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선.대한민국임정/한국역사학계의 식민.공정질

아사달임검성과 왕검평양성의 위치 추정

덕림석 2024. 12. 22. 17:50

단재 신채호 선생은 왕검조선의 단군께서 삼한관경제를 실시하고 신조선 도읍을 하얼빈, 번조선 도읍을 개평蓋平, 막조선 도읍을 평양이라 하였는데 선생이 지목한 위치는 아래 모사도에 표시된 적색 실선 삼각형 `나`의 3 개 꼭지점을 말한 것이다. 

 

- 모사도 1

 

 

 

 

그 이유는 선생이 청국으로 망명한 1910 년 당시의 요하는 위 모사도 표시와 같이 지금의 란하 하류와 정북쪽 상류 지류였기 때문이다. 

 

즉 아래와 같이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부터 란하 중.하류를 황하 중.하류와 요하 하류 위치의 물길로 변조.이동시킨 후에도 란하라 표시하였고 청 시기의 물길 황하.요하는 제 위치를 잃고 동북쪽으로 3000 여 리 쯤 이동.위작되어 지금의 서요하와 지금의 요하가 된 것이다.   

 

- 모사도 2

 

- 모사도 3

 

 

그러한 연유로 단재 선생이 언급한 합이빈.개평蓋平.평양 3 곳을 지금의 합이빈.개평.평양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한편 안경전이 `다`와 같이 신.막조선의 2 도읍 위치를 지금의 합이빈, 지금의 평양으로 추정한 것은 식민사관.동북공정 지리 논리를 탈피하지 못하고 맹종한 결과이고 번조선 도읍을 지금의 당산이라 추정한 것도 서쪽 화국 정사 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과 조선현과 관련한 막연한 추측을 용기하게 드러낸 것으로 보여지지만 결국은 부정확하고 미흡한 지리 인식이라 평할 수 밖에 없겠다. 안경전이 지금의 당산 부근인 명 시기 영평부 란주滦州 개평중둔위開平中屯衛가 설치된 곳을 번조선의 도읍으로 지목한 이유는 아마도 부근에 사욕沙峪이 있다는 <명사/지리지> 기록때문일 것이다. 

 

즉 서한시대 편찬된 <염철론鹽鐵論/험고險固> 에는 `燕塞碣石 絶邪谷 繞援遼` 곧 연나라는 갈석에 의해 막혔고 사곡에 의해 끊기었으며 요수에 의해 둘러쌓였다고 하였는데 명 시기 란주에는 개평開平중둔위를 설치했고 부근 창려현에는 갈석碣石이 있었으니 아마도 <진서/지리지> 낙랑군 수성현 등의 기록과 <위서/지형지> 평주 북평군 조선현 등의 기록 등을 엄밀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연계하여 조선과 관련있는 곳이라 추정한 것같다. 

 

그러나 왕검조선의 첫도읍 아사달과 2 천도지 백악산 아사달 및 3 천도지 장당경 위치는 모두 패수 북쪽에 있던 곳으로 모사도1에 표시한 갈색 실선 삼각형의 꼭지점인 지금의 영성寧城, 지금의 융화, 지금의 황토양자黃土梁子 부근일 것이라 추정한다.

단재 선생이 지목한 개평蓋平과 평양은 서기전 2333 년 개국된 왕검조선의 남쪽 강역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개평은  <삼국사기/백제본기><사기/조선열전><한서/지리지><후한서/동이열전.한><삼국지/동이열전.한 등에 의하면 2000 여 년 후인 서기전 3 세기 쯤에는 마한 영역의 북쪽 경계 지점이였고 또한 평양 지점도 부왕에 이어 준왕이 다르리던 조선의 왕검성이였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 모사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