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에 묶인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隆武) 3년(서기 55년) 봄, 요서(遼西)에 10성(十城)을 쌓아 한(漢)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안시(安市)개평부(開平府) 동북 70리에 있고,

석성(石城)은 건안(建安) 서쪽 50리에 있고,

건안(建安)은 안시 남쪽 70리에 있고,

건흥(建興)은 난하(幄河)의 서쪽에 있고,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서남 경계에 있고,

풍성(豊城)은 안시 서북 100리에 있고,

한성(韓城)은 풍성 남쪽 200리에 있고,

옥전보(玉田堡)는 한성 서남 60리에 있는데 옛 요동국(舊遼東國)이다.

택성(澤城)은 요택(遼澤) 서남 50리에 있고,

요택(遼澤)은 황하(黃河) 북류의 좌안(左岸)에 있다."

 

또한 <삼국사/고구려본기> 태조대왕 3년에도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三年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그런데 위 <환단고기> 기록의 요서10성 위치를 <사>대한사랑의 박찬화는 아래와 같이 추정하였다. 

 

 

우선 <환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기록은 아래와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안시는 開平 동북 70 리라는 기록에서는 개평을 蓋平으로 수정해야 하고, 건흥은 幄河 서쪽에서는 滦河 서쪽이 옳고, 요동은 창려 서남 경계에 있다는 기록에서는 창려가 요서군 교려현이기 때문에 그 서남 지역을 요동이라 하는 것은 춘추.전국 및 진시황 시기의 요동군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옥전보(玉田堡)가 한성 서남 60리의 옛 요동국(舊遼東國)이란 설명에서도, 옥전은 우북평군 무종현이 수 시기 개칭된 지명으로 요서군의 서쪽 지역으로 나머지 9 성 추정 위치와 비교할 때 무종현 위치일 수는 없고 한성 서남쪽 60 리이고 그 한성이 풍성 남쪽 200 리이고 풍성은 안시 서북 100 리 지점이라면 옥전보는 우북평.요서 지역이 아니라 요동군의 동남쪽 지점이여야 하고 백제 강역 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옥전보는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한 2100 리 길이의 염난수 최하류 동쪽 강안 지점일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요택은 黃河 북류 좌안의 기록에서 黃河는 潢河로 정정하여야 한다. 潢河는 송.거란부터 개칭된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구려가 쌓았다는 요서 10 성 위치는 아래와 같이 고구려 강역의 서남쪽 경계인 요동군의 서쪽의 북쪽 지점과 동쪽 지역의 남쪽 지점이여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고구려 위치는 아래와 같이 전.후한의 유주에 속한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요동.낙랑 등 7 군의 위치가 아래와 같았기 때문이다.(주1)

 

 

 

고구려 태조왕 시기 <한서/지리지>의 대요수.염난수 곧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황하潢河.요하 및 요택 위치는 1911 년 멸망한 청국의 정사 <청사고/지리지> 기록가지도 지금의 란하 중.하류였다.

 

그런데 이러한 지리를 1934 년 <만주국지도>를 간행하면서 2000 여 년 동안 회자된 대요수.황하潢河는 뜬금없이 역시 2000 여 년 동안의 흑수.흑룡강을 대체하였고 염난수.요하는 동쪽으로 3000 여 리 쯤 이동되어 지금의 요하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위 <만주국지도> 표시는 아래와 같이 1875 년 일본 서향융성이 육군참모국을 동원하여 제작한 엉터리 기획지도에 근거한 것이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또한 위 <아세아동부여지도>는 서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와 송.명.청 시기 간행된 고지도에 의하며 아래와 같은 변조.이동.위작의 수법이 동원된 엉터리 지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래는 이조선 시기 백두산이 지금의 서국 요녕성 서쪽 노로아호산 중에 있다는 증거 곧 백두산의 좌향이 해좌사향亥座巳向이라는 이익.이중환의 전언과 해亥.정북正北의 방향이 표시된 이조선 시기 간행된 매우 정확한 국경 지도다.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과 같다. 그리고 대마도와 제주도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했다고 하니, 이는 곧 지관들의 일반론이다.

 <성호사설/천지문> 이익(1681~1763)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다. 해亥 방향에 앉아서 사巳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이다. 그런고로 예전부터 중국과 친해 왔다. 그러나, 땅이 좁고 물이 젓어 위인을 낳지 못했다.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 그리고 동호와 여진족이 모두 중원을 제패하고 황제가 된 일이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만은 그렇지 못해서 주어진 영토만 지키며 감히 뜻을 품어 보지 못했다`라 했다 .

<택리지/복거총론,산수총론> 이중환(1690~ ) 

                                                           <후기 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배우성 37~38 쪽

 

-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26 (1751) 홍문관에서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추정

대한민국 보물 제 1537-1,2 호로 지정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원본으로 추정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고지도<산해관.성경.흥경.오랍.영고탑>

 

 

1910 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병탄된 후 위 <아세아동부여지도>의 엉터리 표시는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에서 구체화.공식화되어 <중국전도>에 그대로 습용되었다. 일본의 지리 조작질이나 서국의 조작 암묵질이 밝혀지지 않으니 조작.기획 시점부터 140 여 년이 흘렀어도 대한민국 문화재청 등이 아래와 같은 엉터리 지도를 보물로 지정하는 것이다.  

 

 

-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대한민국 보물 제 1537-1 호, 2007 년 12 월 31 일 지정

 

주1)

<한서/지리지>

上谷郡 軍都 濕餘水東至路 南入沽

漁陽郡 漁陽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入海 行七百五十里

右北平郡 無終 故無終子國 浭水西至雍奴入海 過郡二行六百五十里

遼西郡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海陽 龍鮮水東入封大水 封大水綏虛水皆南入海

   新安平 夷水東入塞外

   令支 有孤竹城

   肥如 玄水出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陽樂

   臨兪 兪水首受白浪 東入塞外 又有候水北入兪

   㒍 下官水南入海 又揭石水賓水皆南入官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玄兎郡 高句麗 遼山 遼水所出西南至遼隧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후한서/군국지>

廣陽郡 高帝置 ...葪本燕國 刺史治(一)

    (一)漢官曰 洛陽東北二千里

上谷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二百里

漁陽 秦置 洛陽東北二千里

右北平郡 秦置 洛陽東北二千三百里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一)...

    (一)魏氏春秋曰 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 因名之水小水貊

玄兎郡 武 洛陽東北四千里

樂浪郡  洛陽東北五千里

遼東屬國...洛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屬遼西 (一) 

    賓徒 故屬遼西

    徒河 屬遼西

    無慮 有無慮山

    險瀆(二)

    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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