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6 년 음력 10 월 29 일 효종의 친동생 인평대군은 청국 경사에서 진주정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후 귀로에 올랐다. 대군은 8 월 3 일 한양을 떠나 12 월 16 일 무사히 한양에 도착한 대략 4 개월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매일 일기를 썻고 후일 <연도기행>으로 엮여져 현재까지 전해진다. 일기 중에서도 지리 부분에 촛점을 맞출 것이며 북경에서 압록강까지의 귀로 로정만 검증하려 한다.
맑음. 이른 아침에 떠나려는데, 부사ㆍ서장관 및 영응 중사(領鷹中使)가 올라와서 함께 떠났다.
해대문(海岱門)으로 해서 자성 문루(子城門樓)로 나왔는데, 옹성(擁城)은 없고, 적루(敵樓)만 높을 뿐이다. 남쪽 나성(羅城)의 북문(北門)으로 해서 나와서 길 오른편에 있는 묘옥(廟屋)으로 돌아들어가 관복(冠服)을 정제하고 전별연(餞別宴)에 참석했다. 형부 상서(刑部尙書)가 연회를 주관한다고 하는데, 이는 청인(淸人)이다. 연회가 끝나자 약 2리쯤 가서 길 왼편 묘옥(廟屋)으로 들어가 관복을 벗고, 쌍참(雙驂)을 멍에했다. 아역 김거군(金巨軍)과 김덕지(金德之)가 달려와서 작별을 고하기에 온화한 말로 위로해서 보냈다. 감기가 낫지 않은 것을 무릅쓰고 길을 가게 되니, 머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며, 한열(寒熱)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면 떠날 수 없었겠지만, 일단 연경을 나서니 기쁜 마음이 넘쳐흘러서 신음하는 것조차도 잊고 마음이 미칠 것만 같았다.
시방원(十方院)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늦게 통주(通州) 서문(西門)에 이르니, 거마(車馬)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간신히 틈을 얻어서 들어가 남라성(南羅城) 점사(店舍)에 유숙했다. 연경 별관 생활의 괴로웠던 일을 회상해 보니 시원하기가 마치 팔찌를 벗어난 매와도 같았다.
연경에 사신 다닌 것이 몇 번인지 모르는데, 중행(中行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의 무리의 행악(行惡)과 주구(誅求 강요하는 것)가 갈수록 심하다. 그 끝 없는 욕심을 어떻게 다 채워 준단 말인가. 이것 때문에 노수(路需)도 고갈되었다. 포학을 부리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등창이 생기게 한다. 이것이 모두 흉악한 이일선(李一善)의 소행이니, 대개 사신 올 때 그의 처남(妻娚)을 데려다 달라고 간청하던 것을, 남에게 혐의를 받을 것 같아서 그의 간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자는 일찍부터 불효로 알려져 있는 데다가 이제 그 감정을 사행(使行)에게 폭발시켜서 일마다 말썽을 부리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예부 계심랑(啓心郞) 한 사람은 대통관 이일선과 아역 박효남(朴孝男)ㆍ김명선(金明善)을 데리고 삼하(三河)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고,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 한 사람과 공부 낭중(工部郞中) 한 사람은 박씨(博氏) 두 사람, 당역(唐譯) 한 사람, 대통관 이몽선(李夢先), 아역 김덕생(金德生)ㆍ윤견(尹堅)을 데리고 관상(關上)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다. 공부랑(工部郞)은 시초(柴草)를 맡고, 세 역관은 호행(護行)을 맡아서 관상까지 가고 나머지는 모두 봉성(鳳城)까지 호행한다. 청 나라 장수 두 사람이 갑군(甲軍) 20명을 거느리고 관상까지 호송하기로 되어 모두 일행과 함께 떠났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하며 그 비위를 맞추어 주기가 어렵다.
연경을 떠나올 때 아문에서 준 전별 금품은, 사신에게는 소와 양을 주었고, 정관(正官)에게는 찬은(饌銀 식사 비용으로 쓰라고 주는 은자)을 주었다. 이 때문에 우장(牛庄)까지는 오직 시초(柴草 땔나무) 만을 지급하고 하정(下程)은 공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관례이다. 이날 55리를 갔다.
대군은 북경을 떠나는 일이 감기가 낫지 않아 한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고통보다 더 기쁘다고 했다. 청국에 굴복한 지 얼마되지 않은 비상한 시국이라 개인적인 복잡한 감정은 물론이고 진주정사로서의 임무에 대한 부담이 얼마나 컷을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다.
가. 북경.의주 로정의 개요
북경에서 의주까지는 거의 대부분 육로이기는 하으나 습지와 강인 요택.요하.압록강 등은 배로 건너야 하는 로정이다. 즉 북경을 떠나 동쪽으로 나아가며 산해관을 경유한 후 오른쪽으로 만灣 곧 요하의 하류를 끼고 동북쪽으로 올라 의무려산 아래에 이른 후 동쪽으로 요택을 가로질러 끝에 흐르는 요하를 건너 해성을 거쳐 요양에 이르는 길이다. 이후 요양에서는 동남쪽으로 향하여 옛 개마대산의 안부에 있는 청석령 등을 넘어 청국 국경선인 책문을 통과한 후 120 리 공지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하는 1990 리 로정이였다. 로정 중에서 가장 험로는 요택을 건너는 일이였는데 요택을 가로지르지 않고 북쪽으로 돌아 요양에 도착한다면 대략 200 여 리 쯤 더 걸어야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지리는 전한 시기부터 청 시기는 물론 만주국이 건국된 1932 년까지 약 2100 년 동안 변동이 없었지만 현재 한국역사학계는 만주국부터의 지리인 지금의 요하를 고대 전한 시기부터의 요수.요하라고 반역사적 해석을 하고 있다. 즉 고대부터의 요수.요하는 지금의 요하라는 것이 소위 식민시관과 동북공정의 기본 지리 논리인데 요수.요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하를 건넌 이조선 사신들의 로정에서도 한양부터가 아니라 북경부터의 지리를 명확히 해야만 지금의 어느 물길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원문인 한문이 낯설지만 중국 지리를 검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연경과 의주 사이 1990 리 로정이 짧은 것은 아니니 아래와 같이 4 개 지역으로 나누어 검토하겠다.
사실 지리는문헌 기록에서 설명되는 지형과 지명만으로는 그 실체가 어떤지 쉽게 알 수 없다. 당연히부정확할 수 밖에 없고 의도적으로 변조한 기록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것이 바로 위와 같은 지도다. 그런데지도 역시 부정확하거나 의도적으로 변조한 것도 있기 때문에 기록.고지도 어느 것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된다. 어쨋든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는 위 표시가 역사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청국인들은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지리를어떻게 묘사했을까?
- <경판천문전도京板天文全圖- 이하 경판도라 함> 부분도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이 제작,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화 했다 함.
현 <중국전도>와 <경판천문전도- 이하 경판도라 약함>에 표시된 물길과 지명 등이 대략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판도>의 묘사 중에서 황하와 추기한 백산대맥과 관련해서는 청국 시기 간행된 지리지 기록과 대조.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 만큼은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중국의 25 개 정사 중 북경 동쪽의 지리가 언급된 <사기><한서><후한서><진서><위서><수서><당서><요사><금사><원사><명사><청사고> 등의 지리지에 기록된 대요수.염난수 곧 황하.요하와 <경판도>에 묘사된 황하.요하가 지금의 서요하.요하인가를 검증하게 될 것인데 결론을 먼저 제시하자면 1656 년 인평대군 일행의 북경.의주 로정은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