, 군사 등의 분야에 국한되지 않았다. 생존에 필요한 식재료와 음식 문화에서도 식민 통치의 영향은 뚜렷했다. 쌀이 부족했던 한반도에서 오히려 일본으로 쌀이 빠져나갔고 그로 인해 식민지 조선인의 체격이 저하된 것은 단적인 사례다. 일본 릿쿄대 경제학부 교수 임채성의 연구서 ‘음식조선’은 쌀과 소, 명란젓, 우유, 맥주 등 아홉 가지 식료 산업과 음식 문화를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가 지닌 경제적 의미를 드러낸다.

지은이는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푸드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푸드 시스템이란 “식료의 생산부터 유통·가공을 거쳐 소비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의미하며,” 생물학적 측면과 정치·경제적 측면, 사회문화적 측면을 아울러 지니는 개념이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경제 상황을 두고 식민지 근대화론과 수탈론이 양 극단에서 맞서고 있는 상태에서 가능한 한 통계와 문헌 등 1차 사료를 동원해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인 역사 이해”를 추구했노라고 그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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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합병에 이은 토지 조사 사업이 끝나자 한반도에서 일본인의 경작지 소유 면적이 급증했다. 1932년이 되면 일본인이 조선 내 무논 전체의 16.1%를 소유하게 되는데, “그중 88.8%가 소작지였고, 대부분의 일본인이 식민지 지주였다.”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산미증식계획’에 의해 미곡 생산이 크게 늘었지만, 생산된 미곡 가운데 수이출량은 1912년에 4.5%에 불과했다가 1921년에 21.9%로 늘었으며 1936년에는 51.4%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930년대까지 1.3석 안팎을 유지한 반면 조선의 쌀 소비량은 합방 무렵 0.9석 정도였다가 1930년대 전반기 0.5석 안팎으로까지 지속적으로 떨어졌는데, 그 까닭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조선의 쌀 소비를 억제하여 일본의 쌀 소비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시키는 이런 정책은 조선인의 영양 공급과 신체 발육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성인 남자의 신장은 1900년대부터 1920년대 중반에 걸쳐 약 2㎝ 커졌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약 1~1.5㎝ 작아졌다.”

이출 소의 탑재. 조선흥업주식회사 편, ‘조선흥업주식회사 30주년 기념지’(1936). 돌베개 제공

조선에서 일본으로 빠져나간 것이 쌀만은 아니었다. 소 역시 매년 5~6만 마리가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1923년에 농가 100가구당 축우 두수는 조선 56마리, 일본 24마리였고 축우 총수는 조선 161만 마리, 일본 143만 마리였다. 일본 소의 도살률이 출산률을 크게 상회하면서 소의 시장 구조가 만성적 공급 부족 사태를 빚자 조선 소가 그 빈 자리를 메꾸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 소의 두수가 증가한 반면, 조선 소의 두수 증가는 정체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체로 출산률도 높고 일소로서도 우수한 조선의 2~3살 암소가 일본 등으로 유출된 결과, 조선 소의 체고와 체중이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일관적으로 저하되는 등 “조선 소의 열등화가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쌀과 소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식민지 조선이 일본의 식료 기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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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우시장. 조선흥업주식회사 편, ‘조선흥업주식회사 30주년 기념지’(1936). 돌베개 제공

조선의 특산품으로 특히 중국에서 인기가 높았던 홍삼은 총독부의 전매 대상으로 “총독부 재정의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었다. 총독부는 일본의 재벌계 자본인 미쓰이 물산에 홍삼의 해외 독점 판매권을 부여했고, 미쓰이 물산은 홍삼 판매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도 관여하는 등 영향력과 수익을 확대했다.

1919년 주정식 소주 공장이 평양에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신식 소주 공장이 잇따라 출현하자, 총독부는 ‘조선주세령’과 거듭되는 개정령을 통해 주세를 늘렸고 그것은 “총독부 재정의 최대 세수원이 되었”다. 1933년 12월에 대일본맥주가 영등포에 조선맥주 공장을 짓고 기린맥주 역시 이듬해 조선에서 생산한 ‘기린비루’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인들의 맥주 소비가 크게 늘었고, 그것은 다시 총독부의 재정에 도움을 주었다. 총독부는 또 담배 제조를 전매 사업으로 삼음으로써 “식민지 주민의 기호를 채워주면서 통치 및 개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이어지면서는 조선에서 생산된 담배가 중국 점령지와 남방 점령지를 포함한 ‘대동아공영권’ 각지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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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와 마찬가지로 우유는 일제의 식민 지배의 부산물로서 조선에 도입되었다. 개항 직후부터 인천과 부산 등 거류지 외국인 등을 중심으로 착유업이 시작되어 점차 조선 내로 확산되어 갔다. “일본을 경유하여 우유라는 ‘문명적 자양’이 조선 내에 새로운 식문화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우유를 거의 마시지 않았던 조선인들도, 소규모이지만 우유 소비에 나섰다. 우유와 함께 연유와 분유, 버터 같은 유제품 역시 조선에서 소비되었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서양 제국의 수입품이었다.

과일을 파는 아이. 조선흥업주식회사 편, ‘조선흥업주식회사 30주년 기념지’(1936). 돌베개 제공

조선은 기후와 토질이 사과 재배지로서 우수한 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재래 사과는 품종 개량된 서양 사과에 비해 상품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개항 후에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 품종이 도입되었고, 시장 판매를 목적으로 삼는 산업 전개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사과는 식민지 시대에 급격한 생산 증가를 보였고, 조선 내의 소비가 늘었을 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가까운 서일본 지방 등으로의 수이출 역시 늘었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수이출 대상이 되는 것은 양질의 사과였고 그 나머지가 조선 내에서 소비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함경도 지역민들이 자가용으로 만들어 먹고 일부만 현지에서 판매되었던 명란젓이 일본인들의 기호품이 됨으로써 상품화되고, 전시하에서는 국가의 관리 대상이 된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진남포과물협동조합의 사과 검사 상황. 하타모토 사네히라 편, ‘평안남도대관’(1928). 돌베개 제공

이렇듯 아홉 개 식료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푸드 시스템을 고찰하고 그것이 해방 후 남한에서 재편되는 과정 역시 아울러 짚어 본 지은이의 결론은 이러하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푸드 시스템 형성과 재편은 국가 독점 및 조세와 맞물려 총독부 재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식민지 통치를 지탱하는 재원도 되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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