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7.04 07:00최종 업데이트 25.07.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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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조르지아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지난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 정상회의는 예정보다 짧았다. 이번 회의의 공식 목적은 회원국 간 방위 예산 확대와 군사 역량 강화를 재확인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군사 투자 계획을 나열한 몇 개의 문장뿐이었다.

이번 공동성명에서는 그동안 나토가 수차례 강조해 온 '국제법'과 '규칙 기반 질서'라는 표현마저 사라졌다. 정상회의가 짧아진 이유를 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돌발 발언을 차단하기 위한 절차적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동맹 내부에서 더 이상 공유되는 목표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길게 말로 포장할 수 없다는 자각이다.


1949년 나토는 소련이라는 명확한 적을 상정하며 탄생했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이 군사동맹은 유럽과 북미를 잇는 안보의 기둥이자, 미국 패권 질서의 실질적 보루가 되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된 뒤, 나토의 존재 이유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협이 없는 동맹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는 전략이론가들의 경고가 이어졌지만, 나토는 해체되지 않았다.

목적을 잃은 조직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적이 필요했다. 테러리즘, 중동 분쟁, 이란, 북한, 그리고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 차례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런 임무는 본래 유엔군의 몫으로 보였지만, 북대서양 동맹국들은 유엔을 무력화시키는 대신 나토를 존속시키는 길을 선택했다.

나토가 유엔 대신 선호된 이유는 명확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는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이라는 구조적 장벽을 안고 있다. 1999년 코소보 공습 당시, 나토는 안보리 승인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입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권 행사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반면 시리아 내전에서 나토는 러시아의 거부권을 우회하지 못해, 유엔을 통한 무력 개입이 좌절된 사례도 있다.

한마디로 유엔은 '적을 만들지 않으려는' 보편적 거버넌스 체제라면, 나토는 '특정 적을 상정한' 배타적 집단안보체제다. 이 근본적 차이 때문에 두 기구는 의사결정 속도부터 지휘 통제 구조, 규범과 명분의 유연성까지 모든 점에서 다르게 작동한다. 유엔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나토는 선택된 집단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이 모든 이유로 북대서양 동맹국들은 나토를 유엔보다 더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기구로 여겨왔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의 패권 유지를 위한 명분을 만들어왔다. 그 결과 유엔은 오래전부터 무기력증을 넘어 무용론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보스니아 내전에서 유엔 평화유지군(UNPROFOR)이 소극적 대응에 머문 반면, 나토 평화이행군(NATO IFOR)은 적극적인 군사 개입으로 전황을 바꾼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나토와 미국

6월 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질문을 받고 있다.EPA 연합뉴스

유엔을 무력화하며 존속해 온 나토의 정당성은 소련 붕괴 이후 30여 년 만에 한계에 이르고 있다. 테러리즘이나 중동 분쟁 같은 불특정한 위협만으로는, 이제 복잡해진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회원국들을 하나로 묶어두기 어렵다. 무엇보다 러시아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나토의 최대 재정을 쥔 트럼프라는 이름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 미국의 전략 초점은 분명하게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워싱턴은 러시아를 더 이상 최대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고, 기술 패권에서 미국을 위협하며,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는 중국을 '체제적 경쟁자(systemic rival)'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유럽은 다르다.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와 국경 근접 위협을 현실로 체감하고 있으며, 영국은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이후에도 유럽 안보의 핵심 축으로서 러시아 억지에 적극적이다. 발트 3국은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을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국가 존립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럽 전역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가장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이다.

나토는 지금까지 자신을 규범동맹으로 정의해왔다. 무력뿐 아니라 가치와 원칙으로 묶인 공동체라는 이미지로 자신의 태생적 제한을 뛰어넘는 상징적 명분을 삼아왔다. 그러나 이번 성명에는 그런 언어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군사 역량, 국방비, 그리고 무기의 수량과 질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중세 말기, 허물어져 가는 질서를 감추기 위해 중세는 오히려 더 화려해졌다. 핵심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장식이 대신했다. 올해 나토 정상회의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불필요한 수사만 늘어놓는 대신, 감출 수 없는 균열 앞에서 핵심적 표현들은 사라졌다. '국제법'과 '규칙 기반 질서'가 빠진 것은 단순한 실무 편집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유럽 사이의 실존적 분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복귀하자마자 우크라이나에 대한 새로운 군사 지원을 중단했고, 러시아의 점령지 일부를 인정하는 평화 구상을 내놓았다. 러시아의 서쪽을 향한 영토 확장은 유럽 국가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변화라면 스페인을 제외한 회원국들이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늘리기로 합의했다는 점이다. 2014년에 합의한 GDP 대비 2%에 비해 두 배 이상 껑충 뛴 합의 내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도 컸지만, 미국을 대하는 유럽의 '헤어질 결심'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그 합의는 마치 곧 이혼할 부부가 마지막으로 남은 재산 분배에 동의하는 장면 같았다. 함께라면 기뻐할 일이었지만, 이제 그 합의는 각자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계산처럼 보였다.

나토와 인도·태평양 4개국

6월 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세계 포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인도·태평양 4개 파트너국(IP4) 특별 행사에서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이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리차드 말스 호주 부총리 겸 국방장관,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상, 뤼터 사무총장, 크리스토퍼 럭슨 뉴질랜드 총리,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대통령실

이혼을 앞두고 '재산 분배'에 합의한 미국의 관심은 이미 다른 파트너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할까. 이른바 인도·태평양 4개국(IP4 :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나토 초청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나마 해당 지역에 관심이 있는 프랑스를 제외하면, 유럽이 IP4를 곱게 볼 이유가 없다는 점도 같은 이유에서다.

유럽이 IP4에 호의적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안보의 공백을 IP4의 희생으로 메울 수 있을 때뿐이다. 나토 회원국 다수는 고강도 전쟁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토는 불균형 위에 세워진 동맹이다. 이런 현실에서 세계 군사력 5위 한국과 8위 일본(2025년 글로벌 파이어파워 기준)이 관심을 가져준다면, 미국에 실망한 유럽이 그나마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IP4 역시 나토와의 협력이 그들의 안보에 실질적 도움이 되느냐는 점이다. 군사력과 지정학적 조건을 놓고 보면, 전면전 방어의 의미에서 나토 협력이 한국과 일본을 지켜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IP4의 나토 협력은 쌍방 이익이라기보다 유럽의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일방적 이익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유럽 국가들이 IP4를 바라보는 현실적 시각이다.

물론 한국을 비롯한 IP4가 나토에 협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이버, 우주, 미사일 방어, 해양 안보 등 나토와의 협력체계를 통해 정보와 역량을 공유하고 공동기술 개발과 표준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할 기회가 생긴다.

무엇보다 나토 무대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국제 정치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고, 방위산업과 첨단기술, 경제 네트워크에서 새로운 연대를 형성할 가능성은 있다. 그것이 IP4가 군사 안보를 넘어, 외교·경제·기술의 미래 전략 공간으로 나토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다.

이런 조건이 갖춰진다면, IP4 국가들도 나토와 협력할 명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점차 흐려지는 나토의 존재 명분과 불균형한 내부 군사력의 현실,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구체적 이익, 그리고 인도·태평양 지역에 안보 위협이 발생했을 때 나토가 어떤 입장을 공식화할지 여부까지, 이러한 모든 요소를 면밀히 따져본 뒤 협력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설사 그들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하더라도 인도·태평양의 지정학적 문제 해결을 위해 나토를 끌어들이는 것이 긴장 완화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입이 줄어들수록 평화에 가까워지지만, 개입이 늘어날수록 잠재적 갈등의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결국 무엇을 고려하더라도, IP4와 나토는 굳이 가까워질 이유가 없다. 군사 협력과 정보 협력은 나토가 아니더라도 다른 틀에서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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