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이주한의 사발통문] 국조 단군은 허구의 인물 ?
[이주한의 사발통문] 국조 단군은 허구의 인물 ?
단군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서울대 출신 역사학자들
국조로 여기던 단군,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허구의 인물로 처음 주장
- 한가람뉴스플러스
- 입력 2025.05.29 07:48
- 수정 2025.06.12 21:03
흐름을 꿰뚫는 한국사 독해②
한국사를 부정하는 한국역사학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이태진(역사학회 회장·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역임)은 2004년 6~7월에 동경대학에서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가 강의 초입에서 한 말이다.
“고려시대 지역할거체제에서 단군신화는 평양지방의 지역수호신 신앙에 불과했습니다.”(이태진,『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태학사, 2005, 28쪽)
이태진은 단군조선이 실재한 역사가 아니라면서 한국사의 뿌리부터 왜곡하고 역사 강의를 시작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줄줄이 어긋나다 결국 마지막 단추를 꿰지 못하게 된다. 2013년까지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그는 2012년에『새한국사』를 펴냈다. 그는 40여 년 간의 연구생활 끝에 출판하게 되었다며 남다른 감회를 감추지 않았는데, 제목과 달리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오래전 서구에서 잠시 유행했던 외계 충격 가설을 한국사에 접목했는데, 이것을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역사를 새롭게 본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태진은 외계 충격에 의한 자연재난을 역사 변천의 동력으로 봤다. 외계 충격은 소행성과 혜성 등이 지구 대기권에서 폭발하거나 지구와 충돌하는 현상을 말한다. 외계 충격은 지구 대기권의 기류에서 발생하는 계절적 재난과 다르다. 지구는 우주 안에 있다. 외계 충격이 지구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지구 근접 물체들과의 충격으로 바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자연과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새로운 충격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적응하기 때문이다. 외계 충격 이전의 자연 상태와 역사적 조건들을 살펴야 하고 인간의 주체적인 대응과정을 여러 차원에서 파헤쳐봐야 한다. 사회와 역사의 주요 동인을 외계 현상에서 찾으면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들은 의미를 잃게 된다. 외계 충격으로 역사를 보는 관점의 한계는 명확해서 서구나 일본에서 일찍이 철 지난 이론이 되었다.『새한국사』에 실린 첫 지도는「위만조선 시대도」인데, 조선총독부사관을 그대로 추종한 지도다.

고조선 건국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 최고 학자인 국존(國尊) 일연 대선사(大禪師)와 고려문신이자 학자인 이승휴가 당시에 전해지던 사서 등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검증해『삼국유사』와『제왕운기』로 편찬했다. 일연은 평생 관련 자료를 모았고, 학문적으로 가장 원숙한 경지에 오른 7~80대에『삼국유사』를 편찬했다(1281~1285년경). 1280년 왕의 실정과 왕 측근들의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가 파직된 강직한 학자였던 이승휴는 1287년에 역사서『제왕운기』를 편찬했다. 승려와 문신이라는 다른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비슷한 사서를 남겼다. 불교와 유학, 도교를 섭렵한 이들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은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창작이라면 이를 가리기 위해 오히려 같은 내용으로 편찬했을 것이다. 역사학계는 근대역사학을 일제역사학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천부당만부당한 식민지근대화론인데, 교묘한 트릭을 사용해 눈치 채기 어렵게 논리를 편다.『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는 작금의 역사학을 훨씬 뛰어넘는 역사서다. 다음에 자세히 이를 다룬다.
세종 7년(1425) 사온서주부 겸 승문원박사인 정척(鄭陟)이 세종에게 올린 글이다.
“단군은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기자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봉(封)하게 된 분이니, 역사의 햇수를 따지면 요임금에서 무왕까지가 무려 1,230여 년입니다. 그러니 기자의 신위를 북쪽에 모시고, 단군의 신위를 동쪽에 배향하게 한 것도, 실로 나라를 세워 후세에 전한 일의 선후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신의 생각에는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거의 제사 의식에 합당할까 합니다."(『세종실록』29권, 세종 7년(1425) 9월 25일 기사)
우리 역사상 최고 학자이기도 한 세종은 정척의 주청(奏請)을 받고 예조에 그대로 이행하라고 명했다. 1436년에 세종은 정척에게 상지관(相地官)과 화공들을 이끌고 함길도와 평안도의 산천형세를 그려오게 했다. 역사지리에 밝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정척은 1451년(문종1년)에 양계지방을 그린 대도(大圖)와 소도(小圖)를 조정에 바쳤다. 그는 1463년(세조9년)에 양성지와 함께 한국 최초의 실측지도로 평가받고 있는『동국지도(東國地圖)』를 과학기구를 이용해 만든 장본인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위화도에서 회군한 태조 이성계도 조선개국 원년인 1392년에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라며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예조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 등의 상서(上書)를 윤허했다. 단군은 역사학계의 주장처럼 평양지역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신앙대상이 아니라 국조(國祖)로 제사를 지내야하는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1차 사료들이 기록하고 있다. 1457년에 세조가 팔도관찰사에게 내린 수서령(收書令) 목록을 보면 고대사를 기록한 책인『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등이 도처에 남아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학계는 조선총독부 이래 단군의 역사를 부정하지만 조선시대에도 단군조선의 역사가 사서(史書)로 면면히 전해지고 있었다. 고조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러시아의 고고학자 U.M. 부틴도 “단군조선은 신석기 시대와 초기 청동기시대가 결합된 원시 한국 사회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역사학계가 한국사를 왜곡하는 이유와 방법
역사학계는 고대사를 연구할 때 1차 문헌사료나 고고학 자료 등에 의한 귀납적·실증적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 '임나=가야설'에 따라『삼국사기』·『삼국유사』불신론을 전제하고 논지를 꿰맞춘다. 그러면서 일제학자들의 지도를 받은 이병도와 신석호 등을 실증사학자라고 치켜세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조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송호정의 주장이다.
“고조선사가 하나의 일괄된 입장으로 정리되지 못하는 것은 한국 고대사의 발전 단계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대개 삼국 초기부터 고대 국가 성립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고조선도 일찍부터 발전된 국가였다고 보고 있다. 반면 삼국 초기는 아직 부(部)가 중심이 되어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를 수립하지 못했다고 보는 논자들은 고조선을 삼국 초기 단계와 비슷한 초기 국가 단계로 이해한다. 이러한 인식 차이가 고조선사의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사에 대한 해명은 이러한 한국 고대사에 대한 기본 인식을 포함하여 그 발전 논리가 명확히 정리되면 좀 더 체계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2002, 155쪽.)
역사학계는 삼국 등이 서기 3~4세기경까지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역사인식과 입장을 견지하다보니 고조선 역사를 객관적·실증적으로 연구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광복 후에도 수십 년간 고수해온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수립한 입론들이 모두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학문적인 태도를 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고조선사에 대한 해명은 한국 고대사에 대한 기본 인식을 포함하여 그 발전 논리가 명확히 정리되면 좀 더 체계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한 송호정은 자신의 다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단정한다.
“따라서 단군조선은 단지 신화일 뿐, 역사적 사실로서 그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송호정,『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64쪽.)
“국가 형성과정을 중심주제로 설정한 것은 고조선이 국가형성과 동시에 곧바로 멸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송호정,『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푸른역사, 2003. 36쪽.)
명색이 고조선 박사 1호인 학자가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가능성을 아예 닫아놓고 있다. 고조선 역사는 허구에 불과하고, 국가형성과 동시에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 역사학계가 고수해온 정론이기 때문이다. 역사학계에서 고조선 연구는 애초에 불가능한 금기사항이다. 1894년 도교제국대학 교수였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 庫吉)는 1894년『단군고(檀君考)』에서 단군은 불교의 설화로 역사와 무관한 신화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을 전수받은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929년에『단군고(檀君考)』를 썼다. 이것이 단군과 관련한 역사학계의 바이블이다. 역사학계가 감추는 탑 시크릿이다.

역사학계와 독립혁명가들의 역사학을 계승한 학자들 간에 단군을 비롯해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삼국과 가야의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즉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했음을 확인했다. 고조선 수천 년 역사를 허구로 만들고, 고조선에서 나온 열국의 역사도 초기부터 조작된 역사라고 본 일제 학자들의 주장은 이런 방식으로 한국역사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역사학계는 정설과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을 모든 수단을 강구해 ‘사이비역사학자’로 매도한다. 이른바 진보, 보수 관계 없이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한겨레」,「경향신문」,「한국일보」,「오마이뉴스」,「프레시안」등은 취재나 육하원칙에 따른 최소한의 사실관계 확인 없이 역사학계의 프레임을 받아써 대서특필한다.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다양한 논조를 펴는 언론들이 유일하게 한목소리를 내는 분야가 한국고대사다. “왜 그럴까?” ‘빛의 혁명’ 완수를 위해 끝까지 추적하려고 한다(다음 회에 계속).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