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씨, 에고 이 한심한 작자야.
고구려 역사 연구 전문가랍시고 서울대학교에서 30 년 이상 강의질했다는 작자가 저런 수준의 것을 논증이라고 하오?

위 노씨의 고조선.고구려 역사 인식에서 가장 무식한 결론은 <수경주> 패수 기록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유방의 한과 준왕의 조선 사이의 국경이 평양 대동강 근처이고 그 평양이 한반도 평양일 것인데, 비판자들은 노씨의 주장을 `소고조선론`이라는 쌩뚱맞은 용어까지 만들어 냈다.
일본놈들은 <삼국유사/기이>에서 설명된 환웅천왕의 고조선과 서기전 2333 년 개국한 왕검조선 존재를 부정하고 서기전 195 년 경 연나라 망명인 만이란 놈이 당시 북쪽에 있던 단군이 통치한 부여의 남쪽 제후국이였을 준왕의 조선 땅을 사탈하고 왕험성에 도읍했다는 기록만 사실로 인정했다. 노씨의 소고조선론이나 윤내현의 대고조선론이란 말은 없었지만 결국 소고조선론으로 몰려는 의도다. 고려.이조선 시기의 어느 선학도 대.소 고조선론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어쨋든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아래 추정약도 또한 노씨 작품이라 하는데 모든 추정과 묘사가 문헌 기록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내가 노씨 책을 본 것은 아니고 인터넷에서 노씨 주장을 비판하려고 요약한 저 자료들을 퍼온 것이기는 하지만 노씨가 저런 생각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이다. 이제부터 큰 그림을 설명할 것이니 노씨는 잘 쳐듣기 바란다.
<수경주> 기록 중 상곡.어양 2 개 군을 흐른 습여수, 어양군을 흐른 고수와 고수의 동쪽 지류 포구수, 동남쪽으로 흐르며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 난수, 요동군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 대요수,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여 대요수로 합류한 소요수 다음 항목의 패수는 요동군 동쪽 경계 바깥 지역이고 낙랑군의 가장 서쪽 끝 지역에 흐른 물길을 설명한 항목이다. 즉 소요수 최하류 지점의 동쪽에 있어야만 하는 물길이다.
[水經]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주]
許慎云..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盖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衞滿 自浿水西 至朝鮮. 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 田織信厚, 約以八法, 而下知禁, 遂成禮俗. 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 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 討 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髙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逺, 循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于事差謬, 盖經誤證也.
<수경주>를 저술한 력도원은 우선 <수경>.허신.<십삼주지> 등에서 패수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설명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부정하였다. 그리고는 고구려 사신을 찾아가 묻고 듣기를, 성이 패수 북쪽에 있다는 말만 들은 것인지 아니면 그 물길 곧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치소인 조선현을 경유한 후 서북쪽으로 흘렀다는 말까지 들은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어쨋든 누구한데 들었던 간에 생각하기를, 그래서인지 <한서/지리지>에서도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에 이른 후 바다로 들어갔다고 했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한이 건국되자 조선과 멀리 떨어진 요동지역의 옛 새를 둘러흐른 패수를 경계로 했다고 하며 고금의 일이 차이도 있고 오류도 있어 보이는데 아마도 <수경> 곧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말은 잘못 설명한 것 같다고 한 것이다.
바꿔 다시 말하면 서기전 3세기 말의 준왕조선과 유방이 세운 한나라와의 국경이나 패수는 노씨가 단정한 고구려 평양성 부근 대동강 즉 왕험성.조선현이였을 낙랑군 중심지 쯤이 아니라 왕험성.조선현과 멀리 떨어진 요동군의 동쪽 경계 바깥 지점을 둘러흐른 패수 곧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에 설치된 패수현을 흐른 패수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면 패수가 둘러흘렀다는 요동옛새가 있는 그 요동군이 지금의 요하 하류 지역에 설치되었을까?
-<중국전도>

900 여 쪽에 이르는 두툼한 해설서를 펴낸 윤내현은 한4군 설치 후 요동과 요하에 대한 인식 곧 국경 부근 먼 땅이고 그곳을 흐른 물길이름이라는 의미가 동쪽으로 크게 이동하여 지금의 요하와 요하 최하류 지역을 요동이라 하였다고 단정했다. 그 역시 참으로 무지하고 모순된 해석이다.
한4군이란 요동군 바깥 동북쪽에 설치된 현토.낙랑.진번.임둔 등 4 군이고 진번.임둔은 불명하니 차치하자. <한서/지리지>에는 요서.요동군과 함께 낙랑.현토 2 군과 속현도 기록되어 있으니 결국 윤씨 논리대로라면 <한서/지리지>에 나란히 기록.설명된 요서군 비여현을 흐른 난수濡水, 요동군 망평현을 경유한 1250 리 길이 대요수, 현토군 서개마현을 흐른 2100 리 길이 염난수 및 낙랑군 탄열현을 흘렀다는 820 리 길이 열수는 지금 요하.요동의 서쪽에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씨는 그 난수.대요수.염난수.열수 등에 관한 위치 추정은 도외시한 체 <후한서/동이열전.고구려> 기록의 고구려가 요동에서 동쪽으로 1000 리 떨어졌다는 설명에서 요동을 새롭게 인식된 지금의 요하 최하류 지역으로 오판하고 고구려 위치를 지금의 환인.집안 지역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한 논리는 결국 서기전 2333 년 이전 소규모라는 아사달 고을나라 위치를 한반도 평양으로,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 곧 왕검조선의 첫도읍 아사달을 지금의 요동 본계라고 발전하고 말았다.

그리고 <진서/지리지><태강지리지> 등에 위와 같이 <중국전도>에 표시된 진장성동단.갈석산 등이 있는 지역이 서기전 108 년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이라고 곡해하고 곧 왕검조선의 두번째 도읍인 백악산 아사달일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를 윤내현을 따르는 후학들은 대고조선론이라 하는 모양이다. 이덕일도 아래와 같이 윤내현설을 따랐다.

어이가 없다. 일본명치왕군부의 어용학자라는 놈들의 해설과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고작 두번째 도읍이 산해관 쯤까지였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대고조선론이란 말인가? 도대체 지금의 동요하에서 북쪽으로 지금의 흑룡강까지 지역은 왕검조선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지금의 요동 지역에서 발굴되는 비파형동검.청동단추.고인돌 등과 똑같은 것들이 출토.분포되었다는 이유 때문인가?
아니, 신채호 선생이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 진조선 곧 <삼국유사/기이>의 왕검조선 도읍은 하얼빈이다라는 말만 들린단 말인가?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는가?
어쨋든 윤씨가 아니라 노씨에 대한 비판을 하는 자리이니 낙랑군 지역을 흐른 820 리 길이 열수에서 먼 동쪽인 지금의 요동과 지금의 요하가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는 모순된 윤씨의 주장은 이쯤에서 그만 두겠다.
노씨는 윤씨의 모순된 주장보다 더 보수적이다. 즉 아래와 같이 한 고조 유방 시기 요동군이 지금의 요하 최하류이고 낙랑군도 지금의 한반도 평양 지역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사실 글로 또 입으로 아무리 쉽게 설명한다 해도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이 백번 낫다. 그래서인지 간신히 약도 수준의 추정도 1 매를 그려 설명하겠다며 신채호 선생이 패수는 해성현을 흐른 헌우락이라 하였으니 마지못해서인지 지금의 요하에 요하라 표시하고 옆 괄호 안에 패수라 추기하였다. 그리고는 지금의 요하 하류 동쪽에 낙랑군을, 지금의 산해관 지역을 요동군, 지금의 한반도 평양 지역은 낙랑국으로 표시했다. 게다가 지금의 산해관까지의 장성 표시 북쪽에 뜬금없는 2 줄의 장성을 그려넣었고 낙랑군 지역 내에 요동군 속현인 서안평현을 표시해 놓았다. 그리고는 제 주장이 옳다며 전체 한국강단을 선두에서 이끌고 나간다.
참 가관이다.
대체 뭐 하자는 짓인가?
사실 노씨는 산해관.요동군.낙랑군.요하.패수.서안평 등을 언급하고 약도에 표시하면서 유방이 세운 한부터 일본이 세운 꼭두각시 만주국이 건국될 때까지 요동.요하에 대한 약 2100 여 년 동안 부동의 기준이라 할 지리 기록인 <한서/지리지>와 <후한서/군국지>의 유주 기록은 한 구절도 언급하지 않는다.
<한서/지리지>
上谷郡 軍都 濕餘水東至路 南入沽
漁陽郡 漁陽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入海 行七百五十里
右北平郡 無終 故無終子國 浭水西至雍奴入海 過郡二行六百五十里
遼西郡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令支 有孤竹城
肥如 玄水出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臨兪 兪水首受白浪 東入塞外 又有候水北入兪
㒍 下官水南入海 又揭石水賓水皆南入官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險瀆(4)
玄兎郡 高句麗 遼山 遼水所出西南至遼隧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浿水 水西至增地入海 莽曰樂鮮亭
(4) 應卲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瓚曰王險城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瓚說是也
<후한서/군국지>
廣陽郡 高帝置 ...葪本燕國 刺史治(一)
(一)漢官曰 洛陽東北二千里
上谷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二百里
漁陽郡 秦置 洛陽東北二千里
右北平郡 秦置 洛陽東北二千三百里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一)...
(一)魏氏春秋曰 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 因名之水小水貊
玄兎郡 武帝置 洛陽東北四千里
樂浪郡 武帝置 洛陽東北五千里
遼東屬國...洛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屬遼西 (一)
賓徒 故屬遼西
徒河 故屬遼西
無慮 有醫無慮山
險瀆(二)
房
(一) ...
(二) 史記曰 王險衛滿所都
위 기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지고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가 흘러야 하는 요동군은 대체 어디여야 할까? 또한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을 흐르는 750 리 길이 고수로 합류한 동남류하는 습여수가 경유하는 군도현을 통령한 상곡군까지는 동북쪽으로 3200 리 떨어졌고 진장성동단이 있고 난수 최하류가 경유하는 요서군까지는 3300 리라고 참으로 친절하게도 설명하였다.
결국 거용.군도현을 통령한 상곡군, 어양군을 흐른 고수,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을 경유한 난수와 요서군 남쪽 지역의 동쪽 끝인 진장성동단 및 요동군을 경유하는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 염난수는 아래와 같은 위치여야 한다. 또한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진 낙랑군과 낙랑군 지역을 흐르는 820 리 길이 열수와 요동군 동쪽 경계 바깥이며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을 흐는 패수도 아래 추정도 표시 지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독단이고 독선일까?
그런데 조금이라도 부지런하다면 요서.요동 지역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고지도 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한국사학계는 고지도건 해설도이건 지도 자체를 극혐오한다. 500 여 쪽 이상되는 국사해설서에 약도.고지도가 2 쪽 이상 실려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대체 어떤 자신감으로 한결같이 그 수두룩한 고지도들을 외면하는가?
아래 <지리도>는 돌에 새긴 것을 탁본한 것이라니 괜한 시비 말라.
- <지리도>
1137 년 송나라 사람 황상이 각석

아래는 위 <지리도> 면에 표시한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추기한 것이다.

주) 압록1은 고려 시기 압록수이고 압록2는 이조선 시기 압록수다.
위 <지리도>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한서/지리지><후한서/군국지>의 유주 군.현 기록과 <요사/지리지> 기록을 대조하면 추기한 부분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즉 한.당 시기의 난수.백랑수.대요수.염난수.요수(<수경주>의 소요수)는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되어 란하.대릉하.황하.요하 및 혼하.압록수로 개칭되고 혼용되었다.
결국 아래 추정모사도와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지고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가 흘러야 하는 요동군은 산동반도 기준 정북쪽인 지금의 란하 중류 2 개의 승덕이 표시된 곳이였다. 즉 지금의 란하 본류는 난수.란하 상류와 대요수.황하의 하류 및 염난수.요하 하류 3 물길이 합쳐진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즉 서기전 202 년 고조 유방이 일으킨 한부터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 직전까지 약 2130 여 년 동안 지금의 란하 중.하류 지역을 흘렀던 대요수.염난수였으며 개칭된 황하.요하가 1875 년 일본 육군참모국이 일본 공식관찬지도라며 간행한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부터 동쪽으로 약 3000 여 리 옮겨지고 대대적으로 홍보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일본육군참모국은 1876 년 아래 <조선지도>를 간행하였다.

결국 1875 년 일본 군부의 무지막지한 기획으로 졸지에 멀쩡한 이조선 서북 강역 곧 지금의 하북성 동북쪽 귀퉁이 일부와 요녕성 전체 및 길림성의 남쪽 지역만큼이 싹둑 잘려나갔고 그 지역은 청국 지리로 채워지고 그 지역의 지리는 지금의 압록강 이남으로 쑤셔넣어진 채로 홍보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서기전 2333 년 개국한 왕검조선 첫도읍 아사달은 신채호 선생이 추정한 위 적색표시의 합이빈이 아니라 그 남쪽 쌍양이고, 서기전 3 세기 말의 준왕조선 왕험성이고 낙랑군 조선현이며 고구려 평양성이였고 고려 서경이였으며 이조선의 평안도 평양부는 지금의 산해관 북쪽 건창 남쪽이였다.
지도 도면에 적색 실선으로 한반도 서울과 북쪽의 해亥.정북正北 표시 지점을 연결한 것은 이조선 선학 이익과 이중환의 전언 때문이다.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과 같다. 그리고 대마도와 제주도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했다고 하니, 이는 곧 지관들의 일반론이다.
<성호사설/천지문> 이익(1681~1763)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다. 해亥 방향에 앉아서 사巳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이다. 그런고로 예전부터 중국과 친해 왔다. 그러나, 땅이 좁고 물이 젓어 위인을 낳지 못했다.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 그리고 동호와 여진족이 모두 중원을 제패하고 황제가 된 일이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만은 그렇지 못해서 주어진 영토만 지키며 감히 뜻을 품어 보지 못했다`라 했다
<택리지/복거총론,산수총론> 이중환(1690~ )
<후기 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배우성 37~38 쪽
곧 지금의 서울인 이조선 시기 왕성이 있던 경도를 기준으로 해亥 방향인 시계 시침 11 시 방향에 백두산과 선춘령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조선 시기 지리가들의 지리 인식을 잘 드러낸 고지도가 아래의 가칭 <백산대맥도>다.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고지도 검색명<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결국 위 도면이 묘사하는 범위는 아래 흑색 실선 지역인 것이니라.

노태돈이, 할 얘기 있으면 해 보거라.
'동북공정.식민사관 해체 > 반민족.이적행위, 무식망상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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