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봉유설》

 

... 중략...

황명(皇明) 때의 진공 도로(進貢道路)는 의주로부터 출발하였다.

진강성(鎭江城) 20리(里) 본명은 구련성(九連城)인데, 만력(萬曆) 병신년에 유격부(游擊府)로 고쳤다., 탕참(湯站) 70리(里), 책문(柵門) 20리, 봉황성(鳳凰城) 20리, 진동보(鎭東堡) 40리 일명(一名) 설유참(薛劉站). 우리나라 사람들은 송참(松站)이라 부른다., 진이보(鎭夷堡) 60리 일명 통원보(通遠堡)다., 연산관(連山關) 70리 일명 아골관(鴉鶻關)이다.

 

첨수참(甛水站) 30리, 요동(遼東) 90리, 안산(鞍山) 60리, 해주위(海州衛) 50리, 우가장(牛家莊) 40리, 사령(沙嶺) 60리, 고평역(高平驛) 60리, 반산역(盤山驛) 40리, 광녕(廣寧) 50리, 여양역(閭陽驛) 30리, 석산참(石山站) 40리 속칭 십삼산(十三山), 소릉하(小凌河) 60리, 행산역(杏山驛) 38리, 영원위(寧遠衛) 50리, 조장역(曹莊驛) 15리, 동관역(東關驛) 50리, 사하역(沙河驛) 36리, 전둔역(前屯驛) 50리, 고령역(高嶺驛) 50리 이상은 관외(關外)다.

 

산해관 50리, 심하역(深河驛) 60리, 무녕현(撫寧縣)40리, 영평부(永平府) 70리, 사하역 70리, 신서(新書)에는 칠가령(七家嶺) 60리로 되어 있다. 풍윤현(豐潤縣) 1백리, 옥전현(玉田縣) 80리, 계주(薊州) 80리, 삼하현(三河縣) 70리, 통주(通州) 70리, 북경(北京) 40리다, 합계 1천 9백 79리이다.

 

《고사촬요》 《통문관지》

 

사행로

인조 15 년(1637) 청나라에 항복한 후로부터 청 세조가 중원에 입관하기 전 까지 8 년 동안은 그 당시의 청도인 봉천에만 왕환하였고, 인조 23 년(1645)부터는 압록강을 건너,

진강성(구련성)까지 20 리,

탕참                       70 리,

책문                       20 리,

봉황성                    20 리,

진동보(송참)           40 리,

진이보(통원보)        60 리,               

연산관                    70 리,

첨수참                    20 리,

요양                       90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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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60 리,

해주위                    50 리,

우가장                    40 리,

사령                       60 리,

고평역                    60 리,

반산                       40 리,

광녕                       50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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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역                  30 리,

십삼산역               40 리,

소릉하                  60 리,

행산역                  38 리,

연산역                  50 리,

영원위                  50 리,

동관역                  65 리,

사하역                  36 리,

전둔위                  50 리,

고령역                  50 리,

산해관                  50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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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6 년(1665 강희 4)에 盛京府를 설치한 후로부터는 요양에서 10 리보를 거쳐 성경부(60리)에 들리게 되었고, 다시 숙종 5 년(1679 강희18)에 청에서 국경 수비 방책의 하나로 우가장에 설보한 후부터는 기밀을 유지하려고 우가장 통과를 거절(1)했으므로 성경부에서 변성(60리), 거류하(주류하 40리), 백기보(70리), 이도정(50리)소흑산(50리), 광녕(60리)(2) 등을 거치게 되었다.

 `自康熙己未 慮海方 設堡於牛家庄 改今路 比前遠90里`  <증보문헌비고/교빙고>, <통문관지/중원진공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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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한번 보라.

광해군이 실각된 뒤 서인정권이 다 망해가는 명나라에 사대하기 위해 해로 3,670리, 육로 1,900리도 도합 5,660리의 험난한 사행길을 제촉했다고 하니 얼마나 눈물 겨운가, 그리고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 거처간 지명 등을 한번 보라. 앞서 지도에서 보았던 지명들이 또 우리의 눈에 띌 것이다. 그들이 이번에 이용한 것도 등주항로(登州航路)였다.

 

그 노정을 보기로 하자.

 

선천(宣川) 선사포(宣沙浦)에서 출항하여 철산(鐵山) 가도(椵島)까지 60리요, 거우도(車牛島)까지 140리요, 녹도(鹿島)까지 500리이다. 여기서부터 요동계이다. 석성도(石城島)까지 600리, 장산도(長山島)까지 300리, 광록도(廣鹿島)까지 200리, 삼산도(三山島)까지 280리, 평도(平島)까지 200리, 황성도(皇城島)까지 1000리, 타기도(鼍기島)까지 200리, 묘도(廟島)까지 200리, 등주(登州)까지 80리이다. 이상의 해로는 총, 3, 760리이다.

- 천계 원년(1621)부터 숭정 원년(1628)까지 8년동안 조선의 조공사신들은 조선의 선사포(宣沙浦)(천계 7년에 石多山으로 개칭)에서 기항하여 가도(椵島)·거우도(車牛島)·녹도(鹿島)·석성도(石城島)·장산도(長山島)·광록도(廣鹿島)·삼산도(三山島)·평도(平島)·황성도(皇城島)·타기도(타기도)·묘도(廟島)를 차례로 거친 뒤 등주(登州)에서 뭍으로 올랐던 것이다.

- 석다산(石多山)에서 가도(椵島)까지 300리이다. x

- 숭정 2년 기사에 해로가 바뀌었는 바, 평도(平島)에서 길이 갈라지면서 여순구(旅順口)까지 40리, 철산취(鐵山嘴)까지 40리, 양도(양도)까지 80리, 쌍도(雙島)까지 40리, 남신로(南汛路)까지 500리, 북신로(北汛路)까지 170리, 각화도(覺華島)까지 1,000리이다. 평도(平島)에서 각화도(覺華島)까지는 해로로 1,870리이다. 영원위(寧遠衛)까지는 10리요, 거기서부터 뭍으로 오르는데 육로 노정은 조장역(曹莊驛)까지이며 그 이후로는 앞에서와 같다.

 

등주(登州)로부터 황현(黃縣)까지는 60리, 황산역(黃山驛)까지 60리, 주교(朱橋)까지 60리, 내주부(萊州府)까지 60리, 회부역(灰埠驛)까지 70리, 창읍현(昌邑縣)까지 80리, 유현(유縣)까지 80리, 창락현(昌樂縣)까지 50리, 청주부(靑州府)까지 70리, 금령역(金嶺驛)까지 70리, 장산현까지 70리, 추평현(鄒平縣)까지 30리, 장구현(장구현)까지 60리, 용산역(龍山驛)까지 40리, 제남부(濟南府)까지 70리, 제하현(齊河縣)까지 50리, 우성현(禹城縣)까지 70리, 평원현(平原縣)까지 40리, 덕주(德州)는 90리이다. 경주(景州)까지는 60리요, 부성현(阜城縣)까지는 40리이다. 이상 1,360리는 서쪽으로 가는 행로이다.

 

   부장역(富莊驛)까지 40리, 헌현(獻縣)까지 40리, 하간부(河間府)까지 70리, 임구현(任丘縣)까지 70리, 웅현(雄縣)까지 70리, 신성현(新城縣)까지 70리, 탁주(涿州)까지 60리, 양향현(良鄕縣)까지 70리, 대정점(大井店)까지 50리, 증산(甑山) 석다단(石多山)에서 출항하였는데 석다산(石多山)에서 가도(椵島)까지 300리이다.

 

   숭정 2년 기사에 해로가 바뀌었는 바, 평도(平島)에서 길이 갈라지면서 여순구(旅順口)까지 40리, 철산취(鐵山嘴)까지 40리, 양도(양도)까지 80리, 쌍도(雙島)까지 40리, 남신로(南汛路)까지 500리, 북신로(北汛路)까지 170리, 각화도(覺華島)까지 1,000리이다. 평도(平島)에서 각화도(覺華島)까지는 해로로 1,870리이다. 영원위(寧遠衛)까지는 10리요, 거기서부터 뭍으로 오르는데 육로 노정은 조장역(曹莊驛)까지이며 그 이후로는 앞에서와 같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천계 원년(1621)부터 숭정 원년(1628)까지 8년동안 조선의 조공사신들은 조선의 선사포(宣沙浦)(천계 7년에 石多山으로 개칭)에서 기항하여 가도(椵島)·거우도(車牛島)·녹도(鹿島)·석성도(石城島)·장산도(長山島)·광록도(廣鹿島)·삼산도(三山島)·평도(平島)·황성도(皇城島)·타기도(타기도)·묘도(廟島)를 차례로 거친 뒤 등주(登州)에서 뭍으로 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등주항로라 하는 것이요, 등주에서 관문을 통과한 뒤 산동의 복지를 경과하여 북경으로 들어가 조공을 하였던 것이다.   

 

지도상으로 등주와 요동반도가 그려져 있고 요동반도에는 해주(海州)·개주(蓋州)·복주(復州)·금주(金州)가 있으며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그 동안은 조선계(朝鮮界)요 그 북쪽은 여진(女眞)의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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