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선.대한민국임정/지리 조작과 암묵

지금의 요동과 서요하.요하는 1932 년 일본이 이동.조작한 것

덕림석 2024. 2. 26. 09:46

 

중국 춘추시대부터 요동.봉천이 일본 수중에 들어가는 1932 년까지 약 2600 여 년 동안 요동.봉천 위치는 어디였을까?

 

 

중국의 고금지도에 표시된 물길만을 모사한 위 모사도에 표시한 지금의 란하 중류에 표시된 두 개의 승덕 지역이 <한서/지리지>의 요동군이며 <청사고/지리지>의 봉천부 영역이다.

 

또한 두 개의 승덕 지역은 <후한서/군국지> 요동군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곳이며,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과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과 같이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 곧 송.거란부터 개칭된 황하.요하가 요동군 안시현과 서안평현으로 흘러들었다는 곳이다.

 

1932 년 일본은 봉천군벌 장학량을 심양에서 쫓아내고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웠다. 이때 위 모사도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아래와 같이 란하 1 물길로 변조하고 황하.요하를 동북쪽으로 약 3000 여 리 씩 옮겨 지금의 서요하.요하로 위작.표시하였다. 

 

 

또한 핵심 3 물길을 변조.위작하면서 당연히 후속 작업도 적절히 해야만 일본의 위.변조질을 감출 수가 있기 때문에 3 물길 유역의 모든 지명도 변조.위작한 란하.서요하.요하 유역에 적절하게 배치했다. 결국 거리와 방향 기록은 무시한 채 오로지 지명 하나만 <한서>부터 <청사고> 지리지 기록과 일치하게 된다. 이것이 식민사관이고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다.

 

따라서 지금의 <중국전도>에 표시된 갈석산.산해관도 동쪽으로 약 200 리 쯤 옮겨진 란하의 동쪽에 표시된 것이다. 진장성 도 당연히 동쪽으로 더 연장시켜 묘사된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현재까지도 거리와 방향 및 대략의 축척이 비교적 정확한 고지도가 전해내려 온다. 아래 <지리도>는 국경 지역의 핵심 3 물길인 란하.황하.요하 등이 정확하게 묘사된 대표적인 고지도이고 종이가 아니라 바위에 각자되어 있는 지도라 한다. 

 

- <지리도>

1137 년 송인 황상이 각석

 

 

일본은 위 <지리도>와 같은 각석 고지도는 위.변조할 생각을 아예 품지 않았겠지만 청국에서 간행한 종이 재질의 고지도는 대부분 위.변조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황조일통여지전도><직예전도><대청광여도> 등이다. 그러한 일본이 이조선에서 간행된 고지도를 가만 둘 리가 만무하다.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대동여지전도> <청구도> 등이나 2007 년 대한민국문화재청에서 보물로 지정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등은 모두 위.변조된 것이다. 

 

아래 고지도는 일본의 위.변조 술수를 요행으로 모면하고 현재까지 전해지는 아마도 유일한 이조선 시기 제작 고지도일 것이다.

 

- 가칭 <백산대맥도> - 이조선 영조 26 년 편찬된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추정

 

하지만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위 <백산대맥도>는 국립중앙도서관 창고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방향 표시와 영역을 고의적으로 거꾸로 표시하고 엉뚱한 지역을 연결해 붙친 아래의 조작지도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2007 년 12 월 31 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보물 1537 호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