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동북공정 실체/일본 조작.중국 점거

지도조작을 감행한 일본 육군참모본부 편찬과

덕림석 2020. 1. 8. 21:44

재일 고고학자 이진희는 영락태왕비문을 연구하면서 유별나게도 일본 육군참모본부 편찬과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해독 작업의 정리가 행해진 해인 1888 9 월의 <개정 관원록> 갑편을 보면 참모본부 육군부 제 2 국 항에는,

- 편찬과

과 장    육군 보병 소좌               大原里賢

         6위훈4

...

과 원    대학교교관.육군 교수        橫井忠直

          주임3등하 정7

...

동과부  동판임 3                   下村修介

...

라 되어 있다.

...

편찬과장인 대원리현 1874 년부터 십수년간에 걸쳐서 청국 각지를 스파이짓하며 누비고 비 반출 계획에도 관계한 인물로서 `영희본`을 수집하고 비문 해독 작업의 직접적인 지휘자였다. ... ...하촌수개下村修介 1875년 복원화승 대좌가 청국 공사관부무관으로 부임할 때 수원으로 동행하여 각지를 스파이짓하고, 뒤에 참모본부 관서국에서 편집한 <지나지지支那地誌> 총체부(1887 11 월 간행)와 동 편찬과 편집 <지나지지> 만주부(1889 10 월 간행)를 편집한 중심 인물이다. ...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89.78.79.80

 

위 설명과 같이 1888 년 편찬과 과원 구성원은 물론이고 1883 년 청국 파견 밀정 주내경신 육군 중위가 가지고 돌아온 고구려 영락태왕비 쌍구가묵본의 석문 작성과 해독 작업 등이 육군 소좌 계급의 편찬과장 대원리현의 직접적인 지휘아래 진행되었고 참모본부 편찬과 과원이면서도 육군사관학교 교수직도 겸임한 횡정충직은 16 글자를 쌍구가묵하여 120 여 매에 이르는 영락태왕비문의 쌍구탑본을 순서 표식에 따라 연결하고 석문과 해독본을 작성한 핵심 실무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진희 교수가 집중적으로 조명한 이는 아래와 같이 연구와 교수를 전담한 횡정충직이였습니다.

 

그 후 북해도대학 좌백유청佐伯有淸 교수가 발견한 정상뢰국井上賴圀 문서(무궁회전문도서관)에 의해서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진행된 해독 작업에 대하여 더욱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정상뢰국 문서의 <옥록>에는 모두에 먼저 청강수靑江秀가 1884 년 7 월에 쓴 것과 같은 석문을 싣고, 거기에 정상이 `뢰국 왈, 이는 육군성의 석문이나(해군성의 청강수 주註도 같음) 이 본문에는 착간이 있으니 권말에서 말한 것을 볼 것`이라고 부기하고 있다. 이는 1884 년 횡정충직과 청강수가 꼭 같은 석문을 썼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동서에는 계속하여, 횡정충직橫井忠直 `1884 년 갑신 12 월`에 쓴 <고구려고비고>와 <비문지유래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본 것처럼 청강수는 주내酒匂 갖고 돌아온 비문은 `현재 참모본부에 소장되어 있다`고 썼으나, 정상은 `이는 육군성의 석문이나`라고 정상본에 수록한 석문을 만든 것이 육군성임을 명기하고 있다. 또 후술하듯이 육군참모본부 편찬과 인이 있는 해독본의 사본도 남아 있다.

...

이제 오늘날까지 알게 된 횡정충직橫井忠直의 해독본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그는 먼저 1884 년 7~12 월에 비의 석문과 그 고증문, 주내酒匂의 견문 보고에 기초한 <비문지유래기>를 쓰고, 거기에 그가 1882 년에 쓴 <임나고>와 <임나국명고>를 권말에 붙여서 참모본부 편찬과에 제출했었다.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67.68 쪽

 

위와 같이 횡정은 청강수와 더불어 고구려 영락태왕비의 석문을 작성하였지만 석문 외의 고증문.비문유래기 등은 횡정만이 작성하였고 나아가 2 년 전인 1882 년에는 <임나고><임나국명고> 등의 조선 고대사 관련 논문까지 참모본부 편찬과에 제출한 작자였습니다. 즉 조선 역사 중 시간적 축소.조작에 관련된 당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진희 교수는 하촌수개에 대해서는 추적하지 않았는데 하촌이 편집하였다는 <지나지지/만주부>가 의미하는 것은 일본 명치왕군부가 기획.실행하려는 정한征韓의 최종 목표였습니다. 즉 밀정 주내가 일부 자구 변조하고 쌍구가묵한 영락태왕비문 탑본이나 참모본부 주도 차원의 비문 전면 석회도포 및 백조고길 등이 주장하고 실행 과정에서 일본이 아니라 지금의 집안으로 반출시킨 영락태왕비 그리고 쌍구가묵본을 근거로 작성된 횡정의 석문.해독본과 횡정의 대조선관이 투영되었을 <임나고> 등의 연구 논문 등을 총체적으로 버무린 최종 작업이며 그 내용은 청 시기의 만주 지역의 주요 지리인 요하.압록강 지역을 동쪽으로 약 2000 여 리 옮기는 지도를 변조.조작한 작업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청국 시기의 직예.봉천.길림.흑룡강 등 4 성의 강역은 동쪽으로 확산.재배치되었고 반면에 지금의 요하 하류 서쪽에 있었던 조선의 서북 강역인 평안.함경.황해도 등의 지명이 지금의 압록강 남쪽으로 쑤셔박혀지게 된 것입니다. 

 

한편 1882 년 <임나고>가 참모본부 편찬과에 제출되는 시기에도 육군 장교 밀정들은 계속적으로 청국에 파견되었습니다. 

 

1882 년에 파견된 창십명준倉辻明俊 중위(뒤에 대좌>는 영구를 기점으로 북만주까지 발을 뻗쳤다. 그후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편집한 <지나지지/만주부>가 나온 1889 년까지 만주 조사를 맡았던 사람은 1883 년에 파견된 율서량 栗栖亮중위와 1885 년 파견된 영목신鈴木信 소위뿐으로, 영목은 만주 각지의 병요지지 兵要地誌 자료를 수집함과 동시에 특히 요하의 수운에 대하여 상세한 조사보고를 했는데 그것은 청일전쟁 때의 작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  

                                                                                                     <광개토왕릉비문의 탐구> 145 쪽

 

이처럼 참모본부는 1879 년부터 1889 년까지 도홍의.이집원겸웅.주내경신.

창십명준.율서량.영목신 등 6 명의 밀정들을 봉천성 지역에 파견하였고 수집된 지리 정보는 청일전쟁에서 크게 활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지리 정보가 집결되고 활용 자료화되는 곳이 편찬과였고 주실무자가 하촌수개였습니다.

 

<지나지지/만주부>가 어떤 지도인지 현재는 알 수 없지만 만주 지도의 지형지세와 지명 표시도 앞글에서 언급한 일본 공식 관찬지도라는 1875 년 간행 <아세아동부여지도>와 같이 조선 강역을 지금의 압록강 이남 지역으로 한정하고 인식시키기 위해 만주 곧 청국의 직예성 동부.봉천성.길림성.흑룡강성의 모든 지명을 개칭하지 않은 채 동쪽으로 확산.재배치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일본이 지명을 이동하고 지도를 조작했다는 지목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본의 비굴한 범죄 행위는 아래 <중국여도/평양> 지도지의 란외 표시에도 고스란히 스며있습니다. 즉 중화민국 7 년(1917 년) 참모부가 간행했다는 표시는 허구이며 명백히 일본 참모본부가 <중국여도/평양,장백>을 간행한 것입니다.

당시의 중화민국은 일본이 강점한 대한제국 땅인 평양 지역을 아래 <중국여도/평양>과 같이 세밀하게 측량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영토 지도에 포함시킬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_ <중국여도/평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