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2월 8일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43년 10월 26일 이른바 <조선인학도 육군특별 지원병제도>를 공포하였다. 학도지원병은 표면으로는 자의에 의한 지원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강제동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전쟁 말기 해군지원병 모병 포스터1945년 하반기에 게시될 예정이었던 모병 포스터. 욱일기가 전면에 부각되어있다. 소년수병, 비행예과연습생 등은 13세부터 지원이 가능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선전 포스터들은 전후 소각 처리되었으며, 일본군의 상징물들은 한동안 금기시되었다. ⓒ 박광홍관련사진보기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점점 위기의 국면에 접어들자 조선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전쟁에 끌어들이고자 학도병 제도를 만들고, 해당 학교와 가족에게 '지원'을 독려하였다. 또한 총독부 경무국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김성수·장덕수·최남선·이광수 등을 앞세워 기관지 <매일신보>에 지원하는 글을 쓰게 하거나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도록 하였다.
조선인 학병 해당자 중에는 이에 저항하여 집단행동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경찰관서를 파괴하는 경우도 벌어졌다. 또한 만주나 깊은 산속, 탄광으로 들어가 학병을 거부한 사례도 없지 않았다.
1944년 1월 19일~20일에 학병 적격자 7,200여 명 가운데 한국내 학생 959명(적격자 1,000명), 귀성중인 일본 유학생 1,431명(적격자1,529명), 일본에 남아있는 유학생 719명(적격자 1,524명), 취업중인 졸업생(적격자 약 700명) 등 총 4,358명이 전국 각지에서 강제 입대하였다.
일제는 이에 앞서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여 1만 7,664명, 해군특별지원병 2만 1,316명을 동원했으며, 1938~1945년까지 육·해군 군속으로 각각 7만 7,652명과 7만 7,915명을 별도로 동원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여성위안부·징용 등으로 총 731만 6,234명을 강제 동원했으며, 이 중 612만 6,163명은 일본내 탄광, 광산촌 등과 동남아 각지와 남양군도 등지에 끌려갔다.
일제 말기 조선의 청장년들은 '살기 위해 죽을 곳'으로 끌려갔다. 학병이나 징용·징병·여성위안부 등을 거부했다가는 남은 가족이 심하게 시달려야 했고, 공직 추방이나 배급이 중단되고 심지어 기차나 우편 사용까지 금지시켰다.
극소수 기회주의자들의 일본군 지원자 이외 다수의 청장년들이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나 전쟁물자 조달의 소모품으로 끌려갈 때, 장준하는 가족을 지키고 독립군이 되고자 지원서에 서명하였다. 조선인 학병들은 훈련이 끝나면 십중팔구 중국으로 배치되니까 탈출해서 독립군이 되겠다는 것이다. 지원자 중에는 진짜 일본군이 되고자 하는 부류가 있었다. 혈서를 쓰고 만군에 지원한 박정희와 백선엽 같은 인물이다.
장준하는 짐을 정리하여 1943년 11월 하순에 귀국하였다. 이로서 일본 신학생 생활 1년 반 만에 학업이 중단되었다.
덧붙이는 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