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문화사><조선상고사>
-진개의 침공에 대한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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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진개(秦開)의 입구(入寇) 사실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진개(秦開)에게 빼앗긴 지방을 변정하노라. 전사(前史)에 매양 진개(秦開)가 기조(箕朝)와 싸워 이천리 땅을 차지하고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정하였다 하니, 이는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서 나온 말이요, ... 만번한(滿潘汗)은 곧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문(文)·번한(番汗) 양현(兩縣)의 음을 취하여 만반한(滿潘汗)이란 지명을 위조(僞造)하고, 이천리(二千里)는 사기(史記) 연세가(燕世家)의 진개척지(秦開拓地) 천리(千里)라는 문자를 취하여 배수를 더하여 이천리(二千里)라 함이니 그 억지로 끌어낸 자취가 드러나거늘 어찌 이를 믿으리오.
만일 어환(魚豢)의 말을 믿고 보면 서압록(今 大遼河) 이서(以西)가 다 연(燕)의 땅이 되었을 것이나, 사기에 연(燕) 지방천리(地方千里)라 하며 또 연(燕)은 소국(小國)이라 하였으니, 어찌 이 같은 광활한 지방을 차지한 적이 있으며, 문,번한(文,潘汗)은 이 곳 요양(遼陽) 부근이라. 지나(支那)를 통일한 진시황도 꿈에도 밟아 보지 못한 땅이니, 연(燕)의 동경(東境)이 어찌 진(秦)의 동경(東境)보다 늘며, 문,번한(文,潘汗)은 곧 기조(箕朝)와 위만(衛滿)의 흥망하던 땅이니, 만일 당시에 연(燕)의 땅이 되었으면 어찌 후래 위만(衛滿)의 근거되었으며, 고대의 요수(遼水)는 란하(灤河)라 고로 연(燕)의 말세에 요서·요동군을 들 때에 영평부가 요서(遼西)가 되고 그 이동이 요동(遼東)이 됨인즉, 요동도 요서의 차례로 그 범위가 산해관(山海關)을 지나지 못하였을지니, 어찌 진개(秦開)가 벌써 요양(遼陽)·해성(海城) 등지까지 차지 하였으리오. 고로 만반한(滿潘汗)을 한하였다 이천리(二千里)를 차지하였다 함은 다 황설이어늘, 후인이 조사도 하지 아니하고 그저 믿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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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연세가(燕世家)에 가로되, 진개(秦開)가 동호(東胡)에 가서 볼모가 되매, 동호 왕이 깊이 믿는지라. 진개(秦開)가 돌아와 연왕(燕王)을 달래어 동호를 쳐 천리를 개탁(開坼)하였다 하니, 동호는 곧 퉁구스라. 아사(我史)에 이른바 동도(東屠)요, 곧 동몽고(東蒙古, 鮮卑)의 지방이니, 동도(東屠)나 동호(東胡)가 다 의역(意譯)이 아니요, 곧 퉁구쓰의 음역(音譯)이라. 지나(支那) 인이 남의 국명(國名)을 쓰자면 매양 극악(極惡)한 문자로 하는 고로 동호(東胡)라 함이니, 마치 훈(葷粥 지칭)을 흉노(匈奴)라 함과 같으니라.
퉁구스, 곧 동도(東屠)가 단군(檀君)과 진한(辰汗)의 서번(西蕃)으로 후래에 기조(箕朝)에 복속하였다가 드디어 진개(秦開)에게 속아 연(燕)에게 망함이니, 이는 기조(箕朝)가 그 속지(屬地)를 잃음이요, 본부(本部)를 잃음은 아니니라. 비록 속지(屬地)이나 이 땅의 득실은 곧 조선성쇠(朝鮮盛衰)에 관계가 적지 아니한 땅이라. 조선(朝鮮)이 동도(東屠)의 땅을 차지하면, 곧 이 곳으로 출병하여 서남(西南)으로 직예(直隸)와 산서(山西)를 누르면 지나(支那)의 전폭이 진경하여 할 바를 모르나니 진왕(辰王)이 연(燕)을 지나 제(齊)를 치며 태행(太行)을 넘어 진(秦)을 침도 이 땅을 가진 까닭이며, 고구려 모본왕(慕本王)이 산서를 치고 개소문(蓋蘇文)이 설연타(薛延陀)와 통함도 이 땅을 차지한 까닭이거늘 이제 진개(秦開)에게 이 땅을 빼앗기니, 이는 곧 기조(箕朝)의 치명상이로다.
어찌 기조(箕朝) 뿐이리오. 곧 조선(朝鮮)의 부여(夫餘)·진한(辰汗)·변한(弁韓)·마한(馬汗) 등 열국의 쇠운도 이에서 헤아릴지니라. 동도(東屠)를 잃은 뒤에 몇 해 못 되어 고죽(孤竹)을 또 연(燕)에게 잃어 연(燕)이 란하(灤河)의 서에 요서군(遼西郡)을 두고 동에 요동군(遼東郡)을 두었나니, 대개 선비(鮮卑)는 조선(朝鮮)의 진취(進取)할 길이요, 고죽(孤竹)은 방어할 곳이라. 이 두 곳을 다 잃은 뒤에야 기조(箕朝)가 어찌 견디리오. 다만 적국의 유린을 기다릴 뿐이로다. 선비(鮮卑)는 후래에 고구려(高句麗) 초년에 잠간 다물할 때가 있으나, 고죽(孤竹)은 기조(箕朝)가 잃은 뒤에 다시 조선(朝鮮) 지리(地理)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도다. 이것이 조선사에 큰 부끄러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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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 -->삼조선이 분립한 뒤 오래지 않아서 신조선왕 모갑(某甲)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마침내 말·불 두 조선(朝鮮)을 다시 연합해 지금의 동몽고(東蒙古) 등지를 쳐서 선비(鮮卑)를 정복하고 연(燕)을 쳐서 우북평(右北平)[지금의 영평부(永平府)와 어양(漁陽), 지금의 북경(北京)부근]과, 상곡(上谷)[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부(大同府)]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弗離支)의 옛 땅을 회복했다. 연왕(燕王)이 크게 두려워서 세폐(歲輪)를 신조선에 바치고 신하를 일걷고 태자를 보내서 볼모를 삼게 하였는데, 모갑이 죽고 모을(某乙)이 왕이 된 뒤에는 연(燕)의 태자가 돌아가서 연왕(燕王)이 되어 장군 진개(秦開)를 왕자라 속여서 볼모로 보냈다.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秦開)의 민첩하고 지혜로움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다.
진개(秦開)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辰朝鮮)을 습격, 신(辰),말(馬),불(番)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곧 전자에 신조선(辰朝鮮) 왕 모갑(某甲)이 점령한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番朝鮮)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遼西) 지금의 노룡현(盧龍縣)과 요동(遼東) 지금의 요양(遼場) 부근을 함락시켜,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5 군을 두고, 2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朝鮮)을 막으니,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全燕時嘗略屬眞番 朝鮮)."고 한 것과 흉노열전(匈奴列傳)에, "연의 어진 장수 진개(秦開)가 호(胡)에게 볼모가 되어 호(胡)가 깊이 믿었는데, 돌아와서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1 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에까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군을 설치하였다(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東胡却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 至襄平 置上谷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고 한 것과 위략(魏略)에, 연(燕)이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滿潘汗)에까지 이르렀다(燕乃遺將 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고 한 것이 다 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가 볼모로 갔던 신조선이 아니므로,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 두 곳에 나누어 기록하였고, 위략(魏略)에는 비록 조선전(朝鮮傳)에 기록하였으나, 진개(秦開)의 볼모되었던 사실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반한(滿潘汗)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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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1월 1일 삼천리 제7권 제1호에 올린 “朝鮮民族의 全盛時代” 중 진개의 침략 부분만 인용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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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略(위략) (朝鮮見燕僭稱王欲與伐燕) 中畧(중략) (燕將秦開詐而爲質於朝鮮朝鮮甚信之秦開歸言於燕伐朝鮮拓地二千餘里至滿潘汗爲界朝鮮遂弱), 司馬氏史記 (秦東胡拓地千餘里)라 하엿으니 魚豢(어환)이 그때 累百年後의 사람으로서 무엇을 考據하야 東胡(동호)를 改하야 朝鮮(조선)이라 하고 천리(千里)를 改하야 이천리(二千里)라 하며 또한 엇지하야 그 소척(所拓)의 땅(地)이 만반한(滿潘汗)에 이른(至) 것을 아랏난가.
가로대 이 무리는 위(魏)의 관구검(母丘儉)의 1무리(一類)라 하리니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지(三國志)를 고찰(按)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우리 역사(史)요 삼국지(三國志)는 곳 중국(中國)의 촉,오,위 삼국사(蜀吳魏三國史)이다. “曹魏大將 母丘儉侵高句麗人入丸都城” 云云은 대개 丸都城의 所藏한 高句麗 史冊이 母丘儉의 手에 入하야 中國의 遺傳함이 多한고로 中國古人이 朝鮮의 史事를 안다는 者는 魏의 史官에 過할 者 無하니 檀君王儉의 名을 위략(魏畧)에서 始見함이 아니냐.
陳壽가 魏에 仕할 때의 所作을 가저 三國遺事가 만히 引用한 고로 箕否. 箕準의 事를 또한 魏畧에서 보게 되얏고 扶餘의 風俗과 三韓 7,80國의 名稱을 三國志에서 始見케 되얏나니 이는 陳壽가 또한 晉에 仕하며 著作한 바라 後漢書에 비록 三韓 7, 80國의 名稱을 記하엿으나 그러나 後漢書는 范嘩의 所作이니 곳 陳壽의 後人이라. 秦開가 朝鮮의 土地를 侵奪한 사실을 또한 魏畧을 根據한 것일 것이다.
先儒들이 永平 以西는 燕이요 永平 以東은 朝鮮이라 하여왓다. 秦開의 所拓한 地界二千餘里라 할진대 그 足跡이 반다시 鴨綠江을 過하야슬지니 李栗谷은 太遠하게 二千餘里를 一千餘里로 改하고 丁茶山은 太近하게 二千餘里로 正하다 하야 滿潘汗이 大同江 以南에 在하다고 妄證하얏스니 嗚呼라 엇지 그리 偏見의 考執를 傳하엿는가.
高句麗 당시에도 항상 奉天을 據割하고 直隸의 北半部와 蒙古 東部를 領有한 고로 史冊에 자조 太原(今山西省)을 侵入하엿슨즉 이는 東蒙古로부터 馳兵南下하던 形勢를 말함이라. ... 朝鮮의 當時 用兵은 永平으로부터 燕京 以北에 至하고 北으로 匈奴(今蒙古地)를 接하고 南으로 上爲(今宣化府)에 及하얏다. 燕에 朝鮮을 反攻함을 보면 (北攻上谷, 南襲孤竹 今永平府 而至遼河) 故史記에 “燕將秦開伐東胡拓地又言伐胡自造物至襄平築長城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等郡”이라고 하엿으니 이를 考하면 朝鮮이 燕과 接境하엿던 大槪를 볼 것이다. 上爲는 곳 宣化府요 漁陽은 금 順天府의 北部요 右北平은 今 永平府의 北部요 遼西 遼東은 今 奉天의 西半部의 北部이다.
魏畧이 滿魏汗이라 함은 곳 漢武帝의 分設한 汶潘汗二縣이니 그 일홈을 漢書遼東郡志에 明載하니 卽今 蓋平海城等地라 拓地 二千餘里라 함은 上爲(今宣化府)으로부터 襄平에 至하기까지 其程을 再折하야 南으로 蓋平海城까지 그 里數가 二千餘里라 그런즉 燕郡의 遼東과 秦의 長城所至한 遼東을 可히 알 것이니 第三의 문제도 解釋될 것이다.
晉書太康地志에 가로대 樂浪遂成縣碣石山이 長城이 所起한 地點이라 하얏으니 此一段이 讀史者의 疑點을 이르킬 것이다. 樂浪은 곳 平壤이오 遂成縣은 平壤南에 在하니 (廣寧 金州에 古平壤을 云함이오 卽今 平安道와 平壤을 말함이 아니다.) 秦의 長城이 멀니 平壤를 過하얏다. 文法으로 보면 始點을 起라 하고 終點을 至라 하나니 秦始皇 長城의 始起點이 臨洮이 엇나니 엇지하야 樂浪으로 所赊地라 書하얏난가.
北史와 隋書를 考하면 魏와 隋가 일즉 上爲에 在하야 郡을 置하야 樂浪이라 하고 縣을 置하야 遂成이라 일홈 하얏스니 燕의 長城은 上爲谷에 起한 것이 明白하다. 晉書의 書載가 此를 指함이라. 晉書 作者 唐太宗이 隋에 生하야 晉陽에 家하매 항상 此를 見하고 燕의 長城을 이갓치 말함이라.
그러면 碣石山은 엇지 함이뇨. “禹貢冀州가 夾右碣石이라 하고 其下又云太行王屋至於碣石)이라 하니 이는 一時에 二碣石이 有한 연고라. 新唐書에 ”平州石城 有碣石山“이라 하고 “營州柳城에 亦有碣石山”이라 하니 당시에 대개 衆石이 碑碣 갓치 立한 것이면 碣石山이라 名함도 그럴 뜻하나니 엇지 上谷인덜 碣石山에 無하리요. 日人歷史學雜誌에 甘氏博氏가 晉書에 樂浪平壤과 長城이 秦始所築임을 말함은 的確한 叅考를 加하지 못하야 前人의 誤를 그대로 써서 사실과 틀님이 多하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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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의 長城이 朝鮮과 如何한 관계되엿음은 이미 上述하엿거니와 燕의 관계는 眞蕃, 樂浪, 兩朝의 事이오. 趙의 관계는 扶餘朝鮮 時의 일이니 扶餘朝鮮이 三朝鮮 중에 最大國으로서 中國과 交通을 先開하얏나니 故로 舜本記에 가로대 “北山我發息愼”이라 하니 發息愼은 扶餘朝鮮의 誤音이라.
管子 曰 “八千里之發朝鮮”이라 하고 又曰 “發朝鮮之文皮”라 하엿으니 發朝鮮은 또한 扶餘朝鮮의 俗音이라. 史記에 濊貉朝鮮 혹은 但稱 濊라 하며 貉이라 하니 貉이라 함은 그 文皮를 衣服함에 得名함이라. 濊는 곳 扶餘의 俗音이니 其實은 다 同一하다. 趙가 扶餘朝鮮으로 관계되기는 趙襄子로 부터서니 匈奴傳에 “趙襄子가 破幷代臨胡狢”라 하엿스니 其後에 扶餘의 屬民林胡, 樓煩이다. 强盛하야 趙의 邊境이 多事하엿다. 趙武靈王이 服을 變하고 騎射를 練習하야 扶餘로부러 자조 싸우며 長城을 築하야 防禦하엿스니 이는 趙의 長城은 扶餘朝鮮을 防하기 위하야 築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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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네이버 지식 요약이다.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1910년대 후반에 지은 것으로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 114년에는 대종교(大倧敎) 제3대 종사(宗師)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서간도(西間島)환인현(桓仁縣)에 가서 1년간 체류하며 고적 답사,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의 국사교수 및 『조선사(朝鮮史)』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때 집필한 『조선사』는 동창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뒷날 『조선상고문화사』로 개제(改題)되었거나, 그 내용이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대종교적인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 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 대종교와 인연을 끊고 근대역사학 연구방법을 수용하면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집필하였다. 신채호의 역사연구 단계로 볼 때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조선상고사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그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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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신론에서는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역사인식체계와 그 역사무대로서 만주를 중요시했고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부여족의 식민지로서 중국 대륙의 일부까지를 우리의 역사로 수용하여 한사군(漢四郡)의 반도 외 존재설(半島外存在說)과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 등이 새롭게 주장되었다. 한국의 상고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이고 자존적(自尊的)인 인식이 뚜렷하다. 단군왕조를 강조한 것은 대종교의 포교와 관련이 깊겠지만, 그 밖에도 우리의 상고문화가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하는 사례들이 기술되어 있다. 중국에 대한 문화사대(文化事大)를 극복하고 일제의 식민지 상황을 철폐하려는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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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1920년대에 집필.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담겨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한 부분이었는데,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라고 불리고 있다.
제1편 총론에서 역사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 상극(相克)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헤겔류의 소박한 변증법적 논리가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이러한 모순·투쟁 관계가 역사로서 채택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론에서 저자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하여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역사학연구의 방법론으로서의 실증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념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채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 이념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근대적인 역사학을 한다던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하고, 그 비판 위에서 이 저술의 목적과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의 계승과 단군·기자·삼한·삼국으로의 계승되는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의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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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적색 문장은 식민사관 머슴들이 신채호 역사인식을 비판한답시고 논설한 엉터리 주장의 대표적인 실례이다.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고대의 요수(遼水)는 란하(灤河)라. 고로 연(燕)의 말세에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을 들 때에 영평부(永平府)가 요서(遼西)가 되고 그 이동(以東)이 요동(遼東)이 됨인즉, 요동(遼東)은 요서(遼西)의 다음으로 그 범위가 산해관(山海關)을 지나지 못하였을지니, 어찌 진개(秦開)가 벌써 요양(遼陽)·해성(海城) 등지까지 차지 하였으리오. 고로 만반한(滿潘汗)을 한하였다 이천리(二千里)를 차지하였다 함은 다 황설이다.”
염철론(鹽鐵論) 험고(險固)에 진개(秦開)의 조선(朝鮮) 침공(侵攻) 후 연나라 영역을 “대부가 말하기를..중략..연나라는 갈석에 의하여 막히고, 사곡에 의하여 끊겼으며, 요수에 의하여 둘러싸였다..중략..이것들이 나라를 굳게 지킬 수 있게 하니 산천은 나라의 보배이다. ”
신채호님은 요동(遼東),요서(遼西)에 대한 정리가 덜 되었는지 연나라의 동변을 산해관(山海關) 방면으로 보고 요서군(遼西郡)과 요동군(遼東郡)을 가르는 요수(遼水)를 난하(灤河)로 보았는데, 진개(秦開)의 조선(朝鮮) 침공(侵攻) 후 연나라 가장 동변 요수(遼水)가 난하(灤河)이므로, 연나라 요서군(遼西郡)이던 요동군(遼東郡)이던 모두 난하(灤河)보다 서쪽에 있었다. 아마도 신채호님은 요동군(遼東郡)의 동변(東邊)을 산해관(山海關) 방면으로 본 것은 명장성(明長城)과 연장성(燕長城)을 같은 장성 줄기로 착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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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에서 “진개(秦開)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辰朝鮮)을 습격, 신(辰),말(馬),불(番)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곧 전자에 신조선(辰朝鮮) 왕 모갑(某甲)이 점령한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番朝鮮)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遼西) 지금의 노룡현(盧龍縣)과 요동(遼東) 지금의 요양(遼場) 부근을 함락시켜,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5 군을 두고, 2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朝鮮)을 막으니”
진개(秦開)의 조선(朝鮮) 침공(侵攻) 후 연나라 가장 동변을 요양(遼陽) 방면으로 보았고, 만반한(滿潘汗)을 요동에 있는 요동군(遼東郡) 문현(文縣), 번한현(番汗縣) 방면으로 보았다. ... 어떻게 된 셈인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에서 위략(魏略)을 지은 어환(魚豢)을 욕하던 것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는 위략(魏略)을 지은 어환(魚豢)이 적은 요양(遼陽) 방면까지 진개(秦開)가 점령하였다고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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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전성시대(全盛時代) 글에서 `魏畧이 滿魏汗이라 함은 곳 漢武帝의 分設한 汶潘汗二縣이니 그 일홈을 漢西 遼東郡志에 明載하니 卽今 蓋平海城等地라 拓地 二千餘里라 함은 上爲(今宣化府)으로부터 襄平에 至하기까지 其程을 再折하야 南으로 蓋平海城까지 그 里數가 二千餘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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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님은 진개(秦開)의 조선(朝鮮) 침공(侵攻) 후 연나라 가장 동변(東邊)에 대하여 조선상고문화사(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동변이 산해관 방면이라고 그래도 약간 근접하게 보았으나, 그 뒤 지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전성시대(全盛時代) 글에서는 봉천(奉天, 심양)의 서반부 북부인 개평(蓋平), 해성(海城) 등지로 후퇴해 버렸다. 민족역사(民族歷史)를 개척한 신채호님이 이렇게 엉뚱한 사관(史觀)으로 후퇴해 버린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