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사랑 | 조회 333 |추천 0 |2006.02.16. 11:29 http://cafe.daum.net/alhc/7h/214

 

《고려사절요》에서 고려의 서북쪽 영토와 관련되는 기록들을 뽑아 봤습니다.
 
태조 신묘 14년(931), 후당 장흥 2년ㆍ거란 천현 6년 ○ 이해에 안북
부(安北
: 평남 안주)와 강덕진(剛德鎭)을 설치하고 원윤(元尹) 평환(平喚)을 진두(鎭頭)로 삼았다. 왕이 유사에게 이르기를, “북번(北蕃) 사람은 얼굴은 사람꼴이지만 마음은 짐승과 같아서, 굶주리면 오고 배부르면 가버리며 이익을 보면 부끄러움도 잊는다. 지금은 비록 우리에게 복종하여 섬기고 있지마는, 따르거나 배반함이 일정치 않을 것이니 마땅히 지나가는 주ㆍ진에는 관사(館舍)를 성 밖에 지어서 그들을 접대하라." 하였다.
성종 계사 12년(993), 송 순화 4년ㆍ거란 통화 11년 소손녕이 성명(聲明)하기를, “대조(大朝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 하였다. 또 글을 보내 말하기를, “대조가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은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하였다. 서희가 글을 보고는 돌아와서 상황이 화친할 수 있겠다고 아뢰니 ...... 서희가 또 아뢰기를, “거란의 동경(요양)부터 우리나라의 안북
부(安北
: 청천강 바로 이남의 안주)에 이르는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에게 점거되었었는데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ㆍ송성(松城: 평북 박천 부근) 등의 성을 쌓았으니, 지금 거란 군사가 쳐들어 온 것은 그 의도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구려의 옛 땅을 빼앗는다고 소리치는 것은 실상은 우리를 공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군사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대번에 서경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떼어 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성종 갑오 13년(994), 송 순화 5년ㆍ거란 통화 12년 ○ 봄 2월에 소손녕이 글을 보내어, “요사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보니, '고려는 일찍부터 국교를 통하고 국경 지역이 서로 맞닿아 있는데, 비록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길 때는 본래 법규와 의식이 있지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하려면 모름지기 오래 지속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니 만약 미리 설비하지 않으면 사신의 왕래가 중간에서 방해를 받을까 염려되니, 고려와 의논하여 곧 요충 길목에 성지(城池)를 쌓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얼마 후 이 명령에 준하여 곧 참작하여 압록강 서리(西里)에 5개의 성을 쌓기로 하여, 3월 초에 성을 쌓을 곳에 이르러 수축에 착수하기로 하였으니, 삼가 청컨대 대왕께서 미리 먼저 지휘하여 안북
부(安北
평남 안주(安州))에서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2백 80리 사이에 적당한 토지를 답사하고 이정(里程)의 거리를 참작하여 아울러 성을 쌓도록 하여, 역부(役夫)를 보내어 같은 시기에 착수하도록 하고, 그 쌓아야 할 성의 수를 빨리 회보하소서. 거마를 교통하여 멀리 조공의 길을 열고 길이 조정(朝廷 거란)을 받듦이 스스로 평안할 계책을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장흥진(長興鎭)ㆍ귀화진(歸化鎭 평북, 지역은 미상(未詳)) 두 진과 곽주(郭州 평북 정주(定州))ㆍ귀주(龜州 평북 귀성(龜城)) 두 주에 성을 쌓았다.  
현종 임자 3년(1012), 송 대중상부 5년ㆍ거란 개태(開泰) 원년 ○ 김은부(金殷傅)가 돌아오다가 내원
성(來遠
압록강 어귀에 있는 금동도(黔同島))에 이르니 거란이 여진을 시기하여 김은부를 붙잡아 갔다. ○ 9월에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 문유령(文儒領)을 거란의 내원
(來遠
城)에 보내었다.  
문종 갑오 8년(1054), 송 지화(至和) 원년ㆍ거란 중희 23년 ○ 거란이 처음으로 궁구문란(弓口門欄)을 포주
성(抱州
城) 동야(東野)에 설치하였다.  
문종 을미 9년(1055), 송 지화 2년ㆍ거란 도종(道宗) 청녕(淸寧) 원년 ○ 가을 7월에 도병마사가 아뢰기를, “거란의 전 태후황제(前太后皇帝)가 조하여 압록강 동쪽으로 우리나라 경계를 내려주었으나, 어떤 곳에는 성과 다리를 만들고 어떤 곳에는 궁구란자(弓口欄子)를 설치하여 점점 옛 한계를 넘어오니 이는 한없는 욕심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와서는 또 우정(郵亭)을 새로 세워서 우리 국경을 잠식하니, 《좌전(左傳)》에 이른바, '더욱 만연(蔓延)하게 하지 말라. 만연되면 없애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국서를 동경 유수(東京留守)에게 보내어 그 불가함을 전달하고 만일 듣지 않거든 사신을 보내 고주(告奏)해야 합니다." 하니, 이에 동경 유수에게 글을 보내기를, “우리나라가 기자(箕子)의 나라를 물려받아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전 태후황제께서 옥책(玉冊)을 내리시어 국토를 봉하여 주실 때에도 강을 한계로 하였는데, 지난번에 상국이 우리 땅에 들어와 다리와 성보(城堡)를 만들었습니다. 조공하는 정성을 더욱 공순히 바쳐 높은 대궐에 글을 올려 옛 땅을 돌려주도록 청하였으나 지금까지 윤허해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여 바야흐로 간절히 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요사이 내원
성(來遠
)의 군부(軍夫)들이 우리 성에 바싹 붙여 궁구문(弓口門)을 옮겨 세우고 또 정사(亭舍)를 새로 짓고자 재목과 돌을 벌써 높이 쌓아 놓았으므로, 변방 백성들이 소요하고 놀라서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알지 못하니, 삼가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이웃 나라와 친하기를 생각하시고 멀리까지 사람을 포용하는 데 사랑을 펴서 황제께 잘 아뢰어 전에 내려주었던 땅을 되돌려 주고 그 성ㆍ다리ㆍ궁란ㆍ정사를 모두 헐어 없애게 하소서." 하였다.   예종 병신 11년(1116), 송 정화 6년ㆍ요 천경 6년ㆍ금 수국 2년 ○ 3월에 왕이 요 나라 내원(來遠 압록강 금동도(黔同島))ㆍ포주
(抱州
평북 의주)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당하여 성 중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쌀 1천 석을 보내니, 내원성의 통군(統軍)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요 나라 내원ㆍ포주
두 성의 유민이 양과 말 수백 필을 몰고 와서 항복하였다.
금 나라 장수 살갈(撒喝)이 요 나라의 내원ㆍ
포주
두 성을 쳐서 거의 함락하자 그 통군 야율녕(耶律寧)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려 하였다. 왕이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韓皦如)를 보내어 야율녕을 불러 효유하니, 야율녕이 왕의 전지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교여가 급히 보고하니 왕이 추밀원에 명하여 차자를 갖추어 보내려 하였다. 재신과 간관이 아뢰기를, “저들이 왕의 전지를 요구하는 뜻을 알기 어려우니 중지 하옵소서." 하였다. 왕이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청하기를, “포주
는 원래 우리나라 옛땅이니 돌려보내기를 원한다."고 하자, 금 나라 임금이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스스로 빼앗으라."고 하였다.
예종 정유 12년(1117), 송 정화 7년ㆍ요 천경 7년ㆍ금 천보(天輔) 원년
○ 김연이 급히 보고하기를, “금 나라 군사가 요 나라의 개주(開州: 압록강 건너편의 봉황성 부근)를 쳐서 차지하고 내원성(來遠城)을 습격하여 대부ㆍ걸타(乞打)ㆍ유백(柳白) 세 군영을 함락하고 전함을 모두 불태웠는데, 통군 야율녕(耶律寧)이 내원성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 등과 함께 그 무리를 인솔하여 배 1백 40척에 싣고 어구에 나와 정박하면서, 우리나라 영덕성(寧德城 평북 의주)에 통첩을 보내어, 내원ㆍ
포주
(抱州
평북 의주) 두 성을 우리나라에 돌려 보내준다고 하면서 드디어 해상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우리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가서 병기와 금전ㆍ양곡을 수합한 것이 매우 많습니다."고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포주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 방비를 설치하니, 백관이 표문을 올려 두 성을 회복한 것을 축하하였다.
 
인종 병오 4년(1126) 송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ㆍ 금 천회(天會) 4년 ○ 위위경 김자류(金子鏐), 형부 낭중 유덕문(柳德文)을 금 나라에 보내어 선유에 사례하는 표문을 올리기를, “고백숙이 와서 보주
성(保州
)의 땅을 떼어 고려에 소속시킴을 허락하고 다시 회수하지 아니한다는 성지를 은밀히 전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고구려의 원래의 영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의 옛 땅은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았는데, 여러 번 변천을 겪어서 우리 선대에 이르러 북국(北國 요(遼))에 겸병을 당하고, 삼한의 영지가 침해당하여, 비록 이웃 나라로서의 수호는 맺었으나 옛 땅을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명이 새로 내려 성스러운 왕이 이미 일어나시고 군사가 정의를 위하여 일어남을 보고, 성보(城堡)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신의 아버지인 선왕 때에 귀국의 변방 신하 사을하(沙乙何)가 와서 황제의 칙지를 전하기를, '보주
(保州
)는 본래 고려의 영토이니 고려에서 회수함이 옳다.' 하여, 선왕은 곧 그 성과 못을 수리하고 민가를 들여보냈습니다. 이때에 비록 우리나라가 상국에 신하로 복속하지 않았지만, 선제(先帝)가 특별히 이웃 나라를 사랑하시어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시고 우리에게 옛 땅을 주었습니다. 다음 세대가 왕위를 계승함에 이르러 천명을 받은 거룩한 덕을 만나서 덕음을 상세히 듣고 공손히 신하의 직분을 수행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동쪽의 자그마한 땅은 본래 우리나라의 변경 지역인데, 비록 일찍이 거란에게 침탈당했으나, 우리나라가 이미 선대에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여 이례적인 혜택을 베풀어 우리나라에 예속시키니, 어찌 요행으로 이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대저 특별한 황제의 은덕일 뿐입니다. 깊은 인자함과 큰 의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작은 힘과 얕은 재주로 어떻게 보답할 것입니까. 오직 철을 따라 조공하는 일을 극진히 하며 속국이 지켜야 할 상례를 지켜 온 나라가 기꺼이 정성을 다하며 자손에게 전해가면서 영원히 맹세합니다. 높은 밝으심이 위에 있는지라 진실한 정성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하였다.  
○ 금 나라에서 금주(錦州) 관내 관찰사 사고덕(司古德), 위위 소경 한방(韓昉) 등을 보내 왔다. ... “추밀원의 차자(箚子)를 통하여 주상의 말씀을 받자오니 보주
(保州
평북 의주(義州)) 땅은 처음에 조유(詔諭)가 있어 다시는 수복하지 않기로 한 것이오니, 귀국에서 당연히 옛법을 따라 왕실을 받들 것으로 생각하고 (금나라) 조정에서 그 땅을 아끼지 않고 (고려에게) 특히 갈라 주었는데, 그 뒤에 몇 해가 지나도록 귀국에서는 아직 맹세하는 표문을 바치지 아니하며, 위에 말한 주성(州城)을 점령하여 지키니, 도리에 어찌 온당하다 하겠는가. 또 그 위협을 당하여 왔거나 도망하여 옮겨 사는 호구(戶口)가 그 수가 상당히 많은데 모두 사망하였다 하니 자못 믿을 수 없도다. 귀국이 과연 정성을 다하여 주상을 섬긴다면 곧 맹세하는 표문을 올리시오. 그러면 조정에서도 약속하는 조서를 회답하여 줄 것이며, 겸하여 따로 지휘(指揮)를 내려 거듭 경계를 획정하고 모든 것을 힘써 관대하게 처리하여, 장구한 계책을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명을 들으니 감사하고 송구함을 견딜 수 없다. 뒤에 마땅히 표문을 올려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 상황을 보면, 고려 초기에는 청천강을 서북쪽 경계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국경도시라 할 만한 곳은 '안북부' (안주)로서 청천간 바로 남쪽입니다.
 
그런데 아래 서희의 말을 보면, 요양(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청천강에 이르는 땅은 모두 생여진이 점거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의 땅(청천강 북쪽 일부)을 이미 광종 대에 정벌하여 성을 쌓았다는 것이고, 안북부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의 땅을 거란이 고려에 내 주었으나, 실질적으로 이 땅은 여진이 점유하였기에 고려는 완전히 무혈로 땅을 얻은 건 아니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냄으로써' 강동6주를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 평장사 서희가 여진 공격한 기사 참고)
 
하여튼 성종 무렵에 서희의 그 유명한 이야기를 통해 안북부(안주)에서 압록강 까지 영토가 확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후 거란은 압록강을 건너와서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 부근에 내원, 포주의 두 성을 쌓아 다시 강동6주 땅의 일부를 빼앗아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의주 부근에서 포주는 거란 땅, 흥화진은 고려 땅인 식으로 갈라졌던 것 같습니다.
 
고려는 자력으로 내원, 포주를 회복하지 못하고, 금의 아골타가 요를 힘으로 물리치는 것을 틈타서 금에게 이 땅들을 고려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결국 금이 이들 성을 공격하자 이들 성이 버티지 못하고 고려에 성을 넘겨준다고 선언하고 튀어 버리는(-.-;) 형국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일종의 어부지리일까나?) 이후 고려말의 상황으로 이어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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