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김창업.박지원.박제가.이압.이종휘
조선 유가들의 주장과 評
- 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上/ 3.구사의 종류와 그 득실의 약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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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2009 새문사 - 번역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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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업은의무려산에 고려왕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광녕성 북쪽에 기자묘와 기자정이 있다`는이세백의 일기와 맥이 통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요동이 고토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광녕까지 고조선의 영토로 생각하지는 않았고, 천산의 봉황령에 개소문의 소상이 있으며 당나라 때 연개소문이이곳에 주둔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듣기도 했다. -<노가재연행일기> 권9 계사 3/2, 김문식 111쪽
박지원은 안시성으로 알려졌던 봉황성이 평양일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북방영토의식을 피력했다. 그는 요동이 조선의 고토이고, 숙신.예.맥 등 동이의 국가는 위만조선에 속했으므로 만주의 오라.영고탑.후춘도원래 고구려의 영토로 보았다. 그리고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은 시대에 따라 영평.광녕지역, 요양현,대동강 유역으로 변했는데,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영역이 대폭 축소되어 요동.발해 지역이 거란의 판도로 들어갔고 선춘령과 압록강을 상실하는 등 그 영토와 무력이 고구려보다 크게 떨어졌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열하일기/도강록6/28> 김문식112
매년 5월 초에서 7월 초 사이에 서해안의 長淵.豊川 해변에 荒唐船이 출현하는데도 조선의 해방은 한심한상황임을 지적했다. -<열하일기/동란섭필> 김문식124
의주의 말몰이꾼들이 급료가 적어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불만 세력인데, 만일 청과의 전쟁이 다시일어난다면 용주와 철령의 서쪽 지역은 즉시 청에게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열하일기/일신수필7/18> 김문식125
박제가는요동이 중국 본토의 형세를 엿볼 수 있는 요충지로서 한 이후 중요한 전장이자 수많은 영웅과 제왕이 태어난 지역으로 인식했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는 이 요총지를 확보하여 세력을 떨쳤지만, 고려는 압록강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실지 회복의 의지도 약해졌음을 비판하고, 유득공의 <발해고>를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왕패의 전략을 논하는 저술로 평가했다. <정유각문집/발해고서> 김문식113
청이 중국을 지배해도 중국의 물산과 궁실.주차.耕種.왕족.사대부는 그대로 있으며, 청이 백년 이상 국가를 지탱하는 것도 이들의 편리함을 알고 수용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조선이 양이.존중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제도를 배워야 하며, 선배인 최치원이나 조헌처럼 중화의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夷風을 바꾸려는 `用夏變夷` 의도로 <북학의>를 저술했다.
또한 화폐를 사용하여 상품을 교환하거나 선박과 수레를 이용하여 유통을 원활히 하는 것이 바로 聖王의古制라 하여 자신의 논의가 존주론에 의거할 때에 정당한 것이라 강조했다.<북학의외편/존주론, 내편/북학의自序, 市井>1778
서유문은아미장 일대의 木倉에 쌓여있는 거대한 목재들이 폐사군 지역에서 벌채되어 수로로 옮겨진 것임을 알았고, 첨수참의 사람들이 조선의 풍속을 잘 아는 이유가 회령.강계 등지로 삼을 잠채하러 다녔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오연행록>권1 11/28 , 권6 3/4, 김문식124
안정복은 종신을 역사 일문에 노력한 5 백년래 유일한 사학 전문가라 할지나, 다만 산야의 寒儒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국사기> 같은 것도 그 만년에야 겨우 인가의 수서한 책의 오자 많은 것을 얻어 보았으므로, 그 저술한 <동사강목>에 궁예의 국호를 마진기라 한 소화를 썼으며, 지나 서적 중에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이나 <남제서> 같은 것이 존재함을 몰라서 고루한 언구가 적지 않으며,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는 공구 <춘추>.주희 <강목>의 科臼에 빠져, 기자본기 밑에 단군과 부여를 부용으로 하며, 신라 종국 끝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로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함이 많았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은 선생의 이상 될 이 없는 고로 地志 訛誤의 교정과 사실 모순의 변증에 가장 공이 많다 하여도 가할 것이다. - 단재 44쪽
유혜풍의 <발해고>는 대씨 3 백년 간 문치무공의 사업을 수록하여 천여년 사가의 압록강 이북 창기한 결실을 추보하며, - 단재 44쪽
이압은
여연 등지의 폐사군 지역에서 벌채되어 태자하로 옮겨진 목재가 요동에 수 십리나 쌓여 있는데
이들이 연경의 家材로 쓰이며, 초피와 삼을 잠채하려는 산동의 난민들이 매년 수만 명씩 압록강
일대로 이동하는데 그 추세가 점차 극성해짐을 고했다. -<연행기사>하 3/4, 김문식123
강변이나 육진의 주민들이 양국을 쉽게 왕래하며 봉황성의 청인들과 한 가족처럼 지내고 심양에서
백두산까지의 지리를 훤히 아는 것을 보면서, 이들은 청의 심복이라고 생각했다.
且西而江邊之人 北而六鎭之民 <연행기사/견문잡기>,김문식124
이종휘의 <수산집>은 단군 이래 조선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영가하여 김부식 이후 사가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여, 특유한 발명과 채집은 없다 하여도, 다만 이 한가지로도 또한 불후에 垂할 것이다.
- 단재 44,
? `12922
북방의식을 가장 강력하게 피력한 이는 이종휘였다. 그는 <東史>에서 `유교문화의 제도적 실현`과 `영토의 확대`를 역사 발전의 두 요인으로 설정하고 특히 국가의 영역을 중시했는데, 단군조선과 그 후예인 부여의 영토가 오라.선창.심양에 이르고, 기자조선이 요하의 왼쪽인 忽汗에서 출발했으며, 고구려가 요수의 동서지역을 아우르고, 발해의 5경이 숙신.예.맥.옥저.고구려의 고지라고 하여 고대사의 북방 영역을 강조했다.또한 요동과 심양은 금과 원이 발생한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며, 단군에서 발해까지 우리의 영토이던 것이 고려 때 발해 영토의 3분의 2를 잃었고 조선은 다시 고려의 북방이던 청석령.선춘령 지역을 상실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修山集> 券6 `策2`今遼審一帶 卽箕高舊疆 而天下用武之地也 契丹女眞皆以是起 ...其要且重 可知也己 其地自檀氏以來 至于渤海大氏 皆爲東方之有 勝國 亦以靑石先春二嶺爲界 而今皆爲中國之地 盖金元以來 幽州爲都會 而山海關外 爲奮武衛地 則其屬於中國者 勢也 然而後之王者 九鼎函谷 而東北無黃屋굴疆之虜 則其勢必折而入我 胡元之季 我太祖 擊其遺種 於兀刺城 克之 東自皇城西至遼河 爲之一空 此其前驗也
청이 세조 이후 유주(북경)을 버리고 성경(심양)을 중시하는 정책을 써왔으며, 결국 본거지로 돌아갈 것으로 보았다. 이때에 청은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거나, 식량을 요청하거나, 군대를 징발하거나, 영토의분할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 김문식 123 쪽
재화와 병력의 보강을 위해 무위도식하는 양반과 승려를 활용하고, 서북 양계 지역의 지방관은 문풍과무기를 동시에 권장하여 평소에 전쟁을 대비하도록 했다. 또한 조선의 예상 방어선을 3 단계인 요동.압록강.서경으로 설정하고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역으로 관서의 압록강과 북관의 마운령.마천령 일대를 꼽았으며, 관서의 후방 부대로 안주.황주와 경기.황해의 병력을,북관의 후방 부대로 관동 지역의 병력을 지목했다.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양국 사이의 전략 요충지이자 조선의 고토인 요동 지역을 수복할 것을 주장.<수산집/矯弱勢.策1.책2>
한백겸의 <동국지리설>이 비록 수십행에 불과하는 간단한 논문이나 일반 사학계에 대광명을 열어, 후래 정약용의 <강역고>나 한진서의 <지리서>나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附載한 강역론이나, 그 외에 각가의 조선 역사.지리를 설하는 자, 모두 한선생의 그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다. 나로서 보건대, 그 지리설 중에 삼한과 조선을 분개함이 범엽의 전한 <동이열전>의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하나, 이로써 조선 고대 3 천년 간의 지리를 단정하여 `東國自古 漢江以南爲三韓 韓江以北爲朝鮮`이란 결론을 내림은 너무 맹장적이요 무단적이라 하노라. -단재43
홍양호는 이종휘와 비슷한 생각을 가져 그의 견해를 전폭 지지했고, 고려 선춘령비의 문제를 거듭 제기했다.<이계집/수산집서> 김문식112
서해의 假島에 수백 척의 선박을 가지고 고기를 잡는 청인이 천여 호나 살고 있으며, 서울로 가는 해상 길목인 장연 일대에 청 어선이 자주 출몰하여 피해를 입히는 것을 해방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로 보았다.<이계집/태사씨자서> 김문식124
해방과 관련하여 장연에 대영중진을 설치하여 서해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고, 장산곳 북쪽의 수군들이원활하게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을 건의했다. 또 청인의 북방 범월을 막기 위해서는 건장한 수졸을모집하여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북관 일대의 강변에 식목을 하여 범월과 침식에 의해 영토가 줄어드는 것을 막으며, 김석주와 남구만이 건의한대로 棘城에 축성하고 폐4군 지역의 厚州를 복설할 것을 요청했다.또한 조선의 문치와 함께 무력도 진흥시킨다는 의미에서 역대의 간성지재에 대한 기록인 <해동명장전.1794>을 저술했다.- 홍양호는 의주부윤.경흥부사.황해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쳤으며, 이때의 논의는 정조의 명에 의한 것으로 전장연현감 홍화보(정약용의 장인 추정)와 북청부사 신경준이 함께 참여<이계집/장연방어영설치장계> 김문식125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 경흥부사. 소론계. 연경사신 2 회-<北塞記略/백두산고/海路考/嶺路考>,<해동명장전>- 지구에 한.온.열대의 기후지대를 인식, 서양 지리 인식, 청의 발전된 기술을 수용할 것을 주장-거제.벽돌- 역사지리 폐사군 부활. 후주에 읍 설치, 6 진 지역 군사력 강화를 주장 요동이 과거 우리 땅임을 인식하였고 안시성을 답사한 후 고구려의 후예라고 언명. 두만강 이북 700 리에 있는 선춘령 인정 우리나라 산이 백두산으로부터 뻗어내렸다는 인식 금석문을 탁본하는 열의. 마운령의 진흥황순수비, 문무왕비, 백월보광탑비를 발견 확인 북변지역의 민요를 시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