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문헌자료

<동사강목/지리고>

덕림석 2016. 4. 1. 14:11

지리고 주요 기록

 

 

상고하건대 역사를 읽는 자는 반드시 먼저 강역을 정해놓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점거한 상황을 알 수 있고, 전벌에서의 득실을 살필 수 있고, 분합의 연혁을 상고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보는 데 어둡게 된다.

 

 

김 문열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는 고대와의 상거가 그리 멀지 않으니, 고적을 널리 상고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다만 신라의 잔여 문자에 의하여 구차하게 책을 만들었을 뿐이고, 정 하동도 그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여 <고려사>를 만들었으므로, 국읍과 산천을 고거할 데가 없게 하였을 뿐더러, 심한 경우에는 원근을 전도하고 남북을 바꾸어 놓았으니, 믿을 수 있는 역사책이라고 하겠는가?

 

 

 

 

단군강역고

 

단군의 강역은 상고할 수 없지만, 기자가 단씨를 대신하여 왕노릇하였는데 그 제봉의 반이 곧 요지였으니, 단군의 시대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고기>에,`북부여는 단군의 후손이다`하였다. 상고하건대 부여는 요동 북쪽 1 천 여리에 있으니, 아마 단씨 세대가 쇠하자 자손이 북으로 옮기고 옛 강역이 이내 기자의 봉지에 흡수된 것이리라 . <고려사> 지리지에 ,`마니산의 참성단은 일명 삼랑성인데, 세속에서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것이다``고 전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 남쪽은 또한 한수로 한계를 해야 할 것이다. 

 

 

태백산고

 

이 목은의 묘향산기에,`산은 압록강 남쪽에 있는데, 요지와 경계가 되고 장백산의 분맥이다. 그 산에는 향나무가 많다`하였다. 그렇다면 묘향산이란 이름은 향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리라. 단군이 태백산 단목 아래에 하강하였고 단은 바로 향나무인 까닭에 후인이 그 임금을 단군이라 칭하고, 그 산을 묘향이라 부른 것이 아닐까?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있는 태사에게 올린 장에, `고구려의 잔민이 북쪽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고 국호를 발해라 했다`하였다. 여기서 말한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을 가리킨 것이요, 위에 말한 장백산이 바로 그것인데 단군이 하강하였던 지역이다.

 

안) <여지승람>에는, 강동현에 대박산이 있고 그 아래에 큰 고총이 있는데 세속에는 단군묘라 전한다고 기록되고, 지금 그 지방 사람들이 대박산을 태백산이라고 하나, 또한 믿을 수 없다.

 

 

백악고 (부) 아사달

 

<고려사> 김위제전에서는 신지선인의 비사에 있는 백아강에 대한 설을 인용하여 서경을 거기에 해당시켰다. 신지는 단군 때 사람이라고 세속에서 잔한다. - 권람의 응제시주에 보인다.

 

 

 

기자강역고

 

<한서>에는, `현도와 낙랑은 본디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하고, <당서>에는, `배구가 ``요동은 본시 기자의 나라다``하였다`하고, <요사/지리지>에는, `요동은 본디 조선이다. 주 무왕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놓자 조선으로 갔는데. 그대로 기자를 거기에 봉하였다`하고, <요동지>에는, `요동은 본디 기자가 봉해진 땅이다`하고, <일통지/요동명환>에도 기자가 실려 있고, <성경지>에서는 심양.봉천부.의주.광녕 지경이 모두 조선과 경계했다고 하였으니, 요동의 태반이 기자의 제봉이 되었었고, 월정 윤두수는 `광녕성 북쪽 3 리에 기자정이 있고, 그 곁에 기자묘가 있으며, 후관을 씌운 소상이 있었는데, 가정 연간의 병화에 탔다`고 하였다. 기자는 또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무릇 도읍이란 국중에 정하는 것이고 보면, 오운이 `요하 이동, 한수 이북이 다 기자의 땅이었다`고 한 것이 옳다.

 

 

 

위씨강역고

 

창해군고

 

삼한고

 

 

 

사군고 낙랑고

 

<한서/지리지>에, `낙랑군치는 조선현이다`

 

지금 <성경지>에, `낙랑군치는 지금의 봉천부치의 동남이다`한 것은, 모용외가 두었던 것을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낙랑제현고 

 

조선 : 응소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하였다. 곧 낙랑군치이다. 한이 우거를 멸하고 그 도읍을 격하하여 현으로 삼았는데, 지금의 평양이다. 후한 때나 진 때에는 같았다. <자치통감>진 함강 4 년(338년) 조의 조선령이라 한 그 주에 `조선은 수의 요서 유성현 지경에 있다`하였으니, 아마 낙랑이 고구려에 흡수된 뒤에 중국이 요에 옮겨 설치하고, 또 조선을 설치하였는가 보다.

 

 

 

遂城 : <통전>에 `左碣石山이 한의 낙랑군 遂城縣에 있는데, 秦의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했다. 지금 증험하니, 장성이 동쪽으로 遼水를 가로 질러서 고려로 들어갔는데, 그 유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尙書>에 ``右碣石을 끼고 바다에 들어간다``하였는데, 이것이 左碣石이 된다(주)`하였다. 案) 이것에 의거하면, 낙랑 지경의 서북은 또한 遼界에 들어가 犬牙처럼 서로 연했었던가? 이 설을 끝내 의심이 간다. 갈석산으로 말하면, <盛京志>에 `鳳凰城 서쪽 170 리에 碣石山이 있다`하였으니, 아마 이 산인 듯하다.

 

 

주) 대만 신흥서국 발행본에는 좌갈석산이 갈석산으로 되어 있고, `이것이 좌갈석이 된다`는 부분은 ``우갈석은 곧 배가 하수로 나가 바다에 뜨는 곳인데, 지금 북평군 남쪽 20 여 리에 있으니 고구려 중간이 좌갈석이 된다. 右碣石 卽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

 

 

 

탄열 : 분려산과 열수가 나온 곳이다. 서쪽으로 점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거리가 820 리이다. 

(안) 열수는 지금의 한강이니, 분려산은 오대산인가, 금강산인가? 다시

<통전><요사><성경지>등을 상고하면, 낙랑 땅이 또한 성경의 관내에 들어간 것이 있었다

. 과연 그렇다면 요동의 서안평은 압록강이 바다에 들어간 곳으로 한계하고, 현도의 서개마는 압록강 상류로 한계하니, 낙랑이 또한 어찌 그 사이에 섞여들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낙랑의 제현은 마땅히 압록강 동남쪽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토제현고 

 

서개마 : 현토고에 보인다. <진서>지리지에는 이상 2 현이 없고, 군치를 망평으로 옮겼으니, 漢.魏 년간에 이미 고구려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반고의 주에 `서개마현에 마자수가 있어 서북으로 염난수에 들어가고 서남으로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2 군을 지나 1100 리(한서지리지; 2100 리)를 흐른다`하였다. 마자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백두산의 옛이름이 개마태산이고, 개마국이 또 그 아래에 있었으니, 이 산은 아마 개마태산의 서쪽에 있으므로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리라. 이에 의하면, 지금의 흥경 주변 땅인 듯하다. 


진번고

 

한 무제가 사군을 정할 때 진번군을 두었는데, 신찬은,`진번군치는 잡현으로서 장안과의 거리가 7640 리이며, 15 현을 통솔했다`하였으나, <한서> 주에 있는 잡현은 상고할 데가 없다. ... (안) 김윤은 이렇게 적었다. `<한서>의 주에, ``진번은 장안과의 거리가 7600 리요, 임둔은 장안과의 거리가 6100 리이다``하였으니, 진번이 임둔보다 멀다.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찾을 수 없으니, 아마 지금의 영고탑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

 

平州考

 

다시 <여지승람>을 상고하니, `본조 태조 2 년 永興鎭을 부로 고치고 진을 고쳐 平州鎭이라 했다`하였으니, 평주는 곧 옛이름이므로 그대로 따른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현도의 옛 군치는 지금의 영흥 등지이고, 뒤에 북쪽으로 옮겼으니, 그 경계가 접해져서 서로 합하였으리라. <성호사설>에도, `金의 시조 今俊은 平州 사람이다. 평주는 곧 영흥 땅이지, 平山이 아니다`하였다.

 

 

요동군고

 

北元遼陽行省平章 劉益이 요양은 본디 조선땅이라 하여, 사신을 보내와 분부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회답이 없자, 유익은 결국 明에 귀부하였다. 아, 요동을 복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압록강이 하나의 큰 철한이 되어 끝내 천하의 약국이 되었으니, 애석하다. 

 

 

요동제현고

 

양평 : 바로 요동군치이니, 지금의 요양주이다. 후한 때나 진 때에는 같았다. <당서>에 의하면, 안동도호부는 옛 양평성인데, 동남쪽으

         로 평양에 이르는 거리가 8 백 리라 한다.

 

망평 :

지금의 광녕현 동남쪽이다

.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대요수가 있어 새외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데, 그 거리가 1 천 2 백 50 리라 한다.

방    : 지금의 해성 경내인데 동진 때에는 양평에 흡수되었다. <수경>에 의하면, 요수는 양평의 서쪽을 지나고, 또 남쪽으

로 방현을 지

         나고, 또 동쪽으로 안시현을 지나 서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한다.

험독 : 후한 때나 진 때에는 모두 없었다. 지금의 승덕현성 동남쪽 땅으로 요 집주이다.

 

안시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는데, 지금의 개평현 동북 70 리이다.

평곽 : 후한 때에는 같고 진 때에는 없었는데, 지금의 개평현 경내이다. <당서>에 의하면, 안동부 서쪽에서 건안성에 이르는 3 백 리로           옛 평곽현이라 하였는데,

건안은 고구려의 고을 이름이다. 또 <자치통감>에 의하 면, 이적이 고구려을 치면서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다`하였으니, 안시의 서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서안평 : 후한 때나 진 때에는 모두 같았다.

<당서>에 의하면, 안동부 남쪽에서 압록강 박작성에 이르는 7 백 리인데 옛 안평현이라 한             다

안) <한서/지리지>에 `현토군의 마자수가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마자수는 바로 압록강이니 <당서

             >가 옳고, <요사>에 호주는 본디 서안평 옛땅인데 현주 동북쪽 2 백 20 리에 있다 하였는데, 현주는 지금의 광녕 지경이니

             <요사>가 잘못이다. 

 

안시성고

 

<여지승람>에는, `龍岡현에 안시성이 있다`하고, 김시습의 <관서록>에도 또한 安州로 안시성을 삼았는데, 두 설은 다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있는 이적의 주문에 의하면, 압록강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성 중에 안시성이 들어 있으니, 그것이 요동 땅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김부식이, `안시는 일명 환도이다`한 것은 옳지 못하다. 후인들은 또 봉황성을 안시성에 해당시키는데, 아마 우리 나라 사람의 옛날 방언에 봉황을 아시조라 불렀으니, 아시의 음이 안시에 가깝기 때문이리라. ... 오골성은 요동 남쪽 지경 바다 가까운 땅에 있다. 그리고 <성경지>를 상고하면 건안은 개평 지경에 있고, 신성은 영해 지경에 있으며, 안시는 또 두 성의 뒤에 있으니, 지금 봉황성이 아님이 분명하다.

 

패수고

 

<한서/지리지>의 낙랑군 패수현 아래에 반고는 자주하기를, `물이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하였는데, 후세의 사전이 증거가 없으므로 언자들의 주장이 한결같지 않다. 혹은 평산의 저탄이라 주장하고, 혹은 평양의 대동강이라 주장하고, 또는 의주의 압록강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중에는 삼패설이 있게 되었으니, 어느 설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 두루 상고해서 갖추어 논하겠다.

 

 

 

저탄이라 주장한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이다.

 

백제기에, `온조 13 년 강역을 정할 때 북으로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에 이르렀다`하고, <고려사>에, `평주 저천을 패강이라고도 한다`하고, <승람> 평주 저탄 조에도, `평양 패강은 고구려 도성 곁에 있는데, 어떻게 백제의 경계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패하는 아마 저탄인 듯하다`하였으니,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하나의 증거이다. <고려사>에, `김관의가 당 숙종이 천보 12 년에 바다를 건너 패강 서쪽 포에 이르렀다`하였으니, 포는 전포요, 전포는 지금의 개성부 서쪽 벽란도에 있고 벽란도는 곧 저탄의 하류이니, 이를 패강이라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숙종이 동쪽에 왔다는 설은 비록 황탄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되지만, 어찌 지명까지 아울러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두 가지 증거이다.

 

 

 

고구려기에, `평원왕 13 년에 패하의 언덕에서 사냥하고 50 일 만에 돌아왔다`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그것이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 백제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은 패수 가에서 많이 있었다`하였으니, 아마 패수가 양국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또 `성왕 원년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매, 왕이 장수를 보내 출전하여 그를 물리쳤다`하였으니, 이것이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세 가지 증거이다.

 

 

 

이 세가지 증거 외에도 <수경>에, `패수는 낙랑의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하였다. 상고하건대, 임패현이란 이름은 어느 때 정해졌는지는 모르나 <승람>을 보면, 우봉현 흥의역의 옛이름이 임패이니, <수경>에서 칭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 또한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방증이 될 만하다.

 

 

 

대동강이라 주장한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이다.

 

역도원의 <수경주>에, `위만이 패수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다 하니, 만일 패수가 동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넜을 리가 없다. 내가 번사에게 물었더니, 성(상고하건대 평양성을 가리킨다)이 패수 북쪽에 있다 한다. 그 강이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을 경과한다. 그러므로 <한/지>에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하였으니 <수경>이 착오다` 하였으니, (이 주는 <수경>에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말을 착오라 하였으니, 이 주가 옳다) 이것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하나의 증거이다.

 

 

 

<당서>에,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인데, 산세를 따라 굽게 성곽을 쌓고 남쪽으로 패수에 다다랐다`하고, 또 `등주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을 따라가 남쪽으로 해연을 끼고 패강 어구와 초도를 지나면 신라 서북쪽의 장구진에 이른다`하였다. 초도는 지금 풍천부 북쪽 40 리 바다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두 가지 증거이다. 신라가 당과 함께 고구려를 평정하고 남쪽 경계를 정하였는데 현종 개원 23 년, 성덕왕 34 년에 당이 패강 이남의 땅을 주었으므로 이에 신라의 땅은 비로소 북쪽으로 지금 중화.상원의 땅을 한계로 하였고, 진훤이 고려 태조에게 준 글에, `평양의 누대에 활을 걸고 掛弓平壤樓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인다 飮馬浿江水`한 글귀가 있으니, 이것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세 가지 증거이다.

 

 

이상 두 설은 각기 증거한 바가 있고 증거도 어긋나지 않으나 두 패수는 다 평양 이남에 있다. 그런데 평양은 조선의 도읍지이고, <한서>에서는, `조선과 패수로 경계를 하였다`하였고, 또 `위만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새를 빠져나가 패수를 건넜다`하고, 또 `한의 사신 섭하가 조선으로부터 돌아와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랐다`하고, 또 `순체가 요동으로부터 군사를 내어 조선 패수 서쪽의 군사를 격파하였다`하고, 또 `조선 태자가 입조하려다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 순체가 패수 가의 군사를 깨뜨리고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한 것은, 모두 패수를 건넌 뒤에야 조선의 왕도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문에 <여지승람>과 오운의 <동사찬요>에서는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는 설을 의심하고 압록강을 패수라고도 하였는데, 후인들도 또한 그 설을 많이 따른다. 그러나 그 설도 착오이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서개마현에 마자수가 있으니, 바로 지금의 압록강이다. 패수와 마자수가 만일 한 강이라면 어찌 나누어 말하였겠는가? 상국 남구만의 <약천집>에도, `<한서/지리지> 요동 번한현에 沛水가 있으니 沛와 浿는 글자는 비록 다르나 음이 같으니, 아마 한 강인 듯하다x`하였다. 상고하건대 沛와 浿를 비록 혼용한다 하더라도 <사기>와 <한서> 두 책에서 누차 浿라 칭하고 끝내 沛라고 말하니 않았으니, 어찌 모두 착오로 그랬겠는가? 이것은 믿을 수가 없다.

 

<성경지>에는 <요사>를 인용하여, `요양현은 한의 패수현 북쪽에 있다. 패수는 어니하라고도 하고 헌우락이라고도 한다`하였는데, <일통지>에서도 그것을 따라, `지금의 어니하라고 칭하는데 해성현 서남쪽 60 리에 있다`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서안평현은 마자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곳에 있다`하였으니 압록강 이북은 모두 요동에 속하였는데, 낙랑의 여러 현이 어떻게 그 사이에 끼어 들었겠는가? 대저 <요사/지리지>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요사/지리지>, `숭주는 본래 한의 장잠현인데, 지금 요양 동북쪽 1 50 리에 있다`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뒤에 요동 땅에 교설되고 그때 또한 옛날 고을 이름을 설치하였는데, 후인들이 그릇 한이 설치한 것으로 알았던가? 어떤 이가, `참으로 자네 말과 같다면, 여러 설들은 취할 만한 것이 못되는데, 혹시 따로 그  땅이 있다는 말인가?` 하기에 나는, `여러 설이 남김없이 밝혔으니 다시 어떻게 별도의 의논을 제기하겠는가? 어리석은 나의 견해로는 여러 설 중에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이 가장 명백하고, 저탄을 패수라고 칭한 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 따로 칭한 것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옳은지 모르겠다`하자,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은 과연 어찌해서인가?`하기에 나는

`<사기><한서>의 문세를 가지고 말하겠다. 그 말에 `조선이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는데, 진이 요동의 변경에 소속시켰다`하고, `노관이 연이 쌓은 요동 장새가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 변방 요새를 고쳐 쌓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하고, `위만이 옛 진의 공지인 상하장을 구해 살았다`하였으니, 이것은 모두가 일반 문세이다. `변경`이라느니 `연이 쌓은 장새는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느니 `옛 진의 공지를 구해 살았다느니`한 것은 모두 지금의 海西지방인 것 같고, 그 중간을 비어둔 것은 지금 서북 두 나라의 경계와 같았던 것이다.

 

 

 

지금의 평양은 기자의 도읍지인데, 지금의 한양에도 평양이란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신라기>에 `김헌창의 아들이 자립하여 평양에 도읍하였다`하고, <삼국사기/지리지>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 남쪽 평양을 취하여 도읍하였다`하였는데, 모두 지금의 한양을 기리킨 것이다. 한양을 또 평양이라고 칭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건대, 전국의 말기에 기씨가 나라를 잃고 동쪽으로 지금의 한양에 옮기고서 옛이름을 그대로 칭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위만이 도읍한 평양도 지금의 한양인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임이 틀림없다.

 

 

또 상고하건대, <한서/지리지>는 모두가 당시 전벌 및 강역을 경계지을 때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글이 모두 진실하고 답험한 말이요, 멀리서 잘못 전해 들은 것이 아니다. 열수는 지금의 한강인데, 열구현은 열수가 바다에 들어가는 바로 그 어귀라 하니, 지금의 강화 지방이다. 강화를 옛날 혈구라 칭하였으니, 아마 열구의 잘못인 듯하다. 

 

 

전후 제유 중에 패수를 논한 것은 하나 뿐이 아닌데, 누구나가 지금의 평안 한 도를 우리의 강역으로 보고 또는 지금의 평양을 위씨의 도읍지로 삼고서는, 별도로 패수를 찾으니, 이는 그 실지를 얻지 못하고 더욱 후인들의 의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하였다.

 

 

 

열수고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탄열현에 분려산이 있고 거기에서 열수가 나와 서쪽으로 점제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는데, 수로의 길이가 8 백 40(20?) 리라 한다. 우리 나라 내지에 수원이 8 백 리 가량 먼 것이 없는데, 한수의 수원이 가장 멀어 그 이수가 8 백여 리가 충분히 되니, 열수는 바로 지금의 한수인 것이다. 

 

 

한구암은 이렇게 적었다.

 

`한강 외에 8 백 리 되는 큰 강이 없으니, 아마 한강이 열수인 듯하다. 한강의 수원이 하나는 태백산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오대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용진과 합하여 한강이 된다. 이른바 탄열이란 것도 아마 이 지방을 벗어나지 않은 듯하고, 열구도 또한 한강 어귀에 있었는 듯하다`

 

 

 

또 열구현이 있는데, 호삼성은, `열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다`하고, <사기>에, `한 무제가 조선을 칠 때 양복이 제병 7 천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다가 양복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치니 양복의 군사는 패주하여 산속으로 도망하였다. 조선을 평정한 두에 한 무제는, 양복이 열구에 이르러서 마땅히 순체를 기다려야 하였을 것인데, 저 혼자 지레 군사를 풀어 치다가 망실한 것이 많았다는 이유를 들어 서인을 삼았다`하였다.

 

 

 

상고하건대 위에서는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하고, 아래에서는 `열구에 이르렀다`하였으니, 그 거리가 멀지 않았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고구려의 혈구현은 지금의 강화이다였으니, 혈구는 아마 열구의 잘못일 것이며 한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 어귀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가 있다. 어떤이는 대동강을 열수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듯하다.

 

 

 

한의 말기에 낙랑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하고, 열구를 대방으로 옮겨 붙였다. 지금의 평양이 낙랑군치이고 열구가 바다로 들어가는 바로 그 어구에 있었으나, 군치의 지척지지를 어찌 다른 군에 떼어 붙였겠는가?  이것으로 열구가 강화임을 더욱 더 믿겠다.

 

 

 

마자수고

 

<한서/지리지>에, ` 현토군 서개마현에 마자수가 있어 서북쪽으로 염난수에 들어가고, 서남쪽으로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2 군을 지나며 그 거리는 1 천 1 백리라하고, <통전>에는,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라고도 한다. 그 수원이 동북 말갈 백산에서 나오는데, 물빛이 오리머리 빛깔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과의 거리가 5 백 리이며, 국내성 남쪽을 지나고 또 서쪽으로 한 강과 합하니 곧 염난수이다. 두 강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에서는 이 강이 가장 크므로 특히 천참을 삼는데, 평양 서북쪽 450 리,요수 동남쪽 480 리에 있다.

 

 

 

상고하건대 개마산이 곧 백산이니 지금의 백두산이다. 마자수는 지금 의주의 압록강을 가리킨다.<한서> 지리지에는 마자수와 패수가 같지 않은데, 오운은, `압록강을 또한 패수라 한다`하였으니, 아마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는 패수를 해당시킬 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염난수는 지금의 파저강婆猪江으로 일명 동가강冬家江이다. <성경지>에도 `동가강은 곧 염난수이다`하였다. 

 

 

 

<고려사/지리지>에는 , `압록강은 일명 청하이다`하였고, <승람>에도 그러하였으니, 모두 잘못을 답습해서 그런 것이다. 청하는 부여성 북쪽에 있다고 이미 말하였으니, 지금 압록강과는 남북이 판연하게 갈려 있다. <성경지>에는, `지금의 개원현 옛 부여 지경에 청하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요하에 들어간다`하였으니, 아마 이 강은 옛이름이 오히려 있었는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요수는 일명 압록강인데, 지금의 안민강이라 한다`하고, 호삼성(1230~1302)은 `지금 사람은 압록강을 혼동강이라 한다`하고, 주자는, `여진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는데, 또한 혼동강이라고도 한다`하였으니, 대개 옛날 동북쪽의 물은 압록으로 이름한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주자는 또 압록강을 천하 3 대강의 하나로 삼아 황하와 함께 칭하였는데, 지금 압록강을 보건대 어찌 황하와 비견할 수가 있겠는가? 동북쪽의 모든 강은 다 흑룡강으로 들어가 동해에 쏟아지는데, 더불어 비할 수가 없이 크니, 주자가 칭한 것은 아마 이것을 가리킨 듯하다. 

 

 

 

압록이란 이름이 중국 책에 나온 것은 수.당이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비로소 보이는데, 대개 한.위 때에는 고구려가 요동 동북 지경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면 항상 동북 지경에서 시작하였으니 `관구 검이 현도로 나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당 때에는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중국이 군사를 출동하면 동남쪽으로 해서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개마대산고

 

개마는 <통전>에 음이 합이라 하였다. 개마대산은 바로 지금의 백두산이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며, 고구려 초기에 개마국이 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개마대산이라 칭한 것이다. 대개 옛날에는 이름이 없었는데, 중국에서 개마의 대산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한서/지리지>에 서개마현이 있는데, 그 산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 `서개마현에 마자수가 있는데, 곧 후일의 압록강으로서 그 수원이 백두산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개마대산이 백두산이란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조위 시대에는 불함산이라 칭하엿으니, <삼국지> 읍루전에, `읍루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당 시대에는 백산이라 칭하였으니, <통전> 물길전에 `백산부락이 있다`하고, 또 압록강 수원이 동북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태백산이라고도 칭하였으니, <문헌통고> 발해전에, `무후 때 발갈의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여종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를 건너서 태백산 동북쪽을 확보하고 오(아랫목 오 奧)루하를 막았다`하고, 또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고구려의 잔얼이 태백산 밑에 웅거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중국 사람은 장백산이라 칭하니, <성경지>에 이른바 `장백산`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백두산이란 이름은 곧 우리 나라 사람이 칭한 것이다. ... <후한서>에, `동옥저는 개마산에 있다`하였는데, 동옥저의 땅은 본래 철령 이북 삼갑 이남의 땅이 모두 그것이다. <고려사> 윤관전에 있는 임언이 지은 구성기에, `여진은 본디 고구려 부락으로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하고, 또 `구성은 그 땅이 사방 3 백 리인데,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대산에 끼였으며 남쪽은 장주와 정주 2 주에 접하였다`하였는데, 2 주는 다 지금의 정평 지경이고 지금의 함경도 삼수.갑산 2 부가 다 백두산 동남쪽 기슭이니 `서북쪽은 개마대산에 끼였다`는 말을 믿겠다.

 

 

 

<일통지>에서 조선의 산천을 기재하면서, `개마대산이 평양성 서쪽에 있고 그 동쪽은 곧 옛날의 동옥저국이다`하였는데, `동쪽이 옥저이다`는 말은 옳으나 `평양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후한서> 주를 상고하면, 개마현은 현토군에 속하고 그 산은 지금 평양성 서쪽에 있는데 평양은 지금 왕검성이라고 되어 있으니, <일통지>의 잘못은 대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라. <승람>에서도 또한 <일통지>를 따라 평양조에 기재하되, 소재처를 지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부득이 고적조 밑에 기입하고 임언의 구성기를 인용하여, `구성은 지금 함경도에 속하였고, 그 서북은 여진의 땅이니, 평양의 지경이 아니다. 이 산은 아마 압록강 밖 서북 경계에 있었는 듯하다`하였는데, 반계 유씨는 그 말을 반박하기를, `이 말은 잘못이다. 소위 개마산이란 것은 지금 평안도와 함경도 두 도의 경계이니, 곧 영원.맹산.함흥.영흥의 사이에 있는 큰 영이 바로 그것이다`하였다.

  

 

그러나 유씨도 오히려 <한서/지리지>에, `마자수의 수원이 개마산에서 나온다`한 설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또 <한서/지리지>에 현토군의 속현이 셋으로 되어 있는데, 개마현이 그 중 하나인 것이다. 이전 역사책에서 이미, `현토군치인 고구려현은 요동 양평의 동북에 있다`하였으니, 거기에서 유씨가 말한 함흥.영원 등까지는 1 천 리가 넘는다. 중국이 현을 설치할 때 폭원을 비록 크게 했다 하더라도 어찌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이처럼 멀게 깊숙이 들어왔겠는가?

 

 

 

예고

 

맥고

 

 

 

옥저고

 

동옥저 경계는 지금 함경남도의 고원.영흥 등에서 경성 이남에까지 이르렀다. <후한서>에 처음으로 동옥저전을 실었는데 거기에,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어, 동쪽은 바다에 닿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은 예.맥에 접하였느데,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어 그 길이가 1 천 리쯤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였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의 땅을 현토군으로 삼았다. 소제 때에 이맥이 침범한다는 이유로 현토군을 고구려로 옮겼다.

 

 

 

다시 옥저를 현으로 삼아 낙랑동부도위에 소속시켰더니, 광무가 도위를 없애고 그 우두머리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은 매우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끼었는데, 결국은 고구려의 신하 노릇을 하였다`하였고, 신라 시조 53 년에 동옥저가 좋은 말을 바쳤다 하니, 또한 남쪽으로는 신라와 통하였던 것이다. 고구려 태조왕 4 년에 동옥저를 위하여 성읍을 삼았다 하니, 이때에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북옥저는 지금의 함경북도와 야인의 땅이다. <후한서>에, `북옥저는 일명 매구루인데, 남옥저와의 상거가 8 백 리이며, 북쪽으로는 읍루에 접하였다. 읍루 사람이 배를 약탈하기를 좋아하니, 북옥저 사람은 그들을 무서워하여 매년 여름이면 바위 구멍에 숨어 수비했다`하였다.

 

 

 

남옥저는 지금 어느 땅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후한서>에, `북옥저는 남옥저와의 상거가 8 백 리이다`하였으니, 아마 북옥저의 남쪽에 있었던 것 같다. 또 백제기에, `시조 43년 남옥저 사람이 부양에 와서 귀의했다`하였다. 부양은 지금의 평강현이니, 이에 의하면 아마 부양의 북쪽에 있었던 것이리라.

 

 

 

임상덕은, `고구려 동천왕이 비류수 위에서 싸우고 또 양맥에서 싸웠으며, 압록원으로 달아나고 남옥저로 달아났다 한다. 사서에 상고하면, 비류수는 환도의 동북쪽에 있고, 양맥은 비류수의 서쪽, 환도의 동북쪽에 있고, 압록원은 환도의 남쪽에 있고, 남옥저는 마땅히 또 압록의 남쪽에 있을 것이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금의 삼수.갑산.위원의 사이인 듯하다`하였으니, 이 설의 고증이 정밀한 것 같다.

 

 

 

 

 

부여고

 

<사기> 화식전에, `연이 북쪽으로 오환과 부여에 인접했다`하였으니, 부여라는 이름이 생긴 유래는 오래되었다.... <북사>에는, `두막루국은 옛날의 부여국이다`하고, <성경지>에는, `부여국은 지금 개원현 소재지 경내가 모두 그 땅이다`하고 또, `그 왕성은 개원현성 서남쪽에 있는데, 요에서 통주로 고쳤다`하였다.

 

 

 

<성경지>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를 상고하여 도로의 이수를 가지고 계산하면, 부여에서 한의 요동군과의 거리는 오히려 1 천 4 ~ 5 백 리가 된다. 지금 개원은 요양과의 거리가 겨우 3 백여 리이고 붉은 옥과 아름다운 구슬이 지금 흑룡강 경내에서 난다 전하니, 부여부는 마땅히 변외 영고탑 흑룡강 지경에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