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동북공정 실체/일본 조작.중국 점거

조선 강역 축약을 기획한 일본 주모자.하수인들과 한국인 머슴들

덕림석 2025. 5. 5. 10:16

 

- 일본은 1872 년경부터 조선 지리 축약을 기획하였는데 그 기획 주모자는 명치유신 3 걸 중 가장 정한론에 열을 올린 서향융성이다. 그는 이조선.청국.대만 등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1872 년부터 육군 장교 수십 명을 파견하였고 지리 정보의 수집 결과물이 1875 년 간행한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이다. 

 

<아세아동부여지도>

일본 공식관찬지도라 함.

출처: 한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연구/고지도

 

 

 

이조선과 청국 사이의 광대한 불명확하게 표시된 국경 지역이 묘사된 위의 엉터리 지도와 지리에서 부터 시작된 역사관이 바로 식민사관이고 동북공정이다. 즉 일본.중국은 한.당.명.청 시기의 요하를 지금의 요하라 주장하지만 당시의 지리는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본류는 상류는 란하, 중류는 황하, 하류는 요하였었으니 란하 상류를 황하 중류로 임의 연결하고 란하 중.하류와 황하 상류를 지도에서 삭제하고 란하라 명명한 것이 바로 지금의 란하인 것이다. 

 

 

그 불명확하게 표시된 광대한 국경 사이 지역은 1932 년 일본 꼭두각시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청국 지명으로 채워졌으니  조선 강역이 강탈당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러한 지리 변조.위작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중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송.명.청 시기 간행된 모든 고지도에는 대요수.염난수 곧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황하.요하가 지금의 산해관 서쪽 지역으로 흘러내린 것으로 설명.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조선 시기 강역 지리에 밝은 선학들은 물론이고 아래 고지도 표시에서와 같이 당시의 백두산 좌향이 해좌사향이기 때문에 이조선 압록강은 물론이고 명.청국의 요하는 지금의 란하 본류 중.하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백두산의 좌향이 해좌사향亥座巳向이란 것은 경도.한양을 기준으로 백두산이 시계 시침 11 시 방향에 있다는 뜻이다.  

 

- 무제목 고지도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고지도 <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결국 일본 명치정권의 정한론 기본 기획은 아래와 같이 청 영역 확산과 조선 지리 축약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식민.공정질에 몰두하고 있는 한국역사학계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문화재청조차 2007 년 아래의 엉터리 고지도 표시를 역사 사실이라 주장하며 보물로까지 지정하였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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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향융성의 하수인들

1) 1872 년 일본 육군참모부

2) 일본육군참모본부 육군부(1888 년 9 월 개정관원록)

    계태랑     - 참모부장

    대원리현 - 편찬과장

    횡정충직 - 영락태왕비문 쌍구탑본 석문 작성 실무자, 1889 년 정탁본으로 발표,

                      <임나고><임나국명고> 첨부

    하촌수개 - 청국.이조선 국경 변조 지도 작성 추정자

 

 3) 청국 파견 대표 밀정

     주내경신 - 1883 년 영락태왕비문 일부 변조와 쌍구탑본 휴대하고 귀국

 

2. 재하수인들

 

1) 백조고길(1865-1942) -시라토리 구라키치

- 1887 년 동경제국대학 사학과 개설

-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중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 전개

- 1906 년 일본 조차지 청국 봉천성 금주구 대련에 있던 남만주철도(주)(- 이하 만철이라 약함) 내에 `만주역사지리조사부`    설치를 주도하여 전내긍,송정등,도엽암길 등을 불러들여 만주 즉 길림과 조선의 역사.지리에 대한 조사.연구를 개시하였

  고 이후 인력이 부족해지자 진전좌우길.지내굉(1878-1952) 등을 추가로 영입

- 1908 년 한 서점에서 한국사 관련 문헌사료 5000 여 권을 만철이 지원한 5000~6000 원으로 사들임, <고려사> 20 원

- 1913 년 <만주역사지리> 편찬

  고대사

  가) 한대의 조선(백조고길.전내긍) 나) 한대의 만주(도엽암길) 다) 삼국시대의 만주(전내긍) 리)진대의 만주(전내긍)

  마.5)남북조시대의 만주(전내긍) 바) 수.당 고구려 원정기의 만주(송정등) 사)발해국의 강역(송정등)

  근대사

   가) 요대의 만주 강역 나) 허원종의 행정록으로 본 요.금대의 만주 교통노선 다) 금대의 만주강역(송정등)

   라) 동진국의 강역 마) 원대의 만주 강역 바) 원.명대의 만주 교통노선(전내긍) 사)명대 요동의 변방장성

   아) 건주여진의 원주지 및 이주지 자) 청대 초기의 강역(도엽암길)

- 이후 진전좌우길.지내굉은 <조선역사 지리>를 편찬

- 1914 년 만철의 재정적 지원이 대폭 축소되자 연구 공간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로 옮기고 매년 만철로부터 기금을 지원

   받음(전내긍.지내굉은 문과 교수, 송정등은 국학원대학 교수, 도엽암길은 조선총독부 부설 조선사료편찬과 주임)

              

2) 송정등(1877~1937) 1909 년 진장성 동단을 요양 서북부로 비정

3) 도엽암길 1910 년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 논문 발표, 진장성 동단을 한반도 황해도 수안이라 주장

4) 조거용장(1870~1953)

- 동경제국대학 인류학교실 청강생

- 1895 년 조수 신분으로 요동반도 현지조사에 참여를 시작으로 대만.중국서남부.시베리아.동아시아 각지를 조사하고 보고

  서와 전문서 발표,

- `한 낙랑시대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하여 <남만주조사보고서>를 간행

- 일선동조론 주창

- 1911 년부터 조선의 석기.고분.체질인류.민속 등 다방면 조사에 참여, 

  평양 등 한반도 북부가 낙랑군이라 주장

5) 관야정-세키노 다다시

- 동경제대 건축학과 교수

- 1910 년 평양지역 고분 발굴, 효문묘 동종 유물 수습

- 1911 년 황해도 사리원역 부근에서 `어양 장` 명문의 벽돌 파편 발견, 부근 고분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전` 발견하여 황해

  도 지역을 한대의 대방군으로 단정

- 1913 년 9 월 23 일 평양 대동강변 고분군에서 토성 발견하고 기와 파편을 수습하고 이 일대를 한대 낙랑군 치소로 단정

- 1918 년 북경 유리창에서 한대 발굴품을 300 여 엔에 구입하여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냄, 쌀 5 키로가 1 엔 

- 1921 년 조선총독부 박물관, 중추원에서 강연(송병준.이완용.이경영 등이 내방)

- 1921 년 총독부 초대 만찬에 백조고길.지내굉과 함께 참석 

6) 금서룡-이마니시 류

- 조선총독부 촉탁

- 1913 년 9 월 30 일 평안도 용강에서 점제현신사비 발견하고 이 일대를 낙랑군 점제현으로 단정

7) 등등. 산전재치랑- 도굴꾼, 1921 년 가을 낙랑태수장 봉니가 출토된 지역 정밀 조사

    관구반 - 평양법원 검사장, 1923 년 평양 토성리 부근에서 조선우위 봉니 입수

 

3. 한국인 머슴들

최남선,정인보,문정창,이병도,신석호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의

역사학계와 역사와 관련된 모든 국가기관   

 

- 정인보가 포함된 이유는 준왕조선 멸망 후의 만.우거가 80 여 년 점거한 조선 땅의 서쪽 경계인 패수浿水를 지금의 요동

  해성현을 흐른 어니하로 추정하였는데 그러한 지리 인식은 지금의 요하가 <한서/지리지> 등 중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

  와 고지도에 설명.묘사된 대요수.염난수 곧 송.거란 부터의 황하.요하를 지금의 요하로 인식한 것이고 그러한 요하 인식

  은 일본식민 지배를 위한 대조선 역사지리 인식이기 때문에 명백한 식민사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남선도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을 지금의 백두산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에 역시 명백한 식민사관 맹종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